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5-3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 찾기

셋째로, 하버지의 수행은 모든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아내서 그것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거야. 부정적인 사건이나 하찮은 물건에서라도, 특히 남들에게 악하거나 무능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서라도 그가 다른 사람에게는 선한 것과 다른 일은 잘하는 것을 찾아내자꾸나. 그래서 그것으로 그의 가치와 의미를 존중하고 그를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자꾸나.

하버지, 그게 쉬운 일은 아니네. 그러려면 사물이나 사람을 보는 관점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어야겠네. 그렇지. 먼 길을 걸어야 하는 뜨거운 사막에서 물이 반절 들어있는 병을 보고 ‘반절 밖에’ 없다는 관점과 태도를 ‘반절이나’ 들어있다고 보는 관점과 태도로 바꾸는 것처럼 바꾸자는 거야. 갈증 끝에 탈수현상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라면 대개는 병의 비어있는 부분이 더 크게 보일 거야. 그러나 어차피 죽게 될 상황이라면 그때에 죽을망정 물이 있는 만큼은 아직 목을 축일 수 있어. 목을 축일 수 있을 때까지는 시원하게 축여야지 죽음의 고통을 미리 앞당길 필요는 없잖니.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걷다보면 오아시스를 만날 수도 있어. 이것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이나 선입감을 버리고 긍정적인 관점과 태도로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아내서 그 사물이나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야.

우산 장수와 양산 장수 아들을 둔 엄마의 얘기도 그런 거 아닐까. 맞아. 오늘은 비가 오니 양산 장수 아들은 쉬어서 좋고 우산 장수 아들은 많이 팔아서 좋아. 내일은 비가 갤 테니 우산 장수 아들은 쉬어서 좋고 양산 장수 아들은 많이 팔아서 좋을 거야. 이전에 이 엄마에게는 부정적인 날씨만 계속되어 걱정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으니 얼마나 불행했었니. 그런데 이제 부정적인 날씨가 긍정적인 날씨로 보여서 언제나 좋은 날만 계속되니 얼마나 행복해졌니. 이 얘기도 관점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면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야.

그러니까 똑같은 사물이라도 보기 나름이라는 얘기네. 하버지 말씀은 긍정적으로 보자는 거지. 그래. 행복은 사물을 ‘보기’ 나름이고 ‘해석하기’ 나름이고 ‘의미나 가치를 찾기’나름이고 ‘받아들이기’ 나름이야.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물건에서 바늘만큼 작은 진선미라도 찾으면 침소봉대(針小棒大)하듯이 몽둥이만큼 부풀려서 보고 이를 귀중히 여기자는 거야. 특히 사람의 약점을 더 많이 찾고 더 크게 보던 태도를 바꾸어서 장점을 더 많이 찾고 더 크게 보자는 거야.

그런데 하버지 사물을 한 쪽으로만 과장해서 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잖아. 아, 우리와 이해관계가 아주 없는 사물은 있을 수 없지만 이해관계가 적게 느껴지는 사물이나 사람들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고 있어. 그런데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는 이해관계가 맞아서 예뻐 보이면 다행인데 늘 이해관계가 부딪혀서 미워지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많이 찾아내서 그를 헐뜯으려하지. 그래서 그의 단점이나 약점을 더 잘 찾아내고 이를 더 크게 보는데 익숙해질 수가 있어. 만약에 우리가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찾아내어 그의 장점이나 강점을 아주 크게 부풀려 보아야 겨우 그 사람을 진면목에 가깝게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의 관점과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뀐다면 바뀐 만큼 관계가 좋아져서 그만큼 둘 다 서로를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할 거야.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하려고 애쓰게 마련이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야. 홍아야, 하버지는 엄마 딸인 너도 엄마처럼 긍정적인 관점과 태도를 가진다면 엄마만큼 아니, 엄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단다.

하버지는 엄마가 행복하다는 것을 어찌 알아. 하버지는 네 엄마가 행복을 타고났을 거라고 믿고 있어. 엄마는 어려서부터 무엇에든지 ‘야, 참 맛있다, 멋지다, 이쁘다, 좋다, 착하다’고 감탄을 잘했단다. 아마 감탄하는 그 순간은 틀림없이 행복했을 거야. 엄마가 어려서부터 하버지에게 엄마 자신의 일로 불평을 하거나 짜증내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아. 남이 미워서 헐뜯는 엄마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야.

아마도 엄마의 머릿속에는 세라토닌이나 엔돌핀, 도파민 등 행복물질이 펑펑 쏟아지나봐. 수면 중에 행복물질이 많이 분비된다는데 네 엄마의 생활 습관에서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는 원인을 찾는다면 네 엄마가 잠을 충분히 잔다는 거야. 중학교 때까지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단다. 고등학교 때도 입시준비로 많은 다른 아이들은 잠이 부족해서 늘 피곤한 상태였으나 엄마는 잘 것 다 자므로 언제나 말짱했단다. 그래서 그랬는지 네가 어렸을 때 하버지가 억지로 재울 필요는 없다고 주장해도 충분히 재워야 잘 논다면 자기 경험대로 하는 건지는 몰라도 널 너무 충분하게 재우는 것 같더라.

