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어제 밤의 일

- 벌꿀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어제 밤의 일이랍니다. 나는 방 안 이불 속에 누워 설핏 잠이 든 상태였습니다. 어디선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창문 밖 겨울바람이 건네는 말처럼 그 무언가가 심술궂은 소리를 냅디다. 이 정체모를 소리는 다섯 자매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집 앞 댓돌에서 신발 다섯 켤레를 몰래 훔쳐다가 마침 지나가던 다섯 형제 커다란 열개의 발에 억지로 구겨 신겨 넣고도 모자라 물구나무를 시킬 심사로 한 여름 쏟아져 내리는 폭포 밑에서 난동을 부리는 소리와 진배없었습니다. 소리의 근접함으로 보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지만 나는 팔자 좋게 게으름을 피우며 꼼짝도 않고
“이게 뭐야. 어느 집에서 이 오밤중에 난리가 난건가”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답니다. 사실 입 밖으로 조그맣게나마 소리를 내본 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굉음은 그치질 않았습니다. 나는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방문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씨구. 소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집 안에서 나는 게 아니겠어요?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어가 문을 확 열어 제꼈습니다. 그곳은 현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좁고 어두운 보일러 실 이였습니다. 처음엔 천장이 무너진 줄 알았지요. 이 정체모를 물 폭탄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거든요. 난 아연질색한 채로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답니다. 한참 동안 쏟아지는 물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피할 생각을 못했는데 그건 `집이 무너지고 있다’ 는 생각에 오금이 절로 저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몸 위로 떨어진 물에선 곰삭은 시멘트 냄새가 피어올랐습니다. 물보다 냄새를 우선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답니다. 천성보다 더 피하기 어려운건 몸에 배인 냄새니까요. 이곳으로 이사 온 첫 날, 별 생각 없이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가 시멘트 벽에 새까맣게 붙어있는 귀뚜라미 수 십 여 마리를 목격하고 기함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일러 실 안에 발을 디디자 귀뚜라미들은 일제히 흥분하며 펄쩍펄쩍하는 뜀뛰기로 나를 환영해 주었었지요. 나는 귀뚜라미가 달갑지 않았습니다. 아니 난 공포스러웠어요. 그런데 이런 일까지 생기다니요. 이 자리에서 맹세하건대 난 앞으로 절대 보일러실을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보일러야 너에겐 내가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석유를 넣어주지 않겠다’ 결심 했습니다만 여튼 이 상황은 해결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보일러실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보일러 관에서 분수처럼 역류하고 있는 물을 헤치고 팔을 뻗어 주홍색 밸브를 돌려 보았습니다. 물은 주춤 거리다 금새 멈췄습니다. 허무했어요. 방금 전까지의 소동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보일러 관이 맹추위에 얼어 터진 걸게다 라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는 보일러실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벽을 가로지르는 보일러 관 아래로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고드름이 눈에 띄었어요.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낮에는 햇님이 문안하시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 오시네.

고드름 고드름 녹지 말아요.
각시님 방안에 바람 들면은
손시려 발시려 감기 드실라

투명하고 뾰족한 고드름을 보고 있자니 귀뚜라미들을 죽인 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달여 전 귀뚜라미 떼가 보일러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건 내가 귀뚜라미 떼에 겁을 먹은 걸 눈치 채고 그 겁에 겁을 먹어 귀뚜라미들이 단체로 도망갔다거나 약국에서 산 `바이오 킬러’가 기막힌 효능을 발휘했다거나가 아니라.

상황은 끝났습니다. 보일러실에서 넘쳐 흘러내린 물은 부엌에서 현관까지 흥건했습니다.
이제껏 돈을 핑계로 석유 넣기를 꺼렸던 나에게 스스로 벌이라도 받듯 결국 나는 이 집의 난방을 맛 볼 기회란 영영 주어지지 않겠지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겁을 먹어 벌벌 떨었기 때문에 난관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고 흠뻑 젖은 옷은 갈아입지도 않고 시멘트 냄새를 가득 품은채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곯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차가운 물 냄새를 맡으며 일어났습니다. 가끔 끝없이 순한 존재를 보면 마구 간지럼을 태워 표정을 망쳐놓고 싶기도 한데 이 집은 존재 자체에 너무 많은 구멍과 상처가 있어 내가 그리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집에 살면서부터는 내가 좀 순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집이 나한테 그렇게 하니까. 내가 남들에게 알게 모르게 했던 짓들. 웃다 지쳐 엉엉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간지럼을 태운다거나 하는 그런 못된 짓들 말입니다.
아무튼 적어도. 오늘만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처럼, 붉은 여름 수박처럼 웃으며,
`VIVA LA VIDA’ (인생 만세!)를 되새겨 봅니다. (2009.1.5)

덧>

약 4년 전 부모님의 집에서 독립을 했다. 빈털털이 상태로 홀로 맞은 성북동의 첫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홑겹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종이를 한장 두장 붙이기 시작했다. 덧붙인 종이 조각이 가끔은 커튼처럼 펄럭였다. 몸을 덥힐 수 있을 때라곤 가스레인지 앞에 있을 때가 고작 이여서 나는 단지 불 앞에 서 있기 위해 하루 다섯 끼를 꼬박 차려 먹었다. 먹어도 자꾸만 배가 고팠다. 친구에게서 겨울 산행 중 조난당하면 얼어 죽기 직전 환각 상태에 빠진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춥고 아름다웠다. (20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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