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소녀덜, 남쪽으로 튀었수다

- sh

* 이 엄청나게 길고 잡다한 수다는 산호무밍이 성현군에게 인도 음식을 얻어먹은 바람에 쓰게 됐다.

* 산호무밍은 한 사람이 아니다.

* 강정을 모르는 사람을 친절하게 배려하는 글은 아닌 것 같다.

* 번거롭겠지만 그런 분들께는 다음카페 ‘구럼비야 사랑해’(http://cafe.daum.net/peacekj)나 페이스북 ‘강정사람들’(http://www.facebook.com/groups/GJpeoples/)을 권유한다.

선택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그냥 어쩌다 흘러온 날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절반은 의지였고 약간은 고집이겠지만.

산호 : 희망버스, 두물머리 같은 곳에 가면 잠깐씩 ‘강정’이라는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그 때 지나쳤던 사람들과 이렇게 부대끼게 될 줄 전혀 몰랐으니까. 그 때 거기 있었던 우람한 언니가 미량언니였다. 조그만 아이가 윤미였다. 그들이 말똥게목걸이를 팔고 있었는데 안사고 구경만 했다.

무밍 : 나는 2011년 여름에 제주도를 여행했는데, 어떤 게스트하우스에서 강정마을에 대한 걸 봤었다. 마치 외국에 있는, 자연이 아름답지만,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런 곳으로만 알았다. 내가 직접 가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너무 거리감이 있었지. 두물머리에서 봤을 때도 ‘아, 이런 사람들이구나, 신기하다’였었는데. 그 때 그 목걸이를… 이제 저희가 못 팔아서 동동 거리고 있네요.

산호 : 그러다 가게 된 게, 나 이사한 지 3일 째 되던 날. 한 친구가 강정 간다고 했던 게 나름 계기인건가요? (무밍 : 그렇죠.) 그 다음날 거기에 삘 받은 친구가 먼저 강정으로 날랐다. 그 날 저녁, 어디냐고 전화했더니 ‘마을회관.’ 이래서 ‘어디 마을회관?’ 이랬더니 ‘제주도 강정마을!’ 이라고. 얘가 무밍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엄마더러 “나 강정 갔다 올게!”하고 비행기 탔다. 소풍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제주도니까. 어쩌다 가게 됐냐는 건 좀 많이 듣는 질문인데, 어쩌다 갔다.

무밍 : 호감 + 딴마음 품었던 남성동지와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였다는. 어허참. 나는 마음만 종종거리고 별다른 행동도 없었는데. 트위터를 보니 심각해보여서 갈까?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그 친구의 강정행은 조용한 혁명이었다. 행동이였고,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길이었다. 그 어떤 여행 티켓보다 매혹적이었던 김포발 제주도행 비행기. 술자리가 끝난 새벽, 친구네서 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집에 가서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그 날 저녁 강정에 도착. 산호에게서 그 날 밤에 전화가 왔고 그 다음날 바로 왔다. 그것도 쇠파이프를 끼고 공사장을 막던 이들의 팔을 망치로 깨서 스크럼을 풀고 연행했었던 날의 밤이었다. 어둡고 어두웠던 평화센터와 의례회관으로 가는 길. 아직은 추웠던 3월 19일의 밤. 별이 무수하게 빛이 났었던 강정의 밤과의 첫 대면이었다.

2012년 3월. 제주해군기지공사 사업단 정문 앞에서 요가 중임.

2012년 3월. 제주해군기지공사 사업단 정문 앞에서 요가 중임.

4월 총선까지 있자,

아니 대선까지 있자…????

산호 : 원래 하루 있으려고 갔었는데. 3월 중순은 구럼비 발파 이후라 한참 사람도 많고 시끄러웠다. 하루~종일 비상사이렌이 울렸고, 마을 곳곳에 경찰이 서있거나 돌아다녔으며, 매우 정신이 없었다. 매일 사건사고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시작은 그 급박함 속에서 생각할 시간이 조금도 없어서, 일단 있게 됐던 것이다. 아마 생각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나는 내일 무엇을 해야 하며, 나는 이런 점에서 이런 저런 것들이 어울리지 않으며, 라면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근데 비행기 티켓을 예약할 시간이 없었다. 그 때는 정말 그랬다. 아님 우리가 너무 푹 빠졌거나?

