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

이야기작업, 또는 협력적 교직작업

- 이영남(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눈에 보이는 신체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누군가 잡았고, 그래서 이 사회의 어딘가에서 장애-비장애 교직작업이 일어났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지만, 최근 몇 년 간의 장애인 이야기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과의 이야기 작업에 참여해본 사람은 이야기 작업이 협력적 교직작업이라는 점을 금새 깨닫는다. 최근 한 권의 ‘이야기책’이 이 사업의 결과물로 나왔다. 시중에서 팔리는 출판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나, 자립했다>>(2013)는 우리 시대 장애-비장애 교직작업을 보여주는 좋은 이야기책이다. 이 책은 지난 3년 동안 세 장애인권단체가 협력해서 추진한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주거복지사업>을 증언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16명의 장애인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인터뷰한 사람들의 <인터뷰 후기>가 실려 있다. 이 후기를 유심히 읽어보면 이야기작업이란 곧 협력적 교직작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몇 차례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적는데 어려움을 느꼈다.”(효정,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삶 속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할 뻔 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손에 이끌려 시설에 갇힌 16년.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도 바다는 건널 수 없고 물고기는 육지를 건널 수 없으니 차라리 훌쩍 날아갈 수 있는 작은 새가 되고 싶은 그의 말.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어떤 이에게는 삶의 전부였다.”(최성규)

“사람은 관계를 통해 삶을 성찰할 때 깊은 영향을 받는다. 나는 인터뷰 때문에 그녀를 알게 되었고, 짧게 관계했으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선택해서 책임지면 되는게 여성의 삶이라고 생각했었따. 그러나 그녀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장벽과 갈등 속에서 후회보다는 온전히 그 상황을 받아들였고 밑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최영선, 한국주민운동 정보교육원 상임트레이너)

몇 편의 후기를 책에서 인용해보았다. 후기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이야기작업이란 두 개의 삶이, 또는 여러 개의 삶이 교직되지 않으면 탄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감정이 섞이고, 생각이 엮이고, 도덕과 가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자신을 가두었던 것들이 풀려나와 서로 뜨개질이 되기 때문이다.

1995년에 미국에서 나온 <아메리칸 퀼트>라는 영화도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퀼트작업은 물리적으로만 본다면 다양한 종류의 실이 서로 뜨개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단순히 실만 뜨개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야기가 교직되는 것이라는 것을. 영화에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동네할머니들이 교직한 퀼트를 젊은 여성이 입고 희망을 찾아 길을 나서는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세대를 이어주는 이야기, 흑백갈등과 양성갈등을 교직하는 이야기가 교직된 옷을 입고 미국사회가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로 돌아온다면 사회 안에 산재한 갈등이 어디 한 둘일까 싶다. 장애갈등도 그 중의 하나일텐데, 장애이야기를 교직해서 만들어진 ‘장애옷’도 우리가 품어야 할 희망이라 생각한다. 그냥 좋으니까 희망이고 그래서 품어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 아픔을 교직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희망은 아픔을 품은 희망이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심층적인 장애가 가해진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아픔에 대한 침묵을 강요당한다는 점이다. “그는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왔던 감정들을 채 썰기 어려워했다. 시설 안에서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눴던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던 그였다. 응어리진 마음을 뱉어내기도 어려웠구나.”(효정,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사람은 그야말로 감정덩어리이다. 이것이 너무 굳게 뭉쳐져있으면 펼치기 어렵다. 서로가 나누는 이야기 형식은 감정을 풀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식이다. 이야기 상대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한다면 침묵을 강요당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독방에서 고립된 채 지내는 것이라 한다. 우리가 만약 각자 독방에서 격리된 채 살아간다면 감정을 썰어내는 것이 매우 힘들어진다.

보다 심각한 것은 강요된 침묵이 사회시스템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누군가의 강요와 제도화된 시스템에서 매번 묵살당하는 느낌으로 살아왔다면, 지금 현재의 그 선택권에 대한 욕구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녀를 만나면 늘 여유없이 꽉 차 있는 긴장감을 느끼는 이유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만약 사회 구성원 중에서 누군가가 침묵을 강요당한다면 그만큼의 이야기는 누가 차지할까? 그것은 당연히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마치 만인투쟁처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구성원이 공모하는 이런 침묵의 카르텔이 지금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아닐까?

이야기작업 또는 협력적 교직작업은 침묵의 감정을 같이 썰어내는 작업이며,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내는 작업은 아닐까? 장애-비장애 교직작업이 갖는 함의를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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