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베리만에 대한 소개-삶이 깎은 문제의식

- 지안

잉마르 베리만이 죽었을 때 우디 앨런은 ‘심오한 질문을 던진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즈에 기고한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이안 감독은 “나는 베리만으로부터 스타일보다는 심오한 질문을 제기하는 정신과 두려운 존재에 대한 도전, 내면의 성찰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검색엔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철학자’ ‘실존주의 영화 거장’이라는 수식어는 우리에게 베리만과 베리만 영화의 문제의식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마디로 베리만은, 영화가 예술이 아니던 시대에 영화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감독이라고 평가된다. 과연 당시의 평론가들이 예술의 어떤 속성을 두고 ‘예술’이라고 정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은 분명하다. 확장의 도구는 철학에 가까운 문제의식들이었고 ‘신과 인간 내면, 소통’에 관한 주제들이었다. 그런 주제들은 베리만만의 가장 큰 특징이지만 동시에, 2차 대전 또는 월남전과 같은 시대적인 사건들 속에서 인간 내면의 세계로만 고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베리만은 생전의 유명함만큼 거론되고 있지 않다. 현재 많은 사회적인 영화들이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점에, 베리만의 ‘부활’과 그의 영화에 대한 환기가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다. 그것을 꿈꾸게 된 이유는 삶에서 끄집어낸 생각들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란 ‘도구’인 셈이다. 몽타주에서 나오는 미학,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너무나! 아름다운 예술이지만 ‘삶에서의 생각들’이 영상으로 옮겨갔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효과는 더 아름답다. 따라서 삶과 괴리된 문제의식, 삶과 괴리된 영화란 나에겐 일종의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이라고 지탄받는 베리만의 영화들은 나에게 왜 이렇게 크게 다가왔던 걸까? 문학평론가 김현은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내적 상처를 반성·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내가 베리만이 좋았던 이유 또한 그의 문제의식 그리고 그것을 영화 속에 놓여 넣는 그 방식 때문이었다. 즉 “신은 있습니까?”(<처녀의 샘>)와 같은 질문들의 내용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이 탄생한 지점과 그렇게 태어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영화 속에 집어넣는 그 방식이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의식은 단순히 현실과 괴리된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베리만의 문제의식이 탄생한 곳은 그의 삶과 기억이며 정확히는 그 기억의 반복이 깎아낸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유년의 기억에서 시작된 반복되는 상처, 거기서 얻은 질문들을 평생에 걸쳐 그는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간다.
그럼 베리만의 삶을 보는 것이 중요해진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잉마르 베리만은 목사의 가족으로서의 삶을 ‘쟁반 위에 놓인 삶’이었다고 회고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소년은 도덕적 규율이 편재하는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소통을 언제나 거부당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베리만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법은 ‘거짓말’과 ‘마술적인 것에 대한 상상’이었다. 첫 번째로 그는 거짓말을 가지고 진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외부용 인물을 창조함에 이르렀다고 말하며 그것이 성인 이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가 ‘거짓말’이라는 방법을 택했듯이 집안의 엄격함은 형에게는 반항을, 여동생에게는 스스로 움츠러드는 소심함을 낳았다. 이런 맥락에서 히스테리나 나르시시즘으로 점철되는 베리만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소통 단절’이라는 기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마술적인 것’에 대한 상상은 베리만에게 억압을 해소하는 도구로 작용했다. 캄캄한 벽장에 들어가는 벌을 받으며 베리만은 랜턴을 숨겨놓고 잠시 극장에 놀러온 것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유년기에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마법과 오트밀 사이를, 심연 모를 공포와 가슴 터질 듯한 희열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특권이 있다”(<마법의 등>) 1966년 <페르소나>이후의 시기의 예술가에 대한 주제의 작품들(예술가 3부작)을 보면 거기서도 예술가들은 환상적인 것들에게 대해 상상하는 것으로써 억압적인 현실을 극복 하려는 의지를 표출하곤 한다. 아무튼 어린 베리만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소년이었고 서커스단에 팔려가기를 고대하던 소년이었다. (동네방네 서커스단을 따라가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다니던 어린 베리만은 학교에서 벌을 받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후에 그는 어머니에게 서커스단에 팔려가고 싶다고 ‘말하게 되어버린’ 어린 소년의 심정을 왜 이해하지 못했느냐고, 그저 그 웃긴 상상에 대해 웃어넘길 수 없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 시기에 베리만은 시네마토그래프(영사기)를 얻게 된다.
그럼 위의 ‘신은 있습니까?’라는 문장을 다시 살펴보자. 목사의 아들로서 베리만은 신을 ‘믿어야’ 하고 그것에 걸 맞는 행동들을 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주위의 환경과 분위기, 그런 것들의 총체 속에서 혼자 고민하던 소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신이 있”느냐고, 정말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그 질문이 녹아들어간 영화가 <처녀의 샘> 등 인 것이다.

