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5-4-2 공감하고 연대하기

그러니까 하버지 말씀은 모성애가 자식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듯이 공감에서 비롯되는 모든 종류의 사랑도 사랑하는 대상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게 마련이라는 뜻이네. 꿈보다 해몽이 더 낫다고 내 얘기보다 네 해석이 더 간결하구나. 자식의 행복에 대한 공감이 아무리 큰돈이나 높은 지위나 많은 칭찬보다도 엄마를 더 행복하게 만들듯이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일 수 있어. 인간은 바로 이 공감능력에서 오는 사랑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고 또 이 공감능력에서 오는 행복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만약에 사랑이 모든 선을 대표하는 덕목이라면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바로 이 공감능력에 따른 사랑으로 선한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하버지, 인간은 공감능력에 따른 사랑으로 선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근거나 진화적인 근거가 있을까. 당연히 있지. 우선 경험적인 근거는 우리가 말했던 모성애가 그래. 그리고 민중을 사랑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려다 반역죄로 처형된 혁명적인 사건과 그 인간들도 그렇고. 또 사랑을 소재로 하는 모든 예술 작품이 보여주는 주제는 사랑하는 대상을 더 잘 살리려고 온갖 대가를 치르거나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메시지였어. 이런 사례들이 공감능력에 따른 사랑은 선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경험적 근거일 거야.

그렇네. 그러면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언제부터 자신을 희생할 만큼 남을 더 사랑하는 공감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 인간의 공감능력이 오늘날의 문명사회가 가능하도록 비약적인 진화가 시작되는 시기를 대개 약 4만 년 전 쯤으로 잡아. 그리고 그 이전에는 동물의 공감능력의 비약하는 시기는 모성애가 뚜렷해지는 포유동물의 출현으로 보고 있고. 그 모성애에 대한 공감이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고 엄마를 중심으로 하는 모계사회인 가족을 사랑하게 만들었을 거야.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도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지. 그것도 당연히 공감에 따른 행동이야. 그러나 인간의 공감은 본능으로 유지되는 폐쇄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추리·상상에 따른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동물의 공감과 달라. 그래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연장되어 생활 공동체인 씨족과 부족 구성원까지 오늘날에는 국가 구성원까지를 사랑할 수도 있어.

그러나 공감의 범위가 이해를 같이하는 공동체 부족 사회나 국가 사회 구성원에게까지 넓혀졌지만 거꾸로 인간에 대한 적개심도 그만큼 커져서 전쟁이 나면 상대편을 함부로 살육하거나 강탈하고도 피해자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어. 이러한 편가르기 감정 때문에 이를테면 중국은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공포나 멸시의 감정을 가지고 온갖 나쁜 평판을 만들고 기분 나쁜 이름을 붙였어. 마치 우리가 북한 정권을 북괴라고 하듯이. 편가르기 감정이 공감을 가로 막아버린 거야.

그런데 나 잘 살자고 남 못살게 하면, 나와 너로 편가르기하여 장벽을 치면 결국 서로가 함께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화적인 증거가 개방적인 공감능력이야. 그래서 공감 경험이 많아질수록 좁은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고 보다 넒은 ‘우리’에게 공감하게 돼. 아마 가족 단위로 수렵과 채집을 하러 떠돌다가 유목이나 정착된 농경 생활을 하게 되니까 ‘우리’의 범위 즉 공동체의 범위가 가족에서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커지는 시기가 4만 년 전쯤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감스럽게 아직은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 범위가 가족이나 씨족 그리고 친지를 넘어서지는 못한 것 같아.

그러나 일찍이 공감능력이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 성인의 공감은 가족이나 씨족 단위를 넘어서 전 인류와 모든 생명체들에게 미쳤어. 그들은 인간의 공감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 지 그 가능성을 보여 주었어. 그리고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은 서로를 잘 살리려고 노력한다면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어. 맞아. 그들은 인간이 가진 공감 가능성 즉 인간성을 믿고 인간의 그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본보기로써 자신의 일생을 바쳤어. 그러니까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믿기 힘들어도 맨 먼저 우리도 인간이 가진 공감 가능성을 믿어야만 돼. 그리고 서로를 행복하게 하려고 다 같이 노력한다면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들의 가르침대로 공감과 연대로 선한 행복을 추구해야 돼.

그렇다면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성의 진화의 방향이겠네. 하버지는 진화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은 아니야. 다만 인간에게 공감에 따른 선한 행복의 경험이 더 많이 축적될수록 더 나은 공감능력으로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더 나은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지. 그러한 경함이 쌓이다보면 양이 질로 변화를 일으키듯이 다 많은 공감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진화도 있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것은 자연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방향 선택에 달려있지.

나 잘살자고 남 못살게 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다른 동물은 몰라도 인간에게는 진화의 한계야. 만약에 그런 진화 방식이라면 오늘날 엄청난 살상능력을 가진 인류라는 종은 계속된 편가르기로 끝없이 서로 죽이고 죽는 역사 끝에 자멸하고 말 거야. 그러한 진화의 한계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깨달은 증거가 바로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개방적인 공감 가능성일 거야. 인간이 고정적이고 폐쇄적인 공감 가능성이 지닌 진화적 한계를 깨닫고 누구에게나 선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공감 가능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불과 4만 년 전쯤이래. 그렇다면 전 진화과정으로 볼 때 그 깨달음은 실로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지.

