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생애과정의 인류학 – 늠름한 사람들의 이야기

- 이은혜(덕성여자대학교)

강의실 책상을 둥글게 배열하고 20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진행된 수업은 마치 넓은 대나무 숲 같았다. 가족, 사랑, 교육에 대한 주제로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이것이 현재의 자신을 정의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친한 이들에게도 해본 적 없는 주제가 많았다. 사회의 담론이라기 보단 개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들이었고 그래서 보여주지 않은 ‘치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왕따, 가정의 불화, 등 이야기 소재만 들으면 이렇게 자극적일 수가 없다. 상처와 지금 남겨진 흉터들을 보여준다. 떨리는 목소리지만 ‘내가 이렇게 아파’의 투정은 아니다. 잘 여미고 또는 감추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조심스럽지만 담담히 보여준다. 그렇게 수업이라는 공간에서 서로에 대해 공감하기도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하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초반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대나무 숲에 대고 ‘임금님은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떠나면 그만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수업에 함께 하는 사람들은 수업 이외의 곳에서는 그리고 더 이상의 관계가 발전하지 않을 사람들이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하자는 맘이었다. 말하지 못하고 ‘나는 왜 이런 것을 가지고 있을까’하며 혼자만의 치부를 이야기 하며 마주보는 경험은 세상의 외톨이 같았던 기분에서 자유롭게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대나무 밭에 혼자 발가벗겨진 것은 아닐지 하는 걱정과 혼자 신나 떠들고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잠시였다. 동시에 ‘생애과정의 인류학’은 나의 경험과 의미를 고민하고 말 할수록 비슷한 결의 경험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는 상처를 가진 수업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그리워졌다. 서로 들어주고 듣는 과정에서 먹먹해진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당당히 살아가지만 다들 여리고 여린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잘 다독이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

이것은 모두가 열심히 할 수 있는 표현을 다하여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기에 가능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것을 듣고 반응해야 하는 상대에게도 ‘부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야기 하지 않기도 했는데 누군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격려하는 이, 무심한 듯 듣지만 곰곰이 생각하여 이야기해 주는 이와 같이 한 명 한 명 그 부담을 나누어 가며 수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위로의 말이나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나의 경우는 상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맘 편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면서 낯선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수업 초반에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빨리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경험이나 솔직함, 용감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인정투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담담하게 맞서 성장한 이들의 멋짐은 나의 인정투쟁을 다독거리는 듯 했고 수업 후반으로 갈수록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멋졌고 경험의 의미화 뿐 아니라 말하는 방식에도 자신이 묻어 있었기에 조금 더 경험에 대한 고민을 하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업의 사이사이 선생님의 경험과 위로와 격려는 수업 이외의 공간에서도 ‘관계 맺기’에 대해 새로운 방향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주셨다. ‘생애과정의 인류학’은 대학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수업이다. 그리고 조금은 과도한 의미화와 미화의 영역으로 이 수업을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앞서 말한 수업으로 의미화 하려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다른 공간에서 얼마나 누군가의 삶에 대한 말하기와 듣기가 이뤄지지 않는지에 대한 반증이며 이들의 상처는 한명의 삶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가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느끼면 느낀 만큼의 이야기를 하며 지난 한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 이렇게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잘 견디고 버텨준 대단한 사람들을 안아주고 은근슬쩍 안겨 다독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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