무밍 : 빠졌었나보다. 포구에서 구명조끼만 입고 뛰어들었던 게 기억난다. 3월의 시린 바다에서 바둥거리다가 해경한테 계속 끄집어 나가지고, 덜덜 떨면서 트럭 뒤에 실려서는 샤워하러 갔다. 지금하고는 달리,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마구 쌓여있는, 후원물품으로 온 옷들을 헤집어 입었다. 사이렌 소리에 뛰쳐나가고 들어오던 날들이 이어졌었다. 경찰들과 대치하고 작전을 세우고 삼촌들은 울고. 화는 나는데 뭔지 모르는 채로, 하지만 이 상황이 너무 말이 안 되니까.

산호 : 강정은 사건사고만 많은 게 아니라,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오묘한 분위기가 있다. 내 심장이 여기 있었네, 싶게 매력적인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 누구는 원시인 같다고 했지만. 게다가 딱히 돕는다기보다는 그저 한 번 보자는 정도에서 왔는데 도리어 자꾸만 내가 뭔가를 받았다. 그게 어쩔 줄 모르겠어서, 뭔가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아니,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근데 여기 되게 바쁘구나, 그러니 하루만 더 있을까? 하다가…, 그런 하루들이 하루하루 쌓여갔다. 그 뒤로 몇 번인가 힘들어서 ‘이제는 가야지’ 했던 적이 있다. ‘좀 오래 있었잖아? 이 정도면 됐잖아?’ 하면서. 근데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느닷없이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이게 아마 인연인 것 같다. 그대로 돌아설 수도 있었는데 운좋게도 아니었다. 삼거리식당 뒤에서 몰래 울고 나와서 걷는데, 원래 인사만 하던 삼촌이 갑자기 말을 걸고 “수고했다. 와줘서 고맙다.” 그러시는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노을이 그 뒤로 딱 지는거다. 그럼 하루 더 있게 된다. 아니, 왜 나한테 고맙지? 나 고마운 일 한 적 없는데? 그러다가 결국에는 인정한다. ‘아씨, 나 오늘도 못 가는구나.’에서 ‘내가 여기 있고 싶구나. 마음이 허락할 때까지 여기 있어야지.’

무밍 : 나는 별로 그거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았는데? 서울이나 여기나! 여기에서는 그나마 내 머릿수 하나가 도움이 되는구나. ‘언제 가지’라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언제 가면 가는 거겠지, 오면 오는 거겠지. 그냥 가끔 우울할 때면 가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지. 서울에 있어도 여기 있어도 저기 있어도, 인간의 삶이란 의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만 해대는 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산호 : 우리는 그나마 단순했던 게, 너는 휴학 중이었고, 나도 나를 강제하는 뭔가가 있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돌아가야 되는 장소에 대한 무게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얕았지. 진샘은 딱 한 달만 있기로 가족들과 약속하고 왔었는데 한 달 더 있었으니. 봉땡, 우땡, 이런 친구들도 사실 잠깐 있으려고 왔는데, 생계도 다 미루고, 자기 통장에 있는 돈을 마이너스 해가면서, 어쩔 줄 몰라서 있었잖아. 아무 대책도 없이. ‘설문대할망’한테 홀린다는 말이 맞나봐. (강정마을에서 보는 한라산은 누워있는 여인의 몸을 닮아있다. 평화센터에 앉아 훔쳐보시면 된다.) 우리가 있던 내내 ‘언제 가지’가 인사말이었고. 언제 왔어요? 언제 가요? 언제 다시 와요? 이런 걸, 자기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마치 계속 있을 듯이 말하고 이상한 온도 속에서 뒤엉키는데, 그 다음날 갑자기 ‘나 가.’ 하면, ‘아 가는구나.’ 했잖아. 같이 자고, 먹고,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종일 함께 있는데, 뭔가 허공에 떠있는 공동체? 그래서 결국 누구는 ‘이번엔 언제 가?’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주말마다 내려오더니만, 일 그만두고 내려오셨죠. 참 거시기한….

