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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만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분, 省齋 李始榮님.

- 김융희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아무리 유명인이었어도 별로 기억하지 않아도 될 분이 있고, 때로는 변변 찮는 사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분도 있다. 그런데 아주 유명했으며 결코 잊지 않아야 될 분이 그렇질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까운 생각이다. 평생을 독립 운동으로, 그리고 초대 부통령을 지내신 성재 이시영 선생의 업적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길이 기려야할 분인 것이다. 특히 요즘 문화재 반환 문제와 독도의 영토 문제등, 한 일간 중대 현안들의 대두로, 일본의 여러 행태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성재님을 더욱 떠올리게 된다.

삼일절을 맞아 마침 봄방학 중인 손녀들과 함께, 나는 파고다공원과 인사동, 종로 보신각등을 걸었다. 금년의 삼일절은 예전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인사동 입구, 파고다 공원 앞, 종로,등의 시내 곳곳에서 삼일절의 여러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도의 억지 주장에 대한 규탄 시위와 함께 일본 제품의 불매 운동, 나라 사랑과 태극기 그리기 같은 행사가 특히 많았고 호응이 뜨거웠다. 마치 동참이라도 하는 듯, 그동안 모처럼 포근했던 날씨가 갑자기 매서운 바람과 혹한으로 돌변했다.

손녀들은 손이 시려워 굽은 손을 호호 불면서 태극기 만들기 행사에 동참한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편치를 않았다. 100여 년 전인 1919년 3월의 종로거리를 상상해 봤다. 앞으로도 일본인들은 갖은 언동과 행태로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란 생각에 우리의 후손들에 대한 우려와 비통으로 가슴이 아프다. 나라 잃는 국민들의 일제의 만행의 설음을 바라보는 성재님의 심정도 이랬을 것이란 생각을 해봤다. 일제의 강압 아래서 박해를 당하느니 보담, 차라리 고생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게 낫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험난한 고행길을 50여 명의 많은 형제 가족들을 이끌며 동토의 낯선 이국으로 떠났던 성재의 모습도 생각했다. 몹쓸 이웃을 둔 우리들의 불행이다.

성재선생의 저서인 감시만어(感時漫語)를 보면, “자칭 문명한 신지식인으로 세계의 대사에 통효(通曉)한 외교인들이 강국의 위세 앞에서는 습복(慴伏)을 하거나 꼬리를 치고 불쌍히 여겨줄 것을 애걸하면서도 자국인 앞에서는 교만을 부리는 자들을, 대원군 당시의 일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 대원군의 외교정책을 쇄국이 아닌 애국의 충정으로 인식한 역사관인 듯 싶다. 변할 줄 모르는 일본의 망발이 괴씸하다. “이스라엘의 이웃 중동 국가들에 대한 강경 일변도 정책”을 떠올리고 싶은 충동이다.

요즘 우리 문화재의 엉뚱한 반입의 해프닝을 보면서도, 나는 성재님의 말을 떠올려 본다. “보잘 것 없는 문화재를 가진 일본은 늘 열등감으로, 틈만 나면 한국 문화재를 도적질아니면 도굴해 갔다. 이래서 한국의 박물관은 열악하게 됐다”며 일본인들의 우리 우수 문화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강조하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했다. “이런 창의력을 갖춘 능력있는 우리가 지금은 비록 그들에게 나라를 잃고 고난을 받고 있지만, 우리의 훌륭한 문화정신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일본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국의 독립을 확신했던 것이다.

일본으로 인한 시국의 혼란을 보면서 평생을 그들과 싸우며 일생을 보내신 성재 이시영 부통령. 그를 우리 국민은 높이 우러러 길이 모셔야할 너무도 위대한 선각자이시다. 지난 년말에 나는 그분의 친후속을 만났었다. 그 내용을 ‘위클리 수유너머’ 145호의 여강 만필에 “효성이 갸륵한 손녀의 이야기”로 소개했다. 아내의 인연으로 처음 찾아가 만났던 과정과 사실을 썼었다. 그 때 만감이 교차한 나의 착잡했던 마음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아내와 자식들이 배곺아 울고 겨울이면 추위를 못견뎌 손을 입으로 녹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대부는 항상 태연하고 편한 것처럼 행세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정도를 지켜야하는 명분 사회에서 정도를 걷는 참모습”은 이렇게도 참담했음을 나는 현실로 보면서 느꼈던 것이다.

성재 이시영 부통령은, 선조때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다. 그는 명문의 가문에서 자라며 17세에 벌써 문과에 급제했고, 계속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장차 국왕이 될 인물을 가르치기도 했다. 왕자와 함께 동궁 생활하면서 학문적 능력은 물론 인격도 남달랐다. 40대 이전에 벌써 중추원 칙임의관,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 판사등을 지냈고, 외교국장으로 있을 때에는 외부대신이었던 박재순과의 을사조약에 대한 갈등은 유명하다. 박재순의 딸이요 집안의 조카며누리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집안이라며, 파혼을 시켰고 자신도 사표를 냈던 것이다.

“이 조약은 우리 국가의 주권을 없에는 것이다. 망국 멸족의 장본으로, 이로 인해 장차 나라가 큰 화를 당할 것이다. 외부 대신은 이 조약을 역사적으로 반대하여 국가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약 일시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국가의 장래를 그르친다면, 이는 만세의 역적이 될 것이다” 당시 을사조약을 받아들이는 외부대신에게 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상관에게 면전에서 직설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70이 훨씬 넘는 노령에 제헌 국회에서 만장 일치로 추대 받는 부통령이었다. 대통령에게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그로 인한 갈등은 결국 자리에 연연치 않고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는 일생 불의와의 타협을 모른다. 항상 부정으로 치부하거나 치사한 벼슬을 일삼는 소인배, 간신배들을 저주했다. 국가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투철한 정신과 사명감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독립 운동에 바치며, 가족은 물론 형제간들의 가족까지 모두 한뜻으로 뭉쳐, 독립 운동의 근거지인 이국 만리로 옮겨 살면서 험한 삶의 실천적 행동은 전무 후무한 일이었다. 그의 집안의 지원이 없는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이나 임시 정부의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말이 공공연했다고 한다.

국가를 위한 일생의 일관된 모범을 우리는 길이 기억해야 한다. 잘못된 재산 몰수로 화제가 되고 있는, 매국으로 챙긴 재산으로 지금도 호의 호식하며 지내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다. 집안의 전 재산과 일생을 나라와 독립 운동에 바친 선각자의 후손이 초라한 쪽방에서 살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느꼈던 심사가 계속 맘속에 맴돌고 있다. 손녀들과 함께 삼일절의 행사를 참여하면서도 그들에게 나는 이시영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고, 우이동의 선각자 집안을 안내하고 싶은 마음도 꾹 참았다. 이런 내 마음이 슬프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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