그러나 문명 발전의 원동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가 공감능력이라고 하셨잖아. 하지만 지구촌이 하나의 공동체가 된 오늘날이라면 공감능력도 당연히 전 인류에게 미쳐야 되는데 아직은 그렇지 못해. 그러니까 인류라는 종이 자멸할 가능성도 있을 거야. 그렇고말고.

그런데 하버지는 왜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는 거야?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하버지는 석가와 달라이라마가 자비심을 그토록 강조하는 까닭을 조금씩 깨닫고 있단다. 자비는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며 함께 괴로워한다는 뜻이야.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더 공감하라는 것은 그래야 서로 도와가며 그 괴로움에서 함께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 거야. 공감이 없다면 연대도 없으니까. 뿐만 아니라 벗어나는 과정에서 느낄 연대감과 벗어난 후에 공감할 행복감 때문일 거야. 벗어나기 전의 괴로움에 더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만큼 벗어난 후의 즐거움에도 더 크게 공감하여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일 거야.

홍아야, 그걸 전에 공감 능력의 무어라고 했었지. 역설. 그래, 석가와 달라이라마가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라는 것은 우리가 피해자와 함께 괴로움에 빠져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우리가 피해자와 함께 벗어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거야. 그들의 가르침은 혼자만의 평안에 도달하여 거기에 머물기 있기 위해 남과 인연을 끊고 남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눈을 감고 마음 문을 닫아걸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을 거야.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사에 머물며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닐 거야. 고생하는 사람에게 공감하여 함께 고생하며 그 고생을 풀어서 함께 행복지라는 뜻일 거야.

홍아야, 너라면 무인도에 가서 혼자 풍족하게 지내는 것과 가난해도 서로 도우며 지내는 것 어느 편을 선택하겠니. 혼자 어느 정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어울려 사는데 모두가 얼마나 가난한지 특정하기 전에는 선택할 수가 없잖아. 그렇구나. 그런데 하버지 질문 의도가 뭐겠니. 혼자만의 욕구 만족으로 얻는 행복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에 공감할 수 있는 행복이 더 많다? 더 크다? 그 행복이 더 많고 더 큰지는 몰라도 결코 무시할 정도로 적지 않다는 거야. 공감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자기 혼자만의 욕구만족으로 얻는 행복보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공감하여 얻는 행복이 더 큰 몫이라고 여길 거야.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보다 돈이나 권력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걸로 믿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지, 돈보다 사람이 더 좋은지는 아마 사람마다 다른 공감 능력의 차이일 거야.

홍아야, 만약에 엄마나 아빠가 아플 때 네가 대신하여 아플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자. 그건 엄마와 아빠가 이제까지 네게 그랬던 것처럼 너도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아픈지를 공감했기 때문이야. 만약에 네가 공감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 같니? 하버지 말씀대로라면 아빠나 엄마의 고통을 공감하는 만큼 나도 고통스럽겠지. 그래서? 고통스러우면 본능적으로 그 공감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겠지. 그래서? 나는 아빠엄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으니까 아빠엄마를 낫게 함으로써 벗어나려 할 거야. 그래서? 낫는 방법을 찾아 온갖 노력을 다하겠지. 그래. 아빠의 눈을 뜨게 하려고 심청이도 그랬어.

그런데 네 공감 범위가 아빠엄마를 넘어서 어디까지 미칠 것 같니? 너는 어디까지 연대할 수 있을 것 같니? 하버지가 지금 공감 넓히기를 내게 강요하고 있네. 그럼, 어디까지 공감해야 되는 거야? 물론 당장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가장 괴로운 사람들부터이지. 그 다음은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건강이나 용모나 출신이나 장애 등 뭔가가 많이 부족해서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고. 밀려났다고 해서 그들만 달동네나 임대주택에서 집단 거주하는 것은 아니야. 가정이 없는 노숙자들은 서울역에도 많아. 그런데 누구라도 이들에게 공감한다면 이들을 사회의 변두리로 밀어내거나 가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나 울타리를 치워서 사회에 합류하여 잘 살도록 도와야지. 그런 노력이나 투쟁이 그들과의 연대야.

그렇다면 소외된 이웃에 대한 공감대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을 해야겠네. 그렇지. 그들을 밀어내는 제도적인 울타리나 장벽을 치우고 다시는 장벽이나 울타리를 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려는 노력이 바로 제도화의 노력이야. 인간은 역사적으로 공감 능력이라는 인간성을 거스르는 수많은 이념과 그에 따른 체제들을 실험해왔어. 그러나 계속되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공감을 수렴하여 공동체를 운영하려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어. 이것이 공감대의 제도화 노력이나 투쟁이었어.

그러나 아직은 민주주의가 가진 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지. 그래도 멀게 본다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또는 변두리에서 괴로워하는 목소리를 좀 더 경청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공감과 연대로 민주주의가 좀 더 발전하리라 믿어. 투표하는 날 하루만 평등해지는 정치적인 평등에서 사회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경제 사회 문화적인 평등을 이루어 나가야 되겠지. 하버지는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성의 하나인 공감 가능성을 실현하는 바람직한 역사 발전이고 바람직한 인간 진화의 방향이라고 믿어. 하버지 정말 그렇겠네. 그래서 공감과 연대가 우리의 중요한 수행과 성숙의 과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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