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소외는 죽기 보다 싫다.

- 김융희

고등학생이 친구들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다. 학교 폭력은 반드시 근절시켜야 할 심각한 사회 문제로 진즉부터 당국은 그 대책에 부심하고 있지만, 전혀 끊일줄 모르고 여전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메스컴을 통한 실상을 접하면서 답답함과 함께 무언가 잘못된 대처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이 발생할 때면, 교내 어린 학생들의 일이 어마 어마한 범죄처럼 지나친 호들갑들을 보면서 당국과 사회의 대처에 대한 의구심이다.

폭력은 소외를 발생시키며, 소외는 절망을 낳고 절망은 죽음보다 두려운 것으로, 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큰 죄악이다. 어떻든 우리 사회에 소외와 폭력은 없어야 한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한 철학자의 명제처럼, 인간의 삶마저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게하는 결코 용납 못할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 사회의 폭력과 소외가 결코 용납 되어선 안 될 일이다.

항상 친구와 같은 가까운 이웃이 폭력과 소외의 가해자요 피해자라는 사실에 그 충격은 더욱 크다. 이번의 일도 가해자 중에는 피해자의 부모로 부터 많은 배려와 사랑을 받은 친구도 끼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피해자는 더욱 상처가 컸으리란 짐작이 쉽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죽음 앞에서도 그 친구의 배신을 실명으로 남겼겠는가? 가까운 사이에서 믿었던 친구가 등을 돌렸을 때의 황당함과 배신감으로 절망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이실 직고하면 나도 근래에 잠시나마 비슷한 소외를 경험했다. 마음에 상처까지는 아니었지만, 소위 왕따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졌다. 낯이 간지러워 밝히기도 떠올리기도 싫은 일이다. 가늘고 낭창 낭창한 닭의 갈비뼈에 붙은 고깃살, 뜯기도 버리기도 뭣한 것이 계륵(鷄肋)이다. 누구와 상의하려니 내 얼굴이 간지럽고, 그냥 덮고 지내려니 좁쌀 같은 소갈머리에 참을 수가 없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 더욱 신경이 쓰이며, 대처도 힘들다. 마치 계륵처럼 말이다.

우리 교회 교우들의 활동인 ‘에이지 동아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에게 문화부장을 맞으라는 권유였다. 하는 일도 없는 형식뿐인 일을 맡아서 뭣하느냐며 사양했으나, 형식이니 이름만 걸겠다며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다. 이때까지 문화부는 이름뿐인 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맡은 일을 이름뿐인 형식으로 두긴 싫었다. 기왕 자리를 만들었으면 활용해야 한다. “동아리의 공식 일정에는 없는 행사임으로, 참여는 회원들 자의에 의한다. 물론 회원 모두에게 꼭 연락은 한다.” 모임이 있을 때면 가능한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나 많은 회원이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회장을 비롯한 조촐한 인원으로 별 탈없이 진행해 잘 치뤘다. 몇 차례의 서울 근처의 둘레길 걷기와 미술관 관람을 하면서 공동식사도 즐겼다. 그러했다. 그것 뿐이었다. 그런데… ?

그런데 임기를 마치는 중요한 임원회의가 나만 모른 채였다. 내게는 알리지도 않고 빠뜨린 것이다. 의도적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여러 정황을 참작하며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알 수도 없고,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교우들 친목의 동아리에서 소외됐다는 그 섭섭함이라니! 그러나 어쩌랴. 사소한 일을 자세히 설명드릴 수도 없다. 서글픈 마음이지만, 내 불찰로 돌리고, 내 홀로 속내에 두고 곰삭일 일이다.

잘 나갈 때 함께하기 보담, 외로울 때 따뜻하게 다가서는 고마움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보여준 정말 기적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993~1997년을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던 “제임스 레이니”교수에게 실제 있었던 일이다. 대사직을 끝내고 에모리 대학 교수로 있었을 때이다. 그는 건강을 위해 꼭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퇴근길 도중의 집앞에서 몹시 쓸쓸하게 앉아있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외로워 말을 걸고 싶어하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면서 말벗이 되었다. 노인은 너무 좋와하셨다. 결국 퇴근길 거의 매일을 함께 정원의 잔디도 깍고 커피도 함께 마시며 말벗이 되어 지냈다.
거의 2여 년을 이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할아버지가 안 보였다. 궁금해 집안에 들였더니 지난 저녁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는 급히 장례식장으로 갔고, 거기서 그토록 소탈했던 분이 유명한 코카콜라의 전회장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낯선 분이 다가와서 “레이니 교수”임을 확인하고선 고인의 당신에게 남긴 유서라면서 봉투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에게 2여 년동안을 친구처럼 한결같이 다정하게 대해준 당신이 너무 고마웠소. 나의 마지막 우정의 선물을 드리오. 나의 현금 25억불과 코카콜라 주식 5%를 당신에게 전합니다.』
레이니 교수는 퇴근길 지나다니며 말벗이 되어준 것을 이처럼 고마운 우정으로 생각하면서 상상을 초월한 거액을 전하는 유서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유명한 세계적인 부자로써 신분도 감추며 그토록 검소하게 살았음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유산으로 받는 거액을 자기의 근무처 “에모리 대학”에 발전기금으로 전액을 기부했다.
뜻밖에 엄청난 부를 얻었지만, 그는 횡재의 부를 탐하거나 도취되지 않고 오히려 대학을 위한 발전기금으로 기부함으로 학생들의 장래에 힘을 길러준 아름다운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후 에모리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조그만 배려와 섬김의 결실은 무한대로 해아릴 수도 없는 것, 이처럼 위대한 “감동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해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너무도 뿌듣함으로 날고싶도록 기분이 좋다. 대학 교단에서 평생을 바쳐 대학원장까지 지냈고, 오래전 정년을 맞아 지금은 조용히 지내신 선배께서 몇 개월 동안을 미국에서 보내게 됐다며 함께 점심을 하자는 초대였다. 거의 매일 외출을 했고 오늘은 집에서 꼭 해야할 일이 있음에도 불응할 수가 없었다. 조선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생각하며 내가 존경하신 선배이다. 벌써 네 분이서 미리 기다리고 계셨다. 종와하지도 않으시면서 귀한 술을 가져와 손수 따르신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세 시간여를 즐겁게 보냈다.

내가 이렇게 흐뭇함은, 오늘 모여 점심을 나눈 분들이 모두 우리 교회의 교우이면서 “에이지 동아리”의 맴버였음일 것이다. 나는 오늘 자리를 함께한 선배들을 마음에만 가까이 두면서 그동안 배려한 것이 전무였다. 그런데도 이처럼 나를 불러주며 함께했다는 사실이, 요즘 내가 이유도 모른 채 왕따를 당했다는 서운한 마음과 함께 했다. 소원감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동안의 불쾌했던 감정이 천군 만마를 만난듯, 봄눈처럼 사라졌다면 남들이 믿을련지 몰겠다. 그러나 나에겐 다행으로 사실이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가 그 결실은 크다. 더불어 살면서 이웃에게 큰 도움은 못 주더라도, 괴롭히고 무시하지는 말아야 한다. 견디다 못해 삶을 포기한 고등학생 최군과 그의 부모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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