엄마가 행복했던 이유가 잠잘 자는 거였어. 그거 쉽네. 그것만은 아니지.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 더 중요한 요인은 사물과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과 태도였어. 네 엄마는 좋게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다 좋게 보이나봐. 아마 기분 나쁜 부정적 경험보다 기분 좋은 긍정적 경험이 더 많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에 긍정적으로 반사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나봐. 하버지는 아마도 반사체계가 긍정적으로 만들어지도록 내장된 프로그램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어떤 환경적인 요인이 긍정적인 반사체계를 가지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하긴 가능성 없는 현실성이 없듯이 한 가지 요인만으로는 어떤 실재가 실현될 수 없으므로 양쪽을 다 갖추었을 거야.

홍아야, 너도 엄마처럼 행복해지고 싶지 않니. 하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엄마가 행복해 보이네. 나도 엄마를 닮아서 엄마처럼 행복해지고 싶어. 그러려면 엄마 가장 가까이에서 엄마를 스승으로 모시고 엄마가 어떻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며 어떻게 사물과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즐겁게 받아들이는지를 보고 본받아야 할 거야.

공자님은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그 중에 하나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셨어. 정말로 배울 마음이 간절하다면 덕행이나 학문이나 기술이 반드시 뛰어난 분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공자님 말씀대로 평범하지만 우리보다 나은 것이 한 가지라도 가진 분이라면 스승으로 삼고 배워야 한단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수행자라면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섬기며 배워야 한다고 하버지는 말하고 싶단다. 그러려면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이 지닌 아주 작은 덕행이나 지식이나 기술 등을 찾아내어 그 진선미를 아주 소중히 여기면서 본받는 태도 즉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

그런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관점과 태도로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단점이나 약점 밖에 안 보인다면 스승으로 삼을 수가 없잖아. 아니야. ‘나는 절대로 저러지는 말아야지’하고 다짐하여 그가 너에게 그의 단점이나 약점을 경계하도록 깨우쳤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 역시 너에게 스승의 역할을 이미 다한 거야. 다만 수행자로서 또는 제자로서 그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지는 그에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너의 능력에 달린 문제야.

타산지석이란 남의 산에 버려진 하찮은 돌이라도 그 돌을 가져다가 나의 옥(玉 = 인격)을 갈고닦는데 쓸 수도 있다는 말이란다. 그런데 원래의 뜻과는 달리 남들의 실수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많이 쓰여. 그렇더라도 그 뜻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그래서 꼭 가지고 있어야할 태도란다. 이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뜻을 지닌 반면교사라는 말은 단순히 실수나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명백한 반윤리적인 행위자에게 쓰지. ‘나는 절대로 저런 나쁜 짓은 않을 거야’하고 그의 잘못을 경계할 수 있다면 그 사람도 나의 스승일 수 있다는 뜻이란다.

덕행이나 지식이나 기술 등 아무리 작은 남의 장점이라도 이를 본받으려 할 뿐만 아니라, 남의 단점이나 실수, 실패, 등을 보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나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진정한 수행자랄 수 있겠네. 홍아야, 남의 단점이나 약점을 보고 네 단점이나 약점을 바로잡았다면 너도 진정한 수행자야. 이는 네가 남의 단점이나 약점에서 너에게 긍정적인, 너에게 유익한 가치와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야. 네가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 보이는 모든 사물에서 새로운 이치를 배울 수 있어. 이를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하지. 또 만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라도 너의 스승으로 삼아 거꾸로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를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잖니. 그럴 수 있을 때 진짜 행복한 수행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왜 부정적인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쉽게 찾아내지 못할까. 그건 우리가 부정적인 것이 더 잘 보이는 비뚤어진 반사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이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으로 사물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관점인 마음의 안경은 굴절이 아주 불규칙하고 또 심한 졸보기인데다가 색깔 또한 아주 칙칙하기 때문일 거야.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경험체계 또는 반사체계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주 속아 살아온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사기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도 있어. 요즘 유괴범이 많다 보니까 친절한 어른들을 조심하라며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것 같아서 참으로 서글퍼진단다. 그런데 이렇게 반사체계가 비뚤어져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어리석어지는 것은 자아를 보존하고 욕구를 실현하려는 자아 중심적인 태도 즉 이기적인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이야.

