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물고기, 못난이, 그리고 큰 나무.

- 숨(수유너머R)

1. 땅 위에 드러난 물고기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천학 어상여처어륙 상구이습 상유이말 불여상망어강호

샘이 말라 물고기가 땅에 드러나 숨을 내쉬고 거품을 내어 서로 적셔줌은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하다.

-<장자> 대종사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진, 조, 위, 한, 제, 연, 초의 7개 국이 패권을 다투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춘추시대는 다른 나라를 정벌해도 완전히 멸하지 않았는데 전국시대는 전쟁 패배가 나라의 멸망을 의미하는 무자비한 시대였습니다. 패한 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전쟁이 끊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는커녕 목숨도 보존하기 힘들어집니다.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격변의 정치적 장에서 형벌을 받아 몸이 불구가 되거나 가난 속에 근근이 목숨을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장자가 목격한 세계는 말라버린 샘이었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육지에 연약한 살을 드러낸 물고기와 같았습니다. 장자는 무자비한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분명 아팠을 겁니다. 장자의 출발점은 그곳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펼치며 살아가는 방법.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삶을 방해하고 짓누르는 것의 성격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가늠하는 것이었어요.

자여와 자상 두 친구의 이야기를 볼까요.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 되자 자여는 가난한 자상을 걱정해 밥을 싸가지고 갑니다. 문 앞에 다다르니 자상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 하늘일까, 사람일까” 노래하는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한 목소리로 거문고를 뜯으며 읊조립니다. 피죽도 못 먹은 목소리는 기어들어갑니다. 자여가 들어가서 묻습니다. “자네 노래가 어째서 그런가?” 자상은 대답합니다.

吾思夫使我至此極者而不得也. 父母豈欲吾貧哉 天無私覆地無私載天地豈私貧我哉. 求其爲之者而不得也. 然而至此極者 命也夫.

오사부사아지차극자이부득야. 부모등욕오빈재. 천무사복지무사재천지등사빈아재. 구기위지자이부득견야 연이지차극자 명야부.

나를 이렇게 막바지로 몰아넣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네. 부모가 어찌 내가 가난하길 바라겠나. 만물에 공평한 하늘이 그렇겠나, 만물에 공평한 땅이 그렇겠나. 하늘과 땅이 어찌 나만 가난하게 하겠나. 나를 가난하게 만든 게 무언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어. 그런데도 이런 막바지에 몰리다니 命일테지.

-<장자>대종사

장자는 삶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조건을 命, 즉 운명으로 보았습니다. 운명은 현재의 삶을 옥죄고 짓누르는 조건과 한계입니다. 한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으로, 어찌할 수 없음으로 닥쳐오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의 관계가 그렇고, 가난이 그렇고 질병이 그렇고 형벌이 그렇죠. 이런 조건들은 극복이 안 됩니다. 안 되니까 운명이겠지요. 도저히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무엇. 부모는 버릴 수 없고 열흘을 굶은 자가 갑자기 부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방해하고 위협하는 한계로서의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장자가 세상 속에 살아가야하는 존재들을 보며 절실히 답을 구하고자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2. 못난이가 살아가는 법

그 질문 속에서 장자가 찾아낸 인물들이 못난이들입니다. <장자> 5장 ‘덕충부’에는 형벌을 받아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갔거나 원래부터 몸이 못생기게 태어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못난이 경연대회를 펼치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한쪽 발이 없는 사람, 뒤꿈치가 잘린 사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못 생긴 사람,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 커다란 혹이 달린 사람. 인기지리무신(절름발이꼽추언청이), 옹앙대영(커다란 혹부리), 숙산무지(발없는숙산), 장자의 작명센스가 보여주듯이 몸 자체가 한계이고 존재 자체가 운명인 이들입니다. 그들은 운명을 바꾸는 인생역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운명을 평가하고 존재를 비루하게 만드는 세상의 태도에 저항했습니다.

신도가와 정자산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볼까요? 둘은 백혼무인이라는 선생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였습니다. 신도가는 형벌로 다리 한 쪽을 잃었고 정자산은 나라의 대신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자산이 공격을 합니다. “너는 형벌을 받은 주제에 반성을 하지 않는다. 대신인 나와 같은 자리에 있으려 하다니 뻔뻔하다” 신도가는 받은 만큼 되돌려 줍니다. “형벌을 받은 것은 운명이었다. 탓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운명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 더 훌륭하다. 너는 입으로 선생님의 도를 따른다고 하지만 내가 발이 없는 것을 비웃고 우리 둘의 지위를 구분하는 그 태도는 뭐냐?” 부끄러워진 정자산은 그만하자고 백기투항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혼나는 인물은 공자입니다. 노나라의 외발이 숙산무지가 공자에게 가서 배움을 청하자 공자는 “너는 처신을 잘못 해서 발 한쪽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놓고 지금 와서 배우겠다고 하니 이미 늦었다”고 말합니다. 숙산무지는 그런 공자를 꾸짖지요. “내게 발보다 존귀한 것이 남아있어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힘쓰려고 하는데 선생은 어찌 그런 대답을 합니까.” 머쓱해진 공자는 제자들에게 숙산무지보다 못한 게 없는 너희들은 배움에 더 힘쓰라는 딴소리를 합니다.

