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7)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4-2-4 용서하기

하버지, 가해자가 배상할 능력은 있으나 배상하지 않으려 할 때 피해자가 배상을 강제할 능방법과 능력이 있다면 배상을 받아야 돼 말아야 돼? 또 피해자가 배상을 강제할 능력이 없다면 어찌해야 돼? 물론 하버지는 가해자가 배상할 능력이 있다면 배상하도록 강제할 거야. 거기에는 법적인 수단까지 포함되지. 하버지의 감정 소모를 줄이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책임을 다하게 만들 거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과 능력껏 배상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회개의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하버지는 생각해.

그러나 만약에 가해자에게 배상할 능력이 없거나 피해자에게 배상 받을 방법과 수단이 없다면 깨끗이 포기해야지. 하버지는 안 되는 것에 매달리며 괴로워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단다. 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안 된다고 판단되는 어떤 순간이 오면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을 하버지는 구약 성경의 다윗에게 배웠어.

다윗 왕이 자기에게 충성을 다했던 부하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가 낳은 지 칠일 만에 병이 나서 죽게 되었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다윗은 회개하려고 재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자지도 먹지도 않고 몇날며칠을 기도했대. 저에게 벌주시고 자식만은 살려달라고. 그래도 자식이 죽고 신하들은 다윗이 낙심할까봐 알리지 못하고 수군거리자 다윗이 물었대. “죽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일어나 누더기를 벗어던지고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른 뒤에 먹고 마셨대. 신하들이 의아해하자 그들에게 말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 줄 알았으나 그 애를 데려가신 것으로 내가 받을 벌을 이미 다 받았다. 여기서 거기는 누구나 가지만 내가 슬퍼한들 거기서 여기는 아무도 올 수 없지 않느냐.”

재미있고 그럴 듯한 얘기네. 그런데 하버지, 원망이나 미움을 버리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가해 사실과 피해 사실 그리고 가해자가 원상회복이나 배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실까지 그 사건의 전말을 다 잊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잊다니? 아니야.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그 사건의 전말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돼. 원상회복과 배상 책임을 묻기 위해서, 또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어리석음이나 나약함이나 사악함을 반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계속될지 모를 다음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한 번 당한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 사건에서 교훈을 찾아야 돼.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수치스러운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하듯이 기억해야 돼.

그러나 하버지가 잊자는 것은 가해자가 원상회복이나 배상을 하든, 못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가해자에게 해코지하려는 마음 즉 미움만 잊자는 거야. 그래야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느라고 나를 소모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윗처럼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어.

하버지, 그런데 사건 전말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원망과 미움이 안 생겨?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야? 자칫하면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에 끌려다닐 수도 있지. 그런데 가해자에 대한 미움을 가라앉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긴 있어. 첫째로 가해자가 놓인 처지와 그래서 그가 잘못한 동기나 의도를 알아보자고 했어. 알고 보면 가해자도 사실은 여러 번 그런 피해를 당해서 이제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피해자일 수가 있어. 궁지에 내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그가 극한적인 생존 상황에 내몰려 있어서 저지른 일이라면 원상회복이나 배상의 책임을 못했다고 미워할 수만은 없지. 극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인 나보다 훨씬 더 어렵고 괴로운 형편과 처지에서 살아가는 것을 안다면 미움이 누그러질 수도 있어.

그러나 물론 나보다 부자나 권력자가 나를 못 살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돼. 우리가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들을 파괴하여 못살게 하려는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강렬한 증오가 동기로 필요한 게 아니야. 우리는 미워하지 않아야 우리의 피해를 배상받거나 더 큰 피해 줄이기 위해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권력자나 부자들이 횡포를 부리고 욕심을 부릴 수 있는 사회제도와 구조를 뜯어고쳐서 더는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둘째로 미움과 원망의 이해득실을 따져보자는 거야. 미움과 원망을 가지는 쪽과 버리는 쪽 어느 쪽이 더 편안하고 유익할까. 가해자가 회개하고 원상회복이나 배상의 노력을 하게 만드는데 내게 가득 차 있는 미움이나 원망이 어떤 도움이 될까. 그리고 그게 나의 몸과 마음과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 그러면 결국 미움이나 원망은 가해자에게 복수하여 가해자를 파괴하려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알게 돼. 오히려 끝없이 원망과 미움에 끌려 다니면서 나를 끊임없이 나를 소모시키고 복수의 악순환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걸 알게 돼. 냉정하게 원망과 미움의 이해득실을 따져본다면 결국 그걸 버리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를 거야. 그러면 원망이나 미움을 보다 더 쉽게 누그러뜨릴 수가 있을 거야.