한 사람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변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베리만 영화는 시기를 나누어서 보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점 또한 영화의 주제들이 ‘삶에서의 문제의식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관점이 부각된다. 우선 대표적으로 ‘침묵 3부작’ ‘신 3부작’ ‘예술가 3부작’이 있다. 인간 내면-신-예술가라는 주제 모두 베리만 스스로에게 던져졌었던 질문들이고 본인의 삶에서 답해야 할 질문들이었다. 그는 억압에 대해 예술가가 어떻게 위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그는 예술가였고) 그는 ‘침묵’으로 특징지어지는 소통에 대해 생각했고 (그는 거부의 기억을 가졌고) 그는 신과 신이 침묵하는 시대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목사의 아들-세계적인 전쟁을 목격한 한 사람이었다.) 이런 문제의식들은 고통이 깎아낸, 생생한 기억(그러나 과거만은 아니다) 속에 있는, 문제의식이 빚어낸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베리만 영화들은 보는 행위 자체가 힘겹게 느껴진다. 베리만 영화는 난해한 영화이기 이전에 굉장히 고통스러운 영화라고 여겨진다는 점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보여주는 고통스러움에 ‘답’이 가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가 고통의 과정 다음에 어떤 답을 발견하는지 아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에게 첫 베리만 영화는 <페르소나>였다. <페르소나>에서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입부 이미지의 강렬함이나 몽타주이지만, 가장 인상적이던 것은 고통에 ‘침묵’이라는 방어 혹은 포기로 대응하던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변화다. 영화의 진행과정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대응방식은 침묵에서 싸우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바뀐다.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싸운다는 바로 그 점이,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베리만 영화 속에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비롯되는 현재의 고통들은 사건화 되지만 결국 주인공들은 그 고통을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할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 즉 그들은 이야기 끝에서 ‘한 발짝’ 더 내딛는다. 누군가는 그 ‘한 발짝’을 베리만이 찾아다닌 ‘신성’이라고, 신의 침묵 끝에서 ‘신성’을 인간 속에서 찾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의 영화 속 이야기의 연장에 대해 우리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고 베리만 또한 전혀 희망을 주려 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로서 주어지는 희망이 아니라 그들이 취하게 된 싸우려는 자세 자체다. 긍정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법한 결론이 단 하나의 옳은 답은 아니지만, 그것은 베리만 영화에 대한 오류들을 넘어서게 해주는 힘이 될 것 같다. 가령 베리만 영화에서 시대에서 눈을 돌린 부정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삶에 대해 싸우려고 했던 감독 자신과 같은, 그것의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응답 1개

  1. 냥꾸말하길

    이 글만 보면, 현재 지안님의 관심은 시대 보다는 인간의 내면인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시대와 그 시대속에 살아가는 인간, 그것도 작품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그 문제의식이 탄생한 지점과 그렇게 태어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영화 속에 집어넣는 그 방식” 에 대한 고민을 계속 놓지 않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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