무밍 : 어찌하여 머무르게 되었을까? 내가 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무력함에 천길만길 떨어져 밤늦게 산책하며, 우울해하기도 하고, 당장 짐싸서 떠나자, 라는 마음도 한 두 번 들었던 게 아닌데. 왜? ‘민군복합항 관광미항’이라고 뻥치고 마을 사람 돈으로 매수해서 해군기지 안건 통과시키고, 온갖 협잡질하고 다니는 게 거지같아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 싶어서? 이곳에 온 사람들이 좋아서? 정말 궁금하다, 나도. 어떻게 하다보니 1년이 지났고 어쩌다보니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됐어. 고작 몇 주 전만 해도 나의 집은 강정이었는데. 학교를 다음 학기에도 다닐지 여전히 미지수지만.

산호 : 작년 한 해를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거의 그랬지. 3월 즈음 와서 떠나지 못했던 케이스. 어디 조직이나 단체에서 온 사람들보다 개인으로 온 경우가 더 많고. 원래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일 년이나 있으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고. 마을과의 관계도 생각해보면 신기한 거. 처음에는 텐트 치고 자거나, 의례회관에서 자거나, 삼촌들 집을 전전하거나 그랬는데, 4월 중순 즈음부터 마을회관 4층을 비워서 숙소를 만들어주셨잖아. 오는 사람들 중에 채식주의자가 많아서, 삼촌이 밥 해주시는데, 채식을 위한 고민도 오가고. 일시적인, 없을 것 같은데 유지되는, 그게 되게 신기한 것 같아.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 있는 시간 하나도 없는 것도. 공동숙소였으니까. 매일 매일 자는 사람이 바뀌는 것도.

그렇게 1년…

가장 쇼킹했던 사건이 있다면??

무밍 : 쇼킹의 정도가 조금 다를 뿐, 여러 날들이 충격적이었다. 작년 강정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수백 명의 경찰이 우릴 가로 막고 서있었던 날이 있었다. 3-4월에는 그런 날들이 많았지만 유독 기억나는 그 날은 비가 내렸었다. 비는 내리고 눈물도 흐르고 나와 똑같은 얼굴 거죽을 뒤집어 쓴 아저씨들은 외치고 밀쳐도 답이 없었다. 아저씨 혹은 오빠 혹은 친구들의 비호 속에서 우리는 갇혀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았고 누구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 춤추면서 웃고 있었다. 왜 우리를 가두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누군가는 웃음으로 대답했고 누군가는 의례 반복되는 명령어만 말했다. 굳게 다문 입술 선은 어느 것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의 눈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경찰과 고착으로 만났을 때 자주 하는 말. 나는 여기 해군기지 건설을 중지하려 왔지, 당신들과 만나려고 온 거 아닌디요!! 그럼에도 여경과의 미묘한 신경전과 힘겨루기와 말싸움은 끝나질 않았고 남경들의 막말과 폭력은 여경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쇼킹한 사건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강정마을의 공사장 사업단 자체가 쇼킹하다. 왜 내가 이러고 있나아아아아아!!!! 그랬다. 무키무키만만수의 노래가 없었다면 아마 고성방가를 했었을 가씀의 한이 싹이 틔기 시작했었다.

여경과의 미묘한 신경전과 힘겨루기와 말싸움 끝에 입막음 당한 M양

여경과의 미묘한 신경전과 힘겨루기와 말싸움 끝에 입막음 당한 M양

산호 : 미친 척 하면서 다가가서는 “오빠, 우리 홍대에서 만날지도 몰라요”라고. 이 날도 그 비오는 날. 비 쭈륵쭈륵 맞으면서. 호러였는데. 근데 남경들이 좀 좋아했던 듯. 사람들도 많이 웃었어.

