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얼거나, 혹은 터지거나 – 온수 쪽으로.

- 지오

새해 첫 날을 천안에 있는 엄마 집에서 보낸 나는 밤늦게야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석 달째 이사문제로 속을 썩이는 집이었다. 집 계약은 만료된 지 오래인데 새 집 주인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만 내려오라는 눈치를 시시때때로 보냈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고작 1년, 아직은 서울에서의 독립생활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워낙 집이 추워서 겨울 전에 이사를 가려던 것이지만 주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살면 그 뿐이었다. 그래봤자 작년과 같은 추위일 터, 좀 더 독해지면 되는 것이다. 낡은 문을 열고 보일러의 온도를 높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통의 한기와는 다른 어떤 전류가 느껴지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하며 싱크대의 수도를 틀어봤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를 확인했다. 재가동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싱크대 수도가 얼었다면 화장실은 보나마나였다. 혹시나 싶어 틀어봤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고 변기도 꽝꽝 얼어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섰는데 오래전부터 참아왔던 듯 극심한 요(尿)기가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다 변기 위에 앉았다. 내일이면 이 오줌도 얼어 변기 속은 누렇게 변해 버릴 것이다. 수도업자가 이것도 보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길바닥에 오줌을 지린 듯 상스런 기분이 들었다. 얼른 변기 뚜껑을 닫아버렸다. 물이 나오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깨어있으면 또 오줌이 마려울까봐 침대로 뛰어들어 곧장 이불을 뒤집어썼다.

수도업자는 두 발을 가만 두지 못했다. 한 발을 다른 발등에 올려놓는 식으로 두 발을 비벼대는 속도가 그의 손놀림보다도 빨랐다. 손님용 실내화 하나 준비해두지 못한 것이 괜히 미안했다.

“발 시려 우시면 그냥 신발 신으세요.”

내 말에 혀를 반쯤 내밀고 스패너를 돌리던 사십 대 중반의 남자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서른을 갓 넘긴 듯한 젊은 남자가 네모난 기계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젊은 남자 또한 발을 가만 못 뒀다. 어찌나 꼼지락대는지 노인들이나 신을 법한 BYC 고동색 양말이 뒤로 점점 돌아갔다.

“아휴, 여기서 어떻게 지냈대”

“그래서 이사 가려고요”

들어온 지 10분도 안 돼 젊은 남자가 무심결에 뱉은 말에 나도 모르게 답을 하고선 곧장 후회했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덜 부끄러웠을텐데. 그의 양말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추워, 추워를 남발하는 두 남자 때문에 지난밤을 이 집에서 보낸 내가 마치 철녀처럼 느껴졌다. 누구는 극한의 체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하건만 건장한 두 남자 앞에 철녀로 선 나는 몹시 창피하기만 했다. 나보다 체격도 좋은 인간들이 굳이 티를 내는 게 조금 얄밉기도 했다. 두 남자는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둘 수가 있느냐며 잔소리를 한 바탕 쏟고선 뭐가 안 된다는 둥 무슨 연장이 더 있어야 한다는 둥 여기 재질은 뭐가 다르다는 둥 언제 내려갔다 오냐는 둥 저들끼리 또 한바탕 씩씩댔다.

