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5-4-1 공감하고 연대하기

하버지, 오늘 얘깃거리는 뭐야? 이제 하버지 수행에서 마지막 계율인 공감하고 연대하기야. 만약에 하버지가 괴로워하고 있는 눈앞의 어떤 피해자와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괴로움을 공감했다면 이는 인간성을 회복하고 실현하려는 하버지의 수행의 공력이 드러난 거야.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여 자신의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고 똑같은 괴로움을 가진 사람끼리 함께 벗어나려고 힘을 모아 노력하거나 투쟁하는 연대가 공감능력을 기르는 가장 중요한 수행의 과정이면서 결과지. 그러므로 자기완성을 향하는 수행자가 남의 괴로움을 보고 함께 괴로워하며 함께 헤쳐 나가기를 외면하거나 거절한다면 그의 수행은 자기를 속여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거야.

아, 하버지가 자주 예를 들었던 예수의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공감하고 연대하기의 본보기이겠네. 예수는 강도 만난 피해자를 외면한 채 지나가버린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를 데려다 치료해 준 이방인인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그 피해자의 이웃이냐고 물었잖아. 그래. 누가 피해자와 연대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고 또 우리도 그럴 수 있느냐고 묻고 있어. 그 예화에서 예수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평범한 진실들을 떠올리게 하고 있어. 그러나 그 평범한 진실들은 그가 주장하는 대로 이승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데 가장 소중한 진실들이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결코 남의 괴로움을 외면할 수 없다는 거지. 그리고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면 그만큼 자신도 괴로워진다는 거고. 괴로우면 당사자와 함께 그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함께 노력하게 마련이라는 거야. 그게 바로 사랑이니 공감하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리고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보다 더 잘 살리기 위하여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라는 거고. 그러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함께 노력하고 투쟁할 때의 연대감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행복을 공감해주면 행복이 증폭된다는 거고.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만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등의 진실들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느냐고 예수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아.

거꾸로 말하자면 공감할 수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 없다면 남과 행복을 나눌 수도 없다는 말씀이네. 그렇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피해자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잇속만 챙기려고 남에게 함부로 피해를 끼치게 돼. 그들은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이타적인 행위는 힘에 맞서 대응하지 못하는 비겁이거나 굴종이라고 여기지. 누구라도 자기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면 자기처럼 남의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잇속을 챙기며 살아가게 마련이라고 보는 거야. 그러니 이들이 남의 행복에 공감하며 함께 행복해질 수는 없지.

공감하지 못한다면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이 없게 마련이야. 그래서 부나 권력, 명예, 지식, 등의 사회적 자산이 공평하게 돌아가야 할 모두의 몫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마치 수렵이나 채집 경쟁에서 유능한 쪽이 먼저 많이 차지하듯이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든 사회적인 자산을 먼저 많이 차지하는 쪽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은 사회적인 공감으로 정해진 경로를 따라 경쟁하지 않고 지름길로 먼저 가서 기득권을 차지할 수 있는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그러므로 그들의 행복을 남과 나눌 생각이 없을 거야.

그들의 생각을 뒤집어보면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거리낌 없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알 수가 있겠네. 공감을 못해서 악이 생기는 거잖아. 그렇고말고. 홍아야, 똑똑한 제자를 둔 내가 행복하구나. 그러니 그들이 피해자와 연대하고 피해자의 행복에 동참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만 하지? 마치 나뭇가지 사이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만큼 기대하기 어렵겠지. 이처럼 공감하고 연대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에 하버지는 누가 공감할 수 있는 정도를 그의 공감 능력이라고 보는 거야.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을 나눌 수 없다면 그들은 혼자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겠네. 그들이 남들의 행복에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유이고 권리야. 그런데 사회적인 관계에서 흔히 그들이 교묘하게 그리고 때로는 잔인하게 부나 권력이나 지위, 명예 등의 사회적인 자산을 독점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야. 그러면 배제되는 피해자가 많이 생기지. 그래서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한 행복을 추구하게 마련이지만, 없는 사람이라면 악한 행복을 추구하기도 한다는 게 바로 문제야.

그런데 홍아야, 모든 성인들이 즐거움이 아니라 왜 괴로움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지?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면 내 마음이 어떻겠니? 당연히 괴롭지. 누구든지 괴로우면 어떻게 하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겠지. 누구와 함께? 괴로운 사람끼리 힘을 모아서.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마음이나 노력을 각 문화권은 뭐라고 말했지? 그걸 하버지가 사랑, 자비, 인이랬잖아. 그래. 자, 그럼, 문화권마다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더 공감해야 됨을 강조했던 까닭이 뭘까? 인간이 사랑이나 자비나 인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이 가지고 연대하라고. 그리고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함께 행복하라고. 홍아야, 넌 어찌 그리도 똑똑할 수 있다니. 하버지 손녀니까. 아니, 하버지의 제자니까.