人不忘其所忘 而忘其所不忘

사람들은 잊어야할 것을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는다.

-<장자>덕충부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온전히 살아가겠냐고. 못난이들을 부족한 자로, 입 없는 자로 규정짓습니다. 심지어 같은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덕충부의 못난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일갈합니다.

완전한 몸에 붙들려 있는 너희들은 얼마나 불완전한 눈으로 존재를 보는 것이냐, 그리고 나에게는 더욱 존귀한 것이 남아있다, 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남은 가장 귀한 것, 그것은 바로 삶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한계, 이지러진 신체, 운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세상의 말과 평가입니다.

몸이 이지러진 자에게는 더 이상 몸의 완전함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지러진 모습으로도 세상은 살아가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름발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에게 신체의 온전함을 강조하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 됩니다. 보편타당하게 여겨지던 세상의 기준은 온전히 살아가고자 하는 못난이들 앞에서 흔들리고 설득력을 잃습니다.

‘덕충부‘에는 희대의 추남 애태타도 등장합니다. 세상이 깜짝 놀랄 만큼 못생겼는데도 수십명의 처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느니 그의 첩이라도 되겠다며 줄을 섭니다. 노나라 외발이 왕태는 따르는 사람이 많아 공자와 노나라를 양분할 정도였구요. 그 외 인기있는 못난이가 몇몇 더 있습니다. 세상의 갖은 못난이들을 인기절정의 매력남으로 둔갑시키는 장자의 솜씨에 한참 웃다보면 무릎을 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모자라다고 평가하는 대신 세속의 잣대를 흔들어줄 수 있는 못난이들을 만난다면 누가 반하지 않을까요.

3. 내 마음에 큰 나무를 심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의 운명, 한계에 대한 세상의 평가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필요한 용도의 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인간세’ 에 등장하는 못난이 지리소는 처음부터 그 용도, 세상의 쓸모에서 빗겨난 사람입니다. 턱이 배꼽에 가려지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으며,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내장이 머리 위로 올라갔으며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있는 사내입니다. 꼽추를 과장되게 묘사해놓았죠. 하지만 그는 키질과 바느질을 해서 식구를 건사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전쟁이나 국가 역사가 있을 때에는 징집당하지 않기 때문에 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병자를 위한 곡식과 땔나무가 내려올 때에는 일착으로 그 혜택을 누립니다. 전쟁에 나가기에 그 몸은 지나치게 뒤틀렸습니다. 국가의 큰 공사에 불려가기에도 적당하지 않죠.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지리소의 이야기는 쓸모있음과 없음을 누가 구분하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쓸모있음과 없음의 구분은 세상의 기준과 필요에 의해 구성됩니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쓸모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것은 쓸모의 목록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장자가 사람의 가장 큰 쓸모를 쓸모없음에서 구한 이유입니다. 나의 쓸모가 외부에 의해서 결정될 때 삶은 더 이상 내 손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今子有大樹患其無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無害者 無所可用 安所困苦哉

금자유대수환기무용 하불수지어무하유지향광막지야 방황호무위기측 소요호침와기하.

불요근부 물무해자 무소가용 안소곤고재.

지금 당신이 가진 큰 나무의 쓸모없음을 왜 걱정한단 말이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너른 들에 그 나무를 심으시오. 그 옆에 하릴 없이 방황하고 그 아래 누워 잠들고 거닐면 당신을 해칠 수 있는 도끼날은 없을 것이오. 그런데 왜 쓸모가 없다고 하며 그렇게 걱정을 하는 게요?

-<장자>소요유

얼마 전부터 친구들과 함께 “도시빈곤여성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너무 구질구질한가요? 생각해보니 장자식 이름짓기네요. 사실 빈곤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벌 수 있으면 좋겠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 살면 좋겠어요. 하지만 잘 안됩니다. 부딪혀야 하는 현실의 한계가 아프지만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우리를 부족하고 결핍된 사람으로 만드는 타인과 세상의 평가를 비틀어봅니다. 한참 찧고 까부는 수다를 하고 나면 0에 가까워진 통장잔고 때문에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펴집니다. 적은 돈으로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는 정보도 교환해봅니다. 우리가 조금씩 자신이 되는 삶을 살기를 격려하는 응원도 서로 나눕니다.

우리는 육지에 드러난 물고기인 동시에, 큰 나무 아래 방황하며 거닐고 싶은 못난이들입니다.

응답 1개

  1. 강보경말하길

    못난이도 먹고 살아야하는데 사회 대다수의 기준에서 볼때 못생겼다는 이유로 먹고 살 기회를 주지 않으니 그게 문제입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직장 상사나 선배가 그 못난이를 막보고 여러 사람 앞에 인격 모독을 주니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뾰족한 수도 없으니 개같은 운명을 그런데로 사는 수 밖에요.
    이런 불운자를 막기 위해 못난이는 자식을 낳지 않는게 나을거 같기도 합니다. 유전적으로 또 그런 재수없는 개떡같은 운명을 물려주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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