세 번째로 이만하기 다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원망과 미움을 가라앉히자는 거야 . 이 정도의 원망이나 미움이라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거야.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있어. 아이를 낳으려는 산모들,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 자해 행위로 어떤 구경거리를 보여주려는 사람들, 마취 없이 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이지. 이들은 실제로 고통을 겪기 전에 최악의 고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연습을 여러 번 해본대. 그리고 그들에게 실제로 고통이 닥치면 ‘상상했던 만큼 고통스럽지 않으니 다행이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자기최면을 건다는 거야. 우리도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원망이나 미움에서 벗어난 어떤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어. 그리고 ‘그는 더한 것도 벗어났는데 이 정도 원망이나 미움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벗어날 수가 있어’하고 자기최면을 걸 수 있어.

이때에 육체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원망과 미움을 이겨내고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본보기가 예수의 십자가형이라고 생각해. 신화 속에서 예수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였고 동시에 신의 아들이 되는 가장 위대한 승리자였어. 그러나 실재했던 인간 예수는 처형되기 전에 가혹했던 로마 총독과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악덕 지주들을 비판하면서 억압당하던 당시 민중들을 위로했어. 그리고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하자 그를 중심으로 민중들이 모여 들었어. 이를 동족인 제사장이 로마총독에게 반역죄로 고발했지. 그래서 그가 십자가 형틀 위에서 못이 박혀 처형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야. 그가 체포되고 처형되어 죽는 순간까지의 이야기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걷어내면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배신자들을 용서하는 인간 예수를 만날 수 있어. 그는 십자가 위에서 몰라서 그러니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지.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충분하게 위로 받고 우리의 괴로움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 미움과 고통을 이겨낸 예수를 떠올리면 우리는 이만하기 다행이라며 우리도 예수처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어. 다만 예수가 미움을 이겨냈다는 신화가 악에 복종하는 미덕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지만.

하버지,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상황을 바꾸면 원망과 미움이 자연스럽게 사라지잖아.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하버지의 방법은 근본적이고 영속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잖아. 그런데 홍아야, 네 말이 형식논리만으로는 옳다만 가능성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선하기만 할 수도 없고 객관적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전능자도 아니잖아. 네 말대로 덜 괴롭히고 덜 미워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같은 뜻을 가진 이들끼리 힘을 모으게 돼. 그리고 그 힘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서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독점적이고 독재적이고 독선적인 결정구조를 보다 민주적으로 제도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지.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공평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공평한 정치·사회·경제적인 장치를 만들었어도 그게 저절로 작동되는 것은 아니야. 피해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이 연대하여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에게 대등한 힘으로 투쟁할 수 있을 때만 잠시 제대로 작동될 뿐이야. 인간 사회에 억압과 착취가 아주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불평등한 인간관계로 미움도 아주 사라질 수는 없어.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움 때문에 괴로워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있어.

그래요. 인간이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겠는데 하버지의 방법은 미움을 달래어 가라앉히려는 거지 아주 없애는 건 아니네요. 감정은 단세포 시절부터 생물이 변화하는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진화시켜온 아주 중요한 생명현상이야. 미움도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본능적인 감정이므로 마음대로 제거해 버릴 수 없단다. 그러니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없다면 달래면서 살 수밖에 없잖니.

네 말대로 만약에 어떤 감정을 아주 없애거나 다시 생기게 하는 방법으로 어떤 장치나 약물을 개발했다고 하자. 인간이 그걸 사용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다 잊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마약 중독자가 제정신이 아니듯이 그건 제 정신을 가진 인간이 아니야. 어떤 약물이나 장치로 감정을 조절하고서도 변화하는 상황에 적절하게 반사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라 불쾌한 감정을 유쾌한 감정으로 바꿀 수 있는 그 장치나 약물을 통제하는 어떤 자에게 마약 중독자처럼 거의 노예 상태로 의존하게 되지 않을까. 그건 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야. 따라서 미움을 포함한 감정을 아주 없애는 손쉬운 방법이나 수단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

그러니까 하버지 말씀은 만약에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우리가 미움에 끌려다니지 말고 그걸 다스릴 수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 미움을 다스리려면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아야지. 작은 미움은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고, 큰 미움은 궁극적으로 상대를 파괴하여 없애려는 마음이야. 미운 사람은 꼴도 보기 싫다는 거지.

