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연애의 목적

- sh

유림은 소년이다. 안정적이고 편한 직업 중 대표라고 말할 수 있는 교사를 하고 있지만, 대사에서도 나오듯이 그는 이 직업이 갖는 권태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이 권태로움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표현되는 학교라는 공간의 특이성은 탈영토화의 계수가 극히 낮은, 오로지 ‘선생다움’을 추동하는 욕망만이 허용되는 명사주의적 혹은 남근위계적 공간이다. 이러한 명사적 ‘선생다움’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선들이 그려질 시에는 ‘시선’이라는 권력이 그 탈주선들을 억압한다. 이때의 시선은 예외적일 일자로서의 심급 같은 것이 아니다. ‘선생다움’이라는 권력으로서의 욕망을 공유하고 있는 학교 내의 선생님들의 시선이고, 이 시선은 교사가 학생을 관리/통제하는 것만큼 교사를 통제한다. 이러한 시선에 의해 ‘선생다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유림은, 자신이 권태에 찌들어있다는 것을 상징하듯이 항상 술과 담배를 입에 물고 산다. 그런 그에게 최홍이 나타난다.
최홍을 대하는 유림의 태도에는 전형적인 감정의 오류affective fallacy가 나타난다.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가 의도 속에 표현의 기원이 있다고 믿으며 표현은 의도의 왜곡, 혹은 타락이라고 믿는 플라톤적 태도라면 반대로 감정의 오류는 표현에 개입하는 주관의 편사偏私가 너무 심한 경우이다. 유림은 ‘시선’을 많이 신경 쓰지 않는다. 아직 ‘학생’으로서의 교생인 최홍에게 그 시선은 막대한 것이지만, 이미 학교라는 안정적 질서에 안착한 유림이기에 최홍과 함께함으로써 겪을 시선의 정도는 그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어찌 보면 순수하게 주관의 편사만을 추구하는 유림은 자신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사랑은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라는 이유로 피해간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은 설렘, 아린 기분 같은 ‘마음으로서의 사랑’이다. 마음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지 않기에 최홍에 대한 처음 그의 행동은 애들이 엄마한테 철없이 보채는 것처럼 막무가내 식이다. 유림에게 처음의 최홍은 담배와 술 같이 그저 권태로움에서 잠깐 유예시켜줄 수 있는 그런 도구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때의 유림은 어떻게든 최홍의 ‘살’을 탐닉하기 위해, 최홍에 대한 배려도 하지 않고 최홍의 온 삶을 휘젓는다. 근데 바로 그런 유림의 행동이 최홍의 ‘마음’을 흔든다.
최홍은 이미 한 번 ‘학교’라는 남근위계적 질서로부터 박탈된 과거를 갖고 있다. 그 과거를 묻고 다시 ‘학교’라는 질서에 편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물론 최홍도 그 질서가 얼마나 권태로운지 더 나아가 그 질서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질서내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어떤 폭력을 가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최홍은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밖에 모르기에 혹은 그것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길이란 걸 믿고 있기에 그 길을 택한다. 물론 그 길을 최홍의 상처를 치유해주지도 못하고 더불어 최홍에게 사랑이 아닌 결혼을 택하도록 종용하는 길이다. 그래서 최홍에게 그 길은 능동적 기쁨의 정서보다는 수동적 슬픔의 정서를 더욱 많이 촉발시키는 길이고 그리하여 최홍은 점차 그 길에 대한 환멸을 느껴가는 중이었다. 근데 유림이 그런 최홍에게 잠시나마 그 질서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비록 철없는 애의 칭얼거림같은 방식을 통해 표현된 것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러한 유림의 행동은 분명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최홍은 안다. 그 즐거움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유림은 그 당위성을 잘 지키면서 서로의 위치가 위협받지 않는 선 안에서 ‘연애’를 즐기자고 한다. 최홍이 아파서 학교를 못 나올 때 최홍의 집 앞에 찾아가서 유림은 이렇게 말한다. “좋고 끌리는 사람끼리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쌓는 것이 연애에요.” 하지만 이미 그러한 연애를 통해 학교라는 공간에서 박탈당한 경험이 있는 최홍에게 연애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경험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홍은 기를 쓰고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려 하고 더불어 유림의 마음도 가라앉히려고 한다. 하지만 유림은 그런 아픔을 겪어 본적이 없기에, 아직 아픔을 통해 성숙해 본 경험이 없는 소년이기에 그는 처음에 감정의 오류를 넘어 자신 안에서 피어나는 ‘마음’을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발산한다. 처음에 유림은 ‘마음’을 부정하고 오로지 ‘살’만을 탐닉하려 했지만 마음이란 건 결국 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필연적으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기에, 근데 그런 마음이 유림에게는 너무 생소하기에, 유림은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발산하였다. 근데 그 과정에서 유림은 최홍과 ‘말’을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막무가내식 발산이 최홍의 상처를 표면으로 드러내었고 이를 통해 이들은 교사와 교생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평면 위에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최홍네 집에서 유림과 최홍은 서로 반말한다. 