무밍 : 10월 즈음에는 24시 공사와 야간고착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노래로도 안 돼서, 기댈 수 있는 건 함께 하는 마음들이였고, 그 마음들을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담다가, 나만 보기가 너무 아깝고 아름다워서, 산호 노트북으로 야간고착 틈틈이 영상 만들기를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 때처럼 열심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틀 삼일을 잠들지 않는 눈꺼풀로 무언가를 해보았던 경험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 뿌듯. 그 때 만든 영상으로 강정에서 영광을 얻었지. 무감독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

산호 : 10월 25일이었다. 24시간 공사가 시작한 날. 24시간 경찰 500명이 상주하기 시작했다. 원래 하루 3, 4번 고착 당할 적에도 마음이 힘들다거나 온 몸에 멍이 드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젠 24시간 내내 30분마다 출동한다고 했다. 밤이면 마을회관 1층 회의실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수다를 떠는 게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없어졌다. 씻는 것도 자는 것도 전부 ‘고착과 고착 사이에’ 시간 맞춰 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는 전국대행진이 한 달 동안 진행되고 있어서 있던 사람도 많이 육지에 나가있었다. 경찰은 3교대를 하는데 우리는 사람이 없었다. 잠을 자야하는데 계속 눈이 떠지고, 쉬어야 하는데 현장을 떠나있으면 안 될 것만 같고. 우린 정문팀이 아니였는데도 이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훨씬 힘들었을거야.

무밍 : 아, 갑자기 생각나는. 어버이 연합회 같은 할아버지들의 습격. 4월 즈음 합류하게 되었던 자전거팀에서 매일 서귀포항에 갔다. 화약을 실은 배를 확인하러 아침 6시 즈음에 출발해서 7시 30분이나 8시 도착하여 살펴 본 뒤, 시내에서 홍보 활동도 하고, 1시 즈음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게 주 일정이었다. 어느 날, 서둘러야 해서, 평소와 달리 조금 급한 마음으로 움직였다. 산호가 좀 뒤쳐져서 일행들과 먼저 가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오는 것이었다. 근데 갑자기 뒤에서 트럭에 실려 오고 있었다. 오는 길에 두 번이나 넘어지고 핸드폰은 실종 상태이고. 119를 부르고 기다리는데 잠시 둘러보러 간 길이 화근이었다. 바로 그 근처에서 쉬고 있었던 할아버지 무리가 손짓을 해서 공손히 갔더니 ‘구럼비가 뭐냐’부터 시작해서 갖은 공격이 퍼부어졌다. 막말을 서슴지 않으시던 한 할아버지는 아가씨는 북한에 저 김정은한테 시집이나 가라, 또 한 할배는 내가 지금 총이 있었으면 쏴버렸을꺼라고. 6.25 겪어봤냐… 국가안보…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의 공격들.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게 하는 안주였다.

산호 : 아, 웃으면 안 되는데. ㅋㅋㅋㅋ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 자전거 타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었다. 5월 즈음 생겼던 홍보팀에서 활동했는데,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저씨랑 할아버지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무섭다. 전쟁이 뭔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전쟁 위협에 대비하려고, 정작 자기 나라 국민을 ‘종북좌파 빨갱이’로 매도하고 선동하는 건, 전쟁이 아닌가? 옷이 벗겨지고 머리가 뜯기고 그런 일이 ‘우연히’라는 이름으로 예상 가능하게 일어날 때면, 누군가 연행되고 새벽에 응급차가 2, 3번 오가면, 나 자체가 한계에 부딪치면서 눈이 뒤집히기도 했다. 뜯겨진 머리카락을 쥐고 우는데 “더럽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숨이 막힌다는데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땅에 떨어져서 뒹굴고 있는데 “생쇼하네”라고. 속옷이 벗겨진 걸 추스르려는데 마치 정육점 고기처럼 당연하게 내려다보는 남경들의 시선이, 1시간 혹은 30분마다, 많게는 하루 15번씩 반복됐다. 10분 정도 고착되고, 고착이 끝나면 몸을 일으키고 벗겨진 신발을 줍고 옆 사람을 다독이고 담배 하나를 피우고 화장실을 가고 나면, 다시 무한반복되는 고착과 고착 해제. 하루가 그 다음날이 되도 끝나지 않고, 같은 하루를 계속 되감기해서 재생하는 것처럼. 고착 끝나고 무밍한테 그런 말 한 적 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길에 엎어져서 바둥거리고 있으니까 벌레로 보이나? 아니면 사실 우리가 벌레인가? 웃기지만 어떨 때는 욱해서, 정말 내가 벌레인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내가 이런데, 고작 1년이었는데, 6년이란 시간 동안 그 칼날 위를 걸었던 사람들은? 총만 없었을 뿐이지, 이거 전쟁 아닌가?