그런데 만약에 단 한 번의 오해로라도 내 눈밖에 난 미운 사람은 내 눈 앞에서 꺼져 버리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대로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신이 누굴 미워하기 전에 누군가가 자신을 먼저 미워하여 다른 세상에 가 있어야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미움을 받는 대로 사라져 버린다면 이세상은 누가 남아 있을까. 하버지 생각에는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하나도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아.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사람이 귀한 것을 알고 함부로 미워하지 못하고 웬만하면 용서하면서 더불어 살려고 할 거야.

그러나 현실에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한 사람이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끝없이 미워하지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잖아? 그렇다면 상대를 파괴하려들 게 아니라 자기가 물러서서 거리를 만들어야지. 살인 사건은 죽여 없애려는 경우로 가장 심한 해코지야. 하버지 말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는 거야. 그러나 아무리 내게 피해를 끼친 원수라도 그가 원상회복이나 배상의 책임을 다하든 못하든 또는 안 하든 상관없이 밉다고 해코지는 말라는 거야.

앞에서는 책임은 지우자면서 지금은 미워하여 해코지는 말라 하시니 하버지 말씀은 앞뒤가 안 맞네. 하버지는 법적인 수단까지를 포함해서 책임을 지우겠다고 하셨어. 그런데 법으로 따지자는 것은 피해를 원상회복하지 않거나 배상하지 않을 때 감방에 가두거나 사형을 하여 피해만큼 형벌로 해코지를 하자는 거잖아. 법의 힘으로 사형시키는 것을 설마 해코지가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 피해자를 대신하여 국가의 강제력으로 자유를 빼앗거나 사형시키는 것도 다 해코지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따지고 있는 문제는 책임을 지울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이지 누가 어떤 강제력으로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책임을 지울지 말지를 판단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서 가해자가 어떤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그 동기와 의도를 들여다보자는 거야. 그리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와 다하지 아니하는 경우를 나누어 보자는 거야. 만약에 가해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그랬고 또 원상회복이나 배상 책임을 다하려 하더라도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 책임에서 풀어주자는 거야. 그러나 가해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보다 잘살고 있는데 더 잘 살려고 그랬거나 또 능력이 있는데도 책임을 지지 않고 내던지면 법적 수단으로라도 책임을 끝까지 지우자는 거야.

그러면 배상할 능력은 있지만 배상할 의사가 없는 가해자를 하버지는 용서할 수 없어서 법으로 자유를 빼앗고 해코지하자는 거네. 그건 미워하는 거 아닌가? 그래. 법적인 수단으로 피해를 원상회복시키거나 배상을 받으려는데 가해자가 따르지 않으면 그가 미워서 국가의 강제력으로 자유를 빼앗고 일정기간 잡아가두는 해코지를 하지. 남에게 피해를 주면 강제력을 지닌 국가가 나서서 피해에 비례하는 징벌로 보복해주니까 그것도 해코지는 해코지야. 잡아가두는 것만이 아니라 돈으로 배상하게 하는 것도 재산을 해코지하는 징벌이지. 모든 형벌은 해코지를 해야만 가능한 징벌적 의미가 있어.

그러나 재산형(財産刑)이나 자유형(自由刑)은 생명이나 신체나 명예를 해코지하는 것보다는 덜 가혹한 형태야. 물론 벌금을 내거나 배상을 해야하는 재산형도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훨씬 가혹하지. 밖에 나가서 맘대로 살아가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서 차라리 자유를 포기하고 감방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자유형도 덜 가혹할 수 있고. 그래서 형벌도 완전한 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어.