결국은 욕심 때문에 관점이나 시야를 넓혀서 보지 못하고 어리석어진다는 말씀이네. 자아를 보존하고 욕구를 실현하려는 마음을 왜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거지? 태조 이성계가 그의 참모인 무학대사에게 말했대. “오늘은 대사의 모습이 마치 돼지 같구려.” 그러자 무학대사는 “내 눈에는 당신이 부처같이 보인입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지요.”라고 대꾸했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일 리가 없지. 그런데도 무학대사는 이 말로 숨겨진 뜻을 말하고 있을 거야. 그 숨겨진 뜻이 뭘까. 사람들이 자신의 반사체계의 즉 인식체계의 테두리에 갇혀서 그것만을 자기 자신으로 믿고 그것만 의지하며 그것만으로 사물을 바라보므로 사물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된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게 아닐까.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불과한 인식체계로 렌즈를 만들어 쓴 안경은 굴절이 아주 불규칙하고 색깔이 아주 칙칙한데도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만을 자아라고 믿고 그 자아를 보존하려는 욕심 때문이야. 지금 자아가 근거하고 있는 그 인식체계만이 오로지 유일한 나 자신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 고집 그 집착 그 아집은 욕심이야. 현재의 자아를 벗어나지 않고는 고정관념이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고집이나 집착이나 아집은 욕심이 되는 거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 때문에 생명이 살아있지만 언제나 현실성을 초월해야만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 자기보존의 본능이 사물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자아가 확충되는 것을 가로막으니까 욕심이랄 수밖에.

그러나 하버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욕심 많고 더러운 짐승처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지만 부처님 같은 성인처럼 긍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잖아. 모든 사람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서로 존중하면 살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착각한 사람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다투는 일이 많으면 서로 미워하는 부정적인 경험들이 많아져서 비뚤어진 반사체계를 가질 수가 있어. 그러면 서로 헐뜯으려고 단점이나 약점을 더 많이 찾게 되지. 찾아낸 단점이나 약점을 더 크게 보면서 서로를 밉거나 하찮게 대하면 서로가 불행해지고. 그래서 네 말대로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야. 그러려면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들의 장점이나 강점 등 긍정적인 면을 훨씬 더 많이 찾아내어 그걸 존중할 수 있어야 균형에 맞게 사물과 사람을 볼 수가 있어. 그래야 비로소 그 사물과 사람의 진면목이 보이지 않을까.

그런데 긍정적인 면을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기 어려운 진짜 부정적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잖아. 사이코패스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일 거야. 그들의 행동은 남들과의 관계에서 공감보다는 힘의 논리를 따르지. 그들은 남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이 아주 강해서 사회적인 관계에서 힘의 흐름을 읽어내는 아주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있지. 권력지향적인 그들이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태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남의 괴로움을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야. 인간이 야생마를 길들여 올라타듯이 그들은 기회만 생기면 남이야 괴롭든 말든 남의 등에 올라타고 부리려 들지. 그들은 남들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확인해서 만족하려고 왕따의 가해자들처럼 약자를 괴롭힐 수가 있어.

그렇다면 그들에게서도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그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지 못하도록 힘을 모아 싸워서 사회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허점을 고쳐나가야 한다는 거야. 그들의 목적은 자신을 섬기도록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축적하는 데 있어. 그들은 사회구조나 제도적인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권력이나 부 즉 힘을 축적하고 또 이를 지키려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괴로움에 공감하기를 거부해왔기 때문에 그들은 공감능력을 거의 다 잃었어. 그래서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권력자와 부자들은 공감을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가깝지 않은 자가 드물어. 이러한 그들과의 싸움은 그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들이 판칠 수 없도록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모순을 고쳐 나가는 거야.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그들을 품어 안는 관대한 사랑으로 꺼져가는 공감의 불씨를 지펴야 한다는 거야. 그들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공감 능력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어린 시절에 보호자가 미워서 마음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감능력이 자라지 못했을 거야. 대개의 정신병은 어린 시절에 부족했던 사랑에 대한 갈증이나 미움을 드러내는 현상들일 거야, 그래서 꺼져가는 불씨에 가연성물질을 얹어서 불꽃을 살리내듯이 공감하기 어려운 그들에게도 끊임없는 사랑으로 공감의 불씨를 살려내는 방법밖에는 근본적인 치료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홍아야, 이론으로는 그렇다는 거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들이 힘보다는 공감에 따라 행동하도록 공감능력을 길러주는 데는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할지 하버지도 가늠할 수 없어.

우리를 위해 찾은 교훈 말고 그들 자신이 지닌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는 없을까. 그들에게 배울 만한 덕행은 없더라도 지식이나 기술은 아주 뛰어날 수도 있어. 비록 그들이 힘을 얻으려고 지식과 기술을 축적했더라도 그 힘을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격려해주고 필요하다면 우리도 그들에게 그것을 배울 수도 있어.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벌을 준다고 그들을 자극하지 말라는 거야. 미국에서는 총기사고로 끔찍한 사상자를 낸 사람이 사이코패스냐 아니냐로 논쟁하는 일이 많아. 그건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그런 사고를 저지기 때문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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