무밍 : 기억나는 여경 언니들의 이름. 현옥 유리 등. (이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쾌거였다) “현옥 언니, 제가 지금은 이렇게 언니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아니에요. 사실은 언니랑 같이 함께하고 싶어요. 우리 같이 해군기지 건설 막읍시다. 배웠잖아요, 알잖아요, 이 해군기지 다 개구라라는거. 경찰 그만두고 같이 싸웁시다.” 아, 그 언니 이름 辛현옥 이었다. (저 한자는 나의 임의) 좀 미안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준 것 같아서.

산호 : 미안한 것보다도, 나는 진짜 그들을 대하는 게 힘들었던 듯. 내가 자꾸 말을 걸고 내심 기대를 해서. 사람이지만, 아니, 사람이라서, 뭐든, 조직원리로 움직인다는 걸 열심히 암기했는데도, 그래도 멍청하게 계속 ‘만난다’는 자체만으로 끊임없이 대책없이 믿음이 꼬꾸라쳤어. 끈질긴 건 나나 그들보다도 ‘만난다’는 게 아닐까, 언제나 좋지만은 않지만 그대로 나쁘지도 않은 거. 내가 못 움직이게,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뒤에서 꽈아악 나를 쥐어짜고 있던 어떤 여경의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경찰 수백 명이 몰려와서 하는 일? 24시간 공사장으로 들어가는 레미콘을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새벽 2, 3시에도 레미콘 1대 들여보내기 위해 수백 명이 출동했다. 바다에 들이붓는 시멘트 덩어리, 검증하고 들여보내자는 얘기를 하기 위해, 밤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말고 더한 사람들. 공식적으로는 정문팀. 속칭 오미자. 자칭 모질이. 그런 사람들이 미안하게, 도리어 나를 위로하고 일으키고 그랬다. 공사장으로 들어간 인부들과 레미콘. 그 풍경 뒤를 천천히 둘러보면, 내가 너무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외딴 섬처럼 따로 따로 서있다. 다도해? 다들 노란 덩어리 채로 사라지는 경찰들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어. 그게 슬펐어.

무밍 : 산호가 말했듯이 고착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외로운 섬으로 있다. 그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경찰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유유히 사라지지만 우리는? 우리들은 널부러져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착 끝나면 툭툭 털고 바로 영상이나 사진 정리 하러 천막으로 가거나 땔감을 주워 나르거나 웃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여경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했을 때면 사과를 요구하러 경찰들 버스 주차장까지 갔고(당연히 경찰은 무시), 그 앞에서 꽹과리 치고 소리 지르고 버스 두들기는 등의 정신적 피해를 주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악착같이 그 여경들 이름 알아내서 부르고(이름표를 가렸기 때문에 가슴팍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 이상 보기가 쉽지 않음) 프린트해서 뽑고 항의하고 펜스에 보란 듯이 쓰는 등의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잔머리만 가득한 새치가 가득한 평화활동가…인 것일까 나는…. (이 글을 보고 경찰들이 고소하려나.)