그러나 일정 기간 잡아가두어 놓는 것은 남의 손해에 비례하는 만큼 해코지하자는 징벌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야. 재범의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자는 소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일정 기간 교화시켜서 건전한 인간으로 만들자는 적극적인 의미도 있어. 사형은 물론 없어져야 하고 형무소 대신 교도소는 있어야 된다고 인정해. 국가와 국법에 따른 강제력에 대한 대안이 없어서 이를 필요악으로 인정하니까 하버지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야. 그래서 국가가 법으로 피해자가 맘대로 보복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도, 그리고 배상하지 못한 가해자의 자유을 일정 기간 빼앗아서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것도 잘하는 거라고 인정해. 더욱이 그러지 않도록 새사람으로 교도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대신하기 어려운 일을 국가가 하고 있다고 인정해.

하버지, 용서는 밖으로 가해자의 책임은 풀어주고 안으로 내 맘 속 있는 미움을 내려놓는 거랬잖아. 그런데 하버지의 방식은 책임은 지우되 책임과 상관없이 미움은 내려놓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는 하버지의 용서는 반쪽자리 용서네. 하버지 방식은 무조건 용서도 조건부용서도 아니야. 아무리 내게 큰 피해를 주었어도 해코지하여 되갚을 마음인 미움은 내려놓겠다는 거야. 그 나머지는 남들과 다를 것이 없어.

어떻게 내려놓는 거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약물이나 장치는 있을 수 없댔어. 그래서 앞에서 미움을 가볍게 하는 세 가지 보조적인 방법들을 제안했어. 가해자의 처지와 가해 동기를 알아보기, 냉정하게 미움의 손익계산을 해보기, 더 큰 미움을 내려놓은 사례로 위로받고 내려놓을 수 있는 확신을 가지기. 그리고 어떤 스님의 말씀대로 욕심을 버릴 때 불덩이를 쥐고 뜨겁다고 날뛰지 말고 ‘그냥’ 놓아버리 했듯이 미움도 ‘그냥’ 놓아버리라고 제안하고 싶어. 앞의 세 가지 방법들은 ‘그냥’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방법들이야. 하버지는 가해자의 원상회복이나 배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가해자의 뒤통수를 치기 좋은 기회가 와도 그러지 않을 거라면 원망과 미움이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도리어 나를 해치기만 하는 것들을 ‘그냥’ 버릴 거야.

하버지는 버린다고 맘먹으면 버려지니 성인이시네. 아니야 홍아야. 하버지는 아직 용서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했어. 그래서 하버지는 지금도 할머니와 말다툼한 뒤에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이 상해 있을 때가 많단다. 싸울 때는 잠깐이라도 할머니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고 있는 거지. 그러다가 그런다고 할머니와의 관계가 나아져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걸 알고 싹 쓸어내지. 그런데 그것도 잠시 또 싸우는데 할머니는 왜 고정관념에 갇혀서 그런 상황이 되면 꼭 그렇게만 반사하는지 그게 싫고 밉단다. 할머니는 하버지가 죽을 때까지 마음을 다스리도록 어려운 과제를 계속 제시하는 너무도 훌륭한 선생님이란다. 물론 할머니에게 하버지도 똑같은 역할을 하는지 모르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하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미움을 떨치도록 노력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어. 앞에서 하버지는 권력자나 부자가 욕심을 부려서 여러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했어. 구조 악이나 제도 악에 기대지 않고 누가 어떻게 권력자나 부자가 될 수 있겠니. 그리고 권력자나 부자가 구조 악이나 제도 악에 기대지 않고 그 부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겠니. 그러니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구조와 제도를 뜯어고쳐야지 사람이 미워서 해치면 안 되지.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워? 물론 악의 근원을 찾아서 이를 끊어내는 것은 어려워. 앞에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구조나 사회제도가 악한 경험을 반복하게 하여 악한 반사체계를 만들기 때문이라 했어. 그래서 악한 사람을 미워할 게 아니라 악한 구조나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댔어. 그러나 사람이 악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나 제도가 누가 만들어냈겠니. 바로 악한 반사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악한 그들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만든 게 아니니. 그래서 악행의 근원인 악한 사회구조와 제도를 미워해야 되고 그래서 악한 구조와 제도를 만든 악한 반사체계를 미워해야 된다면 그건 결국 사람을 미워하는 거잖니. 악한 반사체계가 그 사람의 인격이고 자아이므로 결국 그것을 지닌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본 휘퍼는 만악의 근원이 히틀러라고 보고 미친 기관사를 끌어내릴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그를 암살하려고 반 히틀러 지하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나도 히틀러가 하는 짓을 막기보다는 악의 근원이 그의 반사체계를 없애는 것이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악행을 멈추게 하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해결책이라는 본 휘퍼의 판단에 공감한단다. 이 사례는 하나의 악한 인격이 세계를 전쟁터로 만든 구조악의 근원이었음을 보여준단다. 그래서 악의 근원을 인간으로 보고 그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게 된단다.