그런데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여 생기는 사랑과 자비와 인이 괴로움을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니까 ‘바람직한’ 인간성이라고 하자. ‘바람직하다’ 말로 미루어 본다면 공감능력으로 생기는 사랑과 자비와 인의 크기가 사람마다 같다는 거니 다르다는 거니? 잘 모르겠니? 바람직하다? 아, 다르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공감 능력이 없거나 부족해서 사랑이나 자비나 인한 마음을 가지고 연대하기가 어려우니까 그것이 바람직한 능력이 되는 거지. 그렇고말고. 그런데 왜 남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잇속만 챙겨서 피해자가 괴로워지는 불행 즉 악이 생기지? 여태까지 하버지가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남을 못살게 괴롭힌다고 하셨잖아. 그 그렇구나.

그런데 홍아야, 이를테면 엄마가 아이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만큼 행복을, 거꾸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만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공감능력의 무어라 했었지? 아, 그런 말 들어 봤어, 뭐더라. 공감능력의 역설. 그렇지. 동전의 양면이 언제나 붙어 다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행복에 사랑의 아픔과 괴로움이 대칭적인 짝을 이룬다면 사랑의 기쁨과 행복에 공짜는 없어.

그런데 석가모니의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했단다. 오늘날에는 같은 바람을 가진 부모들이 아파트에서 문명으로 편리와 편안과 풍요를 누리면서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아이들을 격리시키기는 그때보다 더 쉬워졌어. 부모들이 아이들을 세상의 거친 물정을 모르게 거친 세파에 다치지 않게 공감을 가로 막으려고 아파트에 가두어 기르니 어린 시절 석가처럼 아니 애완동물처럼 자라는 아이들이 많을 것 같구나. 그러나 석가의 부모가 실패했듯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거야. 왜 그럴까? 아, 이 질문도 전에 한번 대답했던 질문인데. 공감능력의 역설 때문이야. 남들의 괴로움을 공감하지 못하게 했다면 당연히 남들의 행복에도 초대받지 못할 테니까. 참으로 만점을 넘어선 답이구나.

그런데 홍아야,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잖니.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고통을 호소하면 자기의 고통을 떠올리고 서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 그런데 그 아픔을 경험하지 못했던 건강한 사람도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괴로운 사람의 말만 듣고 동병상련할 수 있다니 인간의 공감 능력이 신비하지 않니? 이를테면 손까락을 칼로 베인 아이의 아픔보다 그런 경험이 없는 엄마가 공감하는 아픔이 더 클 지도 몰라. 왜 그렇지? 엄마는 자신이 다쳤다고 상상하거나 손가락을 비슷하게 다쳐 아팠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으며 감동을 받듯이 엄마는 직관적인 상상으로 아이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어. 네 말대로 기억의 도움을 받아야 사실에 가깝게 추리·상상할 수 있고 또 사실에 가깝게 추리·상상할 수 있는 만큼 공감할 수 있지.

추리·상상으로 공감하는 방식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동일시(同一視)와 감정이입(感情移入) 등 세 가지가 있어. 이 세 가지는 추리·상상으로 나의 상황과 주체와 감정을 피해자의 그것으로 바꾸어서 공감하는 방식이야. 내가 그라면 또는 그가 나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보는 것은 그의 생각과 행동을 해석이고 번역하는 작업이지. 자 그럼, 홍아야, 상황과 주체와 감정 이 셋 중에서 역지사지는 무얼 바꾸어 추리·상상해보는 거니? 피해자에게 주어진 상황. 그럼 동일시는? 아픔이나 괴로움의 주체. 즉 내가 피해자로 분장하는 거지. 그래 그래. 그럼, 감정이입은? 내가 피해자의 감정을 가져보는 것. 아주 좋아. 그러니까 추리·상상에 따른 공감적 해석은 우리가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피해자가 되어 피해자의 감정을 가져보는 거야.

동병상련이라면 자기 경험에 비추어 남의 고통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같은 괴로움이나 아픔을 겪어보지 않고도 공감적 해석으로 당사자만큼 남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이건 중요한 문제야. 그래, 알아. 하버지는 네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에 박혀 죽은 예수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거야. 예수 신화는 인간이 목숨을 바쳐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어. 우리가 십자가에서 못에 박힌 경험이 없더라도 상상만으로 충분히 그의 아픔과 수치의 괴로움을 공감할 수가 있지.

물론 그때 거기서 예수라는 한 인간이 로마군에게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는 원형적인 사건은 사실일 거야. 그리고 그가 그렇게도 바라던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정의와 평등과 자유가 실현된 공동체를 로마 지배하의 시공간에서 실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그를 그런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사실일 거야. 그러나 그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기적적인 전 생애와 그 원형적인 사건에 공감 받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의미를 확대 해석한 신화를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어.

오늘날의 교회는 대부분 마귀의 소굴이 되었지만 초대 교회는 예수가 이 땅위에 실현하려던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웠던 공동체였던 것 같아. 그런데 역사에서 예수처럼 이상 사회를 이 땅위에 실현하려다 죽은 수많은 예수 사건들이 많이 있었어. 그 사건들은 민중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증거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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