산호 : 평화. 작년에 그 말을 하도 많이 써서 뭔가 대출받은 느낌이야. 근데 정말 정신없었다. 우리 때문에 더 정신없었을 듯. 정문클럽이라고, 앰프에서 클럽음악 틀고, 밤새 춤추고 놀면서 고착되고. 우울하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던 듯. 그런데 또 경찰이 출동하고. 강정교 다리를 가득 노란 노란 경찰들이 밀려들어오면 시계 초침 움직이듯이, 무슨 똑딱인형처럼, 다시 정문 앞에 앉아서 5분 후에는 도로 바닥에 떨어져있었어. 그러면 어떤 날에는,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들을 다 풀지 못하고 한참 길바닥에 누워서 울기만 했어. 누가 듣건 말건, 보건 말건 상관없이, 무작정 슬프고 아프고 주체할 수 없어서. 사실 이게 다른 사람이 그러면 참 난감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부축하기도 뭐하고. 근데 누구든 한 번씩 이런 순간이 있었어. 쌓였던 무언가를 표출하는 시기와 방법이 조금씩 달랐지만. 근데 그걸 보는 사람들이 무안 주는 게 아니라 믿어주니까. ‘지칠 때가 되면, 지가 우는 게 힘들면’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웃고 싶지 않은데 웃기는 일이 또 생겨서 다시 정신없이 웃다가 또 울다가. 이게, 지금 이 순간도 거기에 반복되고 있는 일이죠.





구럼비 바위가 부서졌을 때…

산호 : 약간은 지겨울 정도로 그 이름을 들었다. 추억, 그리움, 슬픔, 그 이름과 관련된 옛날 이야기들. 참고로 나는 구럼비를 본 적이 없다. 근데 우리 강아지 이름도 구럼비다. 밥을 먹는데, 구럼비가 발파된다는 문자를 보더니만, 밥을 먹으면서 우는 사람, 본 적이 있나? 너무 미안하다는데, 실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위다. 이게 이해가 되나? 상상해보면 조금 기괴하잖아? 근데 실제로는 음… 그냥 가만히 쳐다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들, 내 몸의 살들, 어디에서 왔지? 같은 것들을. 강정에 처음 갔을 때 신기했던 게, 물 어딨냐고 하는데, 강정은 물이 좋은 마을이라면서, 그냥 수돗물을 먹으라고 했던 거. 우리가 먹는 물하고 씻는 물하고 식물들에게 주는 물이 전부 같은 거였어. 제주도 서귀포시의 식수원 70%가 강정에서 나오는 물이다. 물 강, 물 정, 물의 마을, 강정.

무밍 : 그 날이 사실은 내 생일이다. 그리고 서울에 있었다. 우울했다. 구럼비라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켜야 할 무언가가 또 이렇게 어이없이 부서져 가는구나. 지키지도 못하는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무력감. 많은 이들이 아파했던 것처럼 나도 아팠다. 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산호 : 그 당시 바다 속에 있었던 친구 얘기가 기억난다. 폭파는 저 멀리서 했는데, 바다 안에 있던 자기 몸에도 그 타격이 느껴졌다고 했다. 자기 배에도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당연하다. 폭파를 했으니까. 근데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좀 놀랐다. 아, 바다 전체라는 게 있구나. 바다 전체가 울렸다니 정말 엄청난 거구나. 그게 무슨 일이든, 찬성과 반대를 넘어서, 굉장히 신중해야 되는 일이겠구나.

* 강정마을에는 S.O.S라는 해상팀이 있다. save our sea. 매주 수요일, 물의 날에 가면 카약 타고 해상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일명 물귀신도 뵐 수 있다. 물에서 나와 퍼레이드를 하기도 한다. 예쁜 피켓 만들어주면 신뢰를 받을 수 있다?

2012년 6월. 바다를 보러 들어갔을 때의 사진. 강정 바다.

2012년 6월. 바다를 보러 들어갔을 때의 사진. 강정 바다.