하버지, 그래서 내게는 그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직도 너무 어려워. 홍아야, 하버지도 그 말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란다. 그래서 용서에 대하여 아직도 정리된 생각으로 일관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어. 다만 하버지는 인간의 반사체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금씩 끊임없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단다.

만약에 히틀러의 반사체계의 현실성인 현재의 자아나 인격을 유일한 그의 전부라고 믿고 그를 파괴해버린다면 그가 타고난 모든 가능성들마저 파괴해버리는 거지. 히틀러라도 다른 사회구조나 제도 속에서 다른 경험을 축적했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 그의 가능성 말이다. 인간의 가치를 현실성으로만 평가할 게 아니라 타고난 가능성에 더 큰 가치를 둔다면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알 것 같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의 현실성만 보고 그가 타고난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거니까.

아, 그런데 하버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제야 생각나네. 조건부용서에서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으니까 조건부용서에서 회개가 필수 조건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무엇을 회개한다는 거야? 아마 ‘회개의 열매’ 때문일 거야. 회개의 첫 번째 열매는 고의든 아니든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피해와 그에 따른 피해자의 분노나 원망이나 슬픔이나 미움을 공감하고 원상회복이나 배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거야. 자신이 그 피해를 당했다면 원망이나 미움으로 얼마나 괴로워할지를 입장을 바꾸어 공감한다면, 바로 그 공감된 괴로움을 덜기 위해서 원상회복이나 배상에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지. 그러고도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탕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회개의 두 번째 열매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거야. 회개로 용서받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했을 때 가중 처벌하는 이유는 벌을 받지 않으려고 회개한 것처럼 속였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앞서의 잘못까지 처벌을 받아야지. 이로 보아 용서받은 회개의 효력은 재범하지 않았을 때까지이고 만약에 재범했다면 그가 받은 용서를 스스로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야. 회개의 세 번째 열매는 용서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거야. 우리는 서로 용서를 더 많이 주고받기를 바라지. 그래서 용서가 더 많아지는 세상이 되길 바라. 네 번째 열매는 용서받은 가해자가 용서받은 은혜를 피해자에게 갚기 위해 피해자의 뜻대로 다른 사람에게 갚는 거야. 선행을 하면서 선한 인간이 되는 거야.

하버지 두 번째 말씀을 뒤집으면 가해자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자마자 용서의 의미와 가치가 저절로 사라진다는 말씀이네. 앞에서 회개의 여러 가지 조건을 알아봤지만 회개의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조건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피해자는 그걸 믿고 용서했어. 만약에 똑같은 잘못을 반복했다면 피해자가 용서했던 조건이고 근거였던 가해자의 회개가 빈껍데기였으므로 용서를 취소할 거고, 가해자는 받았던 용서를 재범으로 반납하는 거야. 용서의 조건을 어겼으니까 용서의 효력도 사라진 거지.

재범한 사람이 앞으로 똑같은 잘못을 얼마나 반복할지 모르지만 그럴수록 용서를 하기도 어렵고 받기도 어려워지겠지. 과거 한 번의 용서가 미래의 잘못까지 덮을 수는 없으니까 더욱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는 새로운 용서가 필요할 뿐이야. 그리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 가해자는 용서의 효과가 사라졌으니까 지난 번 잘못한 책임까지 두 배의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이지.

그렇다면 이런 회개의 열매를 확인하고 나서 용서해야 돼?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회개의 열매를 확인할 수 있을 때에는 이미 ‘용서’라는 의미나 가치가 사라진 뒤라서 용서를 해야할 이유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어졌을 거야. 피해자는 한 가지라도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믿고 용서하고 가해자는 회개의 열매로 용서의 의미와 가치를 채워나가야지. 선한 열매를 맺지는 못하더라도 똑같은 잘못으로 악한 열매를 맺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서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는 보존될 거야. 홍아야, 이제 네가 조금이라도 쉽게 용서할 수 있어서 네 맘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