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강연 후기

- 남창훈(면역학자)

“내게 화학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담은, 무한한 형태의 구름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가 처음 화학의 문을 열고 그 안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던 시기, 대학을 들어가기 전 그가 마음에 품었던 바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 “이 구름은 번쩍이는 불꽃에 찢기는 검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내 미래를 에워쌓는데, 마치 시나이 산을 어둡게 둘러싼 구름과 비슷했다. 모세처럼 나도 구름 속에서 내 율법이, 나의 내부와 내 주변, 세계의 질서가 드러나 주기를 기다렸다.” 세상의 본질과 그 안에 담긴 질서를 바르게 알고자 하는 갈망이 16세 소년의 마음을 온통 휘 감고 있다.

2012년 12월 한 달 동안 7군데의 고등학교를 다니며 강연을 하였다. 모두 일반고였다. 혹은 강의를 선택하여 들어 온 학생들이었고 혹은 무작위로 한반 내지 두 반의 학생들이 모두 들어온 경우였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 많은 우려를 했던 게 사실이다. 경쟁 위주의 학교에서 한 점이라도 더 높게 받기 위해 많은 것들을, 아니 거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상상했다. 그들은 이제 무언가 더 이상 질문해야 할 이유를 상실한 아이들이라 상상했다. 그런데 강연을 거듭할수록 그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앎에 대한 열망, 불분명한 세상을 알고자 하는 순진한 열망, 이러한 열망은 살아 있는 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각 증세와도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은 많은 경우 아픔과 절망, 회의, 자기분열 등 온갖 종류의 갈등과 함께 마음에 자리 잡기 일쑤이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따르거나 그대로 복종해야 할 것들이 부지기수일 것이지만, 그러한 복종을 통해 체득하게 되는 질서와 규율들은 늘 우리 자신 내부의 질서, 그리고 세계의 질서와 갈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가는 과정, 즉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은 먼저 이러한 불일치와 갈등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절망이나 회의 등이 안개처럼 깔린 그들 고민의 등 뒤에서 나는 순진무구한 열망을 본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과 그 안에 담긴 질서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 크눌프의 방랑처럼 이 얼마나 쓸모없어 보이는 열망인가? 하지만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이는 그들에게 지극히 무해한 것들이다. 그리고 오로지 이러한 열망만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 속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 그 세계에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로부터 밝은 가능성을 본다. 나의 살아 있는 후배들이 그들의 삶에 대해 던지는 순진무구한 질문과 그것의 배후에 도도히 존재하는 앎에 대한 열망을 바라보며 경탄한다. 삶이란 이처럼 힘이 센 것이구나 싶기 때문이다. 마치 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그들의 삶이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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