물론 영화에서 보이는 최초의 반말은 아니지만, 이때의 반말이 갖는 의의는 유림에게는 최홍이 더 이상 자신의 욕구 충족의 도구가 아니라 이해하고 염려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최홍에게는 상처로부터 기인한 자폐적 자기도피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학교 이외의 삶을 꿈꿀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이들은 ‘말’을 통해 서로의 ‘피부’를 교류할 수 있게 된다. 이전에 각자의 특성이었던 변태적 탐닉이나 자폐성에서 벗어나 서로의 피부를 극진히 공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결국 학교 내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관계는 들키게 되고 처음으로 이러한 거세의 위협에 노출된 유림은 결국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최홍에 대한 와전된 소문을 바로잡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이 관계를 부정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유림에게 최홍과의 관계는 탈주선이 아니었다. 그저 탈선에 불과했다. 유림은 이 질서로부터 박탈됨으로써 겪게 될 상처를 상상해본 적이 없고, 또 많이 두렵기에 최홍이 학교라는 남근위계적 질서로부터 파생된 시선이라는 권력에 의해 조롱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도 묵인한다. 하지만 최홍이 오히려 자신의 피지배적 위치를 역이용하여 유림을 학교로부터 거세시킨다. 왜였을까. 자신은 탈주까지 생각했지만, 유림은 겨우 탈선이었기에 그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그런 것이었을까. 아님 어차피 과거 학교에 있었던 일이 다 터졌으므로 교사생활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동반자폭을 시도한 것일까. 아무튼 최홍은 유림이 경찰서에 간 후 곧바로 학교를 박차고 나간다. 그 이후 교생으로서의 최홍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한 건 똑같은 방식의 거세를 또다시 당하게 될 위협을 받은 최홍이 그 방식의 거세를 유림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고 또한 최홍은 자발적으로 학교라는 질서로부터 탈주하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수잔 손택이었던가. 고통만큼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말했던 이가? 니체도 동감(empathy)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며 동감을 표방하는 이들의 배면에 깔려 있는 권력의지는 동정에 있다고 말했다. 즉 타인의 위치에 비해 자신의 위치가 더 안정감 있고 우월감이 있다는 것을 즐기는 것이 동감인 것이다. 그에 비해 공감共感 sympathy은 서로가 같은 평면위에 서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서로 공감하는 관계라는 말은 쉽게 통용될 수 없다. 같은 평면에 위치하고 있음은 그 평면에 위치하게 된 과정에 대한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쉽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림이 최홍의 상처를 건들면서 반말을 했을 때, 비록 반말을 통해 서로 평면위에 서게 되었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이해였고 반쪽짜리 평면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술집에서 유림이 최홍에게 적나라하게 욕을 했을 때, 그 욕을 듣고서도 유림을 이해하고 유림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최홍이 했을 때, 그것은 공감에서 발로한 말이었다. 최홍은 누구보다 유림이 겪었을 고통의 속성과 그 강밀도를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유림은 예전의 유림이 아니다. 유림은 고통을 통해서 공감을 배울 수 있었다. 마지막 호텔 앞의 흰 눈밭이 상징하듯이 이제 이 둘이 걸어가는 길은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새 길이다. 그 길이 어디로 이 둘을 인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둘은 이제 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시선과 위계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제 이 둘은 진정으로 평면 위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영토라고 해서 이 둘에게 순도 100%의 해방감과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원에서의 유림처럼 권태는 항상 이 둘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 어떤 배치이더라도 길들여지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 권태이기에 이들이 권태-일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전의 이들처럼 자폐성에 침잠하는 서로가 아니기에 이들이 밟고 있는 흰 눈밭처럼 그들의 이후의 삶을 밝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응답 2개

  1. 냥꾸말하길

    최홍은 유림과의 관계를 탈주로 보았고, 유림은 탈선 정도로 밖에 보지않았다고 말씀하신것 같은데. 이렇게 볼 수 있을지는 좀 의문이에요. 특히 최홍의 경우에는, 유림과의 관계를 탈주로 생각했을것 같진 않은데 ㅎㅎ 여튼, 여러 철학적 개념들과 영화의 스토리를 잘 엮은 성현 글, 재미있었어요. 선듯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들은 다시 스크롤을 올려 보게 만드네요 ㅎ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2. 들깨말하길

    이건 영화에 대한 글인가요? 재밌네요.

    학교선생님..하니 환희짱이 오버랩되기도 하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