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5호] 저자와 독자, 출판사는 만나야 한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저자와 독자, 출판사는 만나야 한다

한 독자가 제보를 했다. 그린비 <개념어 총서> 다섯 권 모두가 ‘다음’의 한 카페에 PDF파일로 통째로 올라와 있다고. 카페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기가 막혔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내려받기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이름하여 디지털 시대정신, 유비쿼터스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30대 초반의 영어학원 강사였다. 출판사에서 보자니까, 저작권 침해의 처벌 조항에 대해 나름 철저히 조사해 보고 온 듯하다. 말하는 품새가 100만원 벌금 내면 그만 아니냐는 투다. 이 친구의 관심사는 오로지 출판사가 손해배상으로 얼마를 요구할지에만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처벌하고 싶은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돈을 요구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 친구로선 그게 오히려 의아한 것 같았다. 내가 물었다.

“살면서 남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1년 365일 매끼 밥먹으면서 단 한번이라도 농부의 수고로움에 대해, 벼를 키운 대지와 햇빛과 바람과 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책 보면서 그 책을 쓰기 위해 저자가 지난 시간 어떻게 공부했는지, 그 책을 만들기 위해 편집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하나의 글자와 싸움을 벌였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저 세상 모든 것은 돈만 주면 언제든 살 수 있는 것이고, 문제는 다만 당신에게 그걸 살 돈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뿐이죠?”

디지털 환경에서 저작권 침해가 빈번해진 것은 독자가 갑자기 부도덕해져서가 아니다. 아톰 경제에서 비트 경제로 이행한 생산조건의 변화 탓이 크다. 디지털 환경에서 지식은 정보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책은 디지털 환경에서 인덱싱되어 데이터베이스로 다시 태어나고, 이용자는 검색을 통해 이 데이터베이스에 자유로이 접근하고 이용하는 방식으로 미디어 소비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식을 사유의 결정체가 아니라 정보검색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서 공짜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심리 또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게다가 아톰 경제와 비트 경제는 생산 비용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 비용에는 눈에 쉽게 보이는 비용이 있고, 쉽게 보이지 않는 비용이 있다. 아톰 경제나 비트 경제나 저작자와 편집자의 수고 비용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아톰 경제에서 누구의 눈에나 확연히 보이던 비용, 즉 종이값, 인쇄비, 제본비, 물류배송비 등은 비트 경제에서 거의 들지 않는다. 이들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울 만큼 내려가면서 가격 또한 이전과는 달리 경향적으로 ‘제로’에 가까워지려는 속성을 띠게 된다. 해적질(응?)의 배경에는 이런 생산조건의 변화가 깔려 있는 것이다.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풍부한 것과 희소한 것에 대한 인식의 역전이 발생했다. 비트 시대인 지금, 사용자 인식은 더 이상 지식 콘텐츠를 희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출판사들은 여전히 책을 희소한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정말로 희소한 건 독자와 함께 지식의 세계를 구성해 가는 출판사들의 능동성과 활동성이다. 사고의 관성 탓에 출판사들은 풍부한 것을 희소하게, 희소한 것을 풍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전도된 가치 인식 속에서 책의 가치를 고평가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비싼 가격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이 해적질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너무 멀리 나간 걸까.

변화된 환경에서 출판사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생존에 대한 위협은 해적질에 대한 비난과 분노로, 그리고 콘텐츠 불법 유통 차단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이는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출판사들이 자기의 역량과 에너지를 해적질 근절에만 집중해선 독자도 출판사도 죽을 수밖에 없다. 책을 만들어 파는 건 이미 쇠퇴기에 들어선 낡은 비즈니스 모델이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의 이익과 출판시장의 이익을 동일시해선 안 된다.

자기가 가진 역량을 불법음원 유통 차단에 낭비한 음반회사들을 생각해 보라. 아이팟은 음악시장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이팟의 등장으로 음반 수입에 기반한 기존의 음반회사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지만, 듣고 싶은 음악을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아이팟의 능력 덕에 사람들은 예전보다 음악을 훨씬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음반회사는 타격을 받았어도, 음악시장은 커진 것이다. 음반회사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출판사들은 비트 경제에서 새로운 생존의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를 바꾸는 책, 세상을 바꾸는 책”, 우리가 펴낸 책이 삶을 바꿔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내건 그린비출판사의 슬로건이다. 아톰 시대건 비트 시대건 이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비트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신이 든다. 출판은 저자-출판사-독자로 이루어진 생태계다. 생태계가 살아 있으려면 순환이 필요하다. 이 생태계에서 지금까지 독자는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독자 역시 책은 볼 수 있었지만 출판사와 저자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 우리는 저자, 독자, 출판사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나가려 한다. 디지털의 소셜 네트워크는 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직접 만남으로써 책이라는 상품 속에 가리워진 관계를 드러내고 싶다.

비트 경제에서 출판 생태계를 살리는 길은 하나다. 우리가 책에만 갇혀 있을 때, 책을 오로지 이윤의 원천으로만 생각할 때, 지식생태계는 순환하지 못하고 썩게 된다. 이제 출판은 책의 제작과 판매에서 벗어나 지식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의, 세미나, 토론회, 전시회 등 지식을 총체적으로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긍정적인 측면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들 것인가. 다시 문제는 여기에 답하는 출판인의 상상력이고, 기획력이다.

– 유재건(그린비 출판사)

응답 4개

  1. 도토리말하길

    출판사의 이익과 출판시장의 이익을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 감동적이네요..좋은 글 잘 보고 퍼갑니다ㅎ

  2. 동건이형말하길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가려진 일상의 영역을 재구성하는 것. 멋진 말씀도 잘 담아갑니다.

  3. 그리고 맑음말하길

    “직접 만남으로써 책이라는 상품 속에 가리워진 관계를 드러내고 싶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더욱 그렀습니다.
    전에 운좋게 그린비에서 진행하는 저자 특강 들으러 간적 있었는데 참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던 책도 두어권 사가지고 왔지요. 대표님 말씀처럼 출판사가 단순히 책을 만들어 파는 곳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가려졌던 관계를 재발견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데 용기가 납니다. 그 만남은 그저 신념이 아닌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4. 쿠카라차말하길

    좋은 책 만드시는 분인줄만 알았는에, 글도 참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자, 출판사, 독자의 관계를 생태계로 규정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그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해 항상 공부하고 애쓰시는 그린비 출판사 직원들 만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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