한참을 부스럭거렸음에도 화장실은 손도 대지 못하고 싱크대 수도를 녹이는 것에서 작업은 일단락됐다. 중년 남자는 보일러도 당장 고치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기계 안쪽에 젖은 부분을 다 말려야만 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는 이상 수도는 다시 동파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외출할 때는 물을 조금씩 틀어놓고 다니라고 당부했다. 남자들을 보내고 전기히터를 가져와 보일러 앞에 앉았다. 조그마한 전기히터의 주황색 불이 보일러를 향했다. 보일러야 말라라, 보일러야 말라라, 담벼락을 넘는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몸을 웅크렸다. 먼 옛날 성냥을 팔다 죽어간 한 소녀가 생각났다. 나는 그만 전기히터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다음 날, 보일러 수리 기사로부터 보일러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봄까지 기다렸다가 보일러를 아예 교체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이 집에서 겨울을 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막막했다. 이대로 천안에 내려가면 아주 눌러 앉게 될 것만 같아 불안했다. 설사 내려가더라도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대로는 패배감에 휩싸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보이는 모든 이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고 다녔다. 스스로가 경박스러워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풀렸다. 연구실의 한 동료가 겨울동안 자기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며 제안해 왔다. 내심 기대했던 말이어서 일까. 동료의 제안이 기뻤으면서도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 능구렁이만 같아 창피하기도 했다. 가난은 불편해서 초라한 것이 아니라 뻔뻔해져야 해서 서글픈 것이었다. 기분이야 어찌됐든 그 날 밤부터 당장 동료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친구와 통화를 하며 경사로를 올랐다. 숨이 가빠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잠시 전화를 끊을까 하다 그냥 이었다. 진로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회사를 벗어나도 죽지 않는다고 답하며 문을 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순간 나는 내가 시베리아 한복판에 서 있는 줄 알았다. 부엌 바닥 전체에 3센티미터 두께의 거대한 빙판이 깔려 있었다. 배관이 얼어 막히면서 약하게 틀어놓았던 물이 싱크대를 넘쳐 부엌 바닥에까지 흘러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었다. 바닥뿐만 아니라 싱크대 위도 식기통을 덮을 만큼의 두께로 얼음이 얼어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었다. 상사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친구에게 내가 보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물을 끄면 수도가 동파되고 물을 틀면 빙판이 생기니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마구 말을 쏟았다. 각자 신세한탄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었다. 친구는 괜히 혼자 빙판 깨다 서러워지지 말고 내일 낮에 누구라도 데려가 같이 하라며 충고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얼음덩어리들을 바라봤다. 생전 처음 겪는 듯한 적막감에 몸이 떨렸다. 방금 전화를 끊었는데 누군가에게라도 또 말을 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친구 말이 맞았다. 빙판이 아니라 적막이 문제였다. 서둘러 옷가지를 챙겼다.

동료의 집으로 가는 길에 휴대폰으로 내일 날씨를 검색했다. 추우면 계량기마저 터져 버릴까 걱정되고 따뜻하면 얼었던 수도가 터져 물이 넘칠까 걱정됐다. 예정대로라면 진즉에 떠났을 집에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하는지 답답했다. 다들 이렇게 사나, 한숨짓다 고개를 떨궜다.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서울에 있으려는지 단 하나의 이유도 찾아지지 않아서 야속하고 울적했다. 쇼핑백에 담긴 옷가지가 궁상맞고 처량해서 화가 치밀었다. 주택가 골목길 가로등 빛 멀리 동료가 보였다. 화가 나는 한편 고맙고 또 그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꿈은 아니었다. 악몽이라기엔 내게로 다가오는 그녀가 너무 따뜻했고 현실이라기엔 쇼핑백을 든 양 손이 너무 창피했다. 어쩔 줄 몰라 나는 웃었다.

동료는 고양이를 세 마리 키우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고양이들이 낯선 자의 방문에 놀랐던지 재빨리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대강의 짐정리를 끝내고 불을 껐다. 천장에는 본래의 색을 잃은 야광별이 제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만 간신히 빛나고 있었다. 숨어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몸을 웅크렸다. 깜깜한 밤, ‘야광’을 잃은 별 아래 다른 생명과 체온을 맞댄 그 순간 희한하게도 험상궂었던 마음이 차츰 누그러졌다. 휴머니즘은 대단히 물리적인 것이다.

동료의 집에서 하루 이틀 지내면서 나는 차츰 여유를 찾아갔다. 밤이면 내게로 와 웅크리는 고양이의 포근한 체온과 지낼 곳이 마련되었다는 안도감, 그리고 사람들과의 수다 덕분이었다. 유난스러운 겨울을 보내는 이가 나만은 아니었다. 누구는 보일러가 터져 물을 뒤집어썼고, 누구는 집이 추워서 텐트를 쳐놓고 살았다 했다. 변기에 엉덩이가 붙었다는 이도 있었고 겨우내 지하철역 화장실을 이용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철녀가 아니었음이 밝혀졌고 빙판은 무용담이 되었다. 2월 내내 누구와는 밥을 먹으면서, 누구와는 커피를 마시면서 혹은 작업을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혹독한 겨울 생존기를 시끌벅적 떠들었다. 그런 수다에는 항상 웃음이 섞였고 그래서인지 제법 따뜻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어느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한 달 전 수도업자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겨울에는 수도를 온수 쪽에 맞춰서 조금씩 흐르도록 틀어놔야 보일러도 수도도 얼지 않아요.”

그 날 밤, 허벅지 안쪽의 포근한 기운을 느끼며 나는 이 말을 몇 번이나 되뇌다 잠이 들었다. 온수 쪽으로, 온수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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