수유칼럼

<선거 이후>에 대해서 몇 가지

- 가게모토 츠요시

이제 2월이 되고 2013년도 한 달이나 지나 버렸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작년 말의 선거부터 꽤 오래 되었다는 감각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작년 말의 선거>라고 약간 어렴풋하게 썼지만, 왜냐하면, 일본과 한국, 두 가지의 선거를 이 글에서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말해 놓아야 할 것은, 선거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선거만이 투쟁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전제를 나도 공유하면서 선거에 대해서 쓰겠다는 것이다. 물론 선거는 안 좋은 결과가 되어벼렸다.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랬었다. 그런데 가령 다른 후보가 선거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싸워야할 것은 여전히 있으며, 싸움은 계속 해 나가야 한다는 기본은 공유하면서 이 글을 계속한다. 그리고 다른 후보가 이겼으면 개별 투쟁 현장에서는 상황이 개선되었을 경우가 많다는 것도 거듭 적어 놓아야겠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 가운데 일본의 외국인등록증의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표시된 사람들의 한국 입국은 다시 5년 동안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도 적어 놓아야 한다. 명동이나 동대문을 가면, 셀 수 없을 정도로 걸어 다니는 일본인이 있는 한편, 한국 국적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실시하는 이동의 자유를 막는 제도를 여전히 계속하겠다는 것을 한국의 선거 결과는 보여준다.

1. 세대론 비판

이번에 선거 이후의 선거 분석에서 <세대론>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세대마다 의견이 다르며 분열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을 틀로 삼아 분석하는 한국의 매체들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마치 사회분열의 증거인 것처럼 거론하는 매체들의 모습을 아주 묘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물어야 할 것은, 서로 하고 싶은 일이 다른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작업에 대해서가 아닐까. 세대는 세대마다 분열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서로의 분열이 있기 때문에 겨우 비로소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즉 연대의 조건은 분리이다. 그러나 한국의 매체들은 그 분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분열에서 시작해야할 연대를 모색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분열을 해소하는 <국민대통합>을 기대할 것 같았다.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국민대통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의 모색이다. 그러하기 위해는 서로 분리되어야 되고, 그 분리에서부터 밖에 연대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인>같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전체성과 동질성에서 결합하는 <통합>이 아니라, 서로 단절하며 분리하며 분열한 상태에서 <연대>를 찾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분열을 해소하려는 <통합>은 동질성의 유대감을 강하게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동질성에서 빠져 나오는 자들을 아주 쉽게 배제할 것이다. 서로가 분열하면서 분열한 그대로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동질성에서 빠져나온다는 것 자체가 분열의 형태가 되며, 연대의 조선이 될 것이다. 모호한 동질성의 <통합>에서 빠져 나온 자들의 <연대>야말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세대론을 거론한다면, 차이를 없애는 통합의 방향으로 논의하는 게 아니라, 차이 자체를 조건으로 삼는 연대의 방향으로 논의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동질성으로 통합하는 일은 일견 좋은 일인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잡다한 자들의 연대의 조선을 없애는 일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2. 세습론 비판

이번 선거 이후 많이 접했던 말은 <세습>이다. <어디 봉건주의 시대의 이야긴지>라는 식으로 비웃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세습> 그 자체만을 문제 삼는 논조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는 언제, 어디에, 누구로서 태어날 수 있는지를 선택할 수 없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이는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부모님이 있지만, 이 부모에서 자라고 싶어서 자란 게 아니라, 자랐다보면 나를 키워준 부모가 있었다는 그런 것이다. 그러한 원론적인 의미에서 누구누구의 아이로서 태어난다는 것 자체에 대한 비판은 비판으로서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세습 비판을 할 때는 출생에 관한 부분만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된 비판이 아니다. 나도 술집에서 몇 번 접했지만, <동북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모두 세습이다>식으로 비웃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비웃음은 이 비웃음을 말하는 자의 비판능력을 없애는 점에서 아주 나쁜 비판이다. 즉 우리에 필요한 비판적 사고는, 이러한 비웃음의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비웃음에서는 비판 대상을 비판할 수 없다. 심지어 이러한 비웃음은 우리의 비판 능력을 축소재생산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 의미에서 세습 비판은 <세습>에 머물면 의미가 없다. 세습 비판은 혈통이나 가족관계 같은 선택불가능한 부분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스스로가 부모의 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는, 본인들이 선택가능한 부분에 대해 비판해야 할 것이다. <세습> 그 자체가 아니라, <세습>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그것을 비판해야 한다. 단순히 혈통만을 보고 비웃는 일은 스스로의 비판 능력을 삭감할 아주 어이가 없는 행위이다. 우리는 재벌 딸들이 어이 없이 빵집이나 커피집을 경영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이 이유는 재벌의 딸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노동자나 작은 빵집을 착취하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태어남>의 단계가 아니라 세습의 틀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다는 아주 한심한 사태에 대해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우리의 비판의 방법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이미 있는 권위의 틀 속에서 아무리 죄파적으로 행동을 해봤자, 틀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으며 결국 권위에 포섭된다. 권위에 포섭당하면, 권위와 스스로를 분리할 수 없으며, 권위의 밖에 있는 어떤 대상과 연대할 수도 없게 된다. 권위 아래 함께 있는 대상과 갈등 없는 <통합> 정도는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니까 항상 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비판은 연대를 가능케 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이 글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동질성으로 인해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으로 인해 연대할 길을 모색하자,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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