법적인 분쟁에는 왜, why

휘말리게 되었나

무밍 : 나는 법적인 분쟁이 아직은 없다. 출석요구서를 받아서 경찰청에 가서 조사를 받아보긴 했지만 그 이후로 기소는 되고 있지 않다. 그 즈음에 꽁꽁 싸매고 다녀서인가? 심히 튀는 행동을 많이 하긴 했는데 기소가 되지 않는 걸 보니 내 작전이 나름 통한건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강정에서 다른 이들이 맞은 벌금은 나의 벌금과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평탄하게(?) 해결되기까지는 나도 벌금 맞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산호 : 휘말릴 줄 몰랐다. 법적인 분쟁에 대해서는 미리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이전에 이런 경험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어쨌든 3월 27일에 재판하러 내려가는데, ‘공동주거침입죄’라고 한다. 해군기지사업단정문을 지키는 용역들이 촛불문화제 무대설치를 막기 위해 사람들을 막아섰던 날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바다를 보기 위해 용역들이 자리를 비운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죄목처럼 공동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공소장 내용에 나왔듯이 대문의 핀을 뽑고 용역을 밀친 것도 아니었고, 바다를 향해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가 10분 정도 만에 나왔다. 이걸로 재판하게 될 줄은 당연히 몰랐다. 딱지 2만원 나온대서 인적사항 쓰고 나왔더니 기소됐다. 이 재판의 벌금이 200만원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던데, 아니 그럼 100배? 나가라고 해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서 3시간 30분 동안 강제로 감금해놓은. 그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내가 고소를 해야 되는 게 아닌가? 근데 이런 일이 강정에는 허다하다.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재판을 받는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 강정을 떠난 사람들도 재판 때문에(덕분에) 다시 돌아온다. 요즘 전국을 돌며 벌금후원을 위한 포장마차를 하시는 가미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해군기지 찬반을 떠나 현재 강정과 관련한 판결은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옆에서 사진만 찍었는데도 400만원의 벌금이 나온다. 또 가미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다. ‘몇 톤 트럭이 들어오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아요. 막는 척 하는거에요. 우리는 살아있다고.’ 우리는 엄청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든 적도 없고, 테러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무기를 들고 테러를 하는 것은 경찰 공권력을 앞세운 해군과 정부라고 해야 맞다. 이십대 정도 되는 친구들 5명 정도가 서로 손을 잡고 있을 뿐이고 대화하자고 하는데 경찰 500명이 출동한다. ‘도로교통위반법’을 30분마다 처벌을 하고 있다. 법 위반을 할지도 모르니까, 라는 이유로 CCTV로 24시간 찍는다. 그것도 건너편 풍림리조트 비상구계단에서 몰래.

후회되는 일?

산호 : 없는데. 이런 것도 후회인가? 24시간 공사 시작되던 주에, 버려진 고아 마냥 운 거. 경찰이 내 부모도 믿었던 친구도 아닌데, 그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는 게 뭔가 많이 슬펐다. 정보과 형사가 사과하러 왔을 때, 스타킹 벗어서 던진 거? 그거 때문에 출석요구서 더 많이 오는 것 같다. 억울하다. 울기밖에 안했는데!

무밍 : 후회는 없다. 아쉬움은 있다. 아 그 때 더 세게 나갈걸, 그 때 아예 레미콘 밑에 들어갈 걸, 더 난리부루스를 칠 걸, 더 미친 척 할 걸 등의 잡다한 아쉬움. 많은 걸 하려고 했었다. 많은 걸 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느낌은 뭘까. 삼촌들하고 조금 더 얘기를 나눠 볼걸. 사람들의 얘기에 좀 더 귀 기울여 볼걸. 계획된 시간이 하나도 없었기에 순간순간에 맞닥뜨려진 상황으로 그저 나아가기만 했었다. 아쉽다. 그 때 마늘밭을 가로질러서 구럼비로 달려갔었다면?(경찰한테 바로 제지당했겠지.)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사실 어느 정도의 목마름은 채워졌지만 서울에 오니 갈증이 난다. 내가 있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게 무한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갑갑해져 온다. 그러나 여전히 웃고 떠들면서 강정 얘기를 하고 강정을 위해서 뭔가를 꼼지락 거리고 고민하고 있다.

강정스타일!

산호 : 태풍 오던 날에 만들어졌다. 강정의 유명한 ‘둥글’ 감독님께서 태풍 오는데 춤추러 오라고 해서 나는 그냥 더 잤다. 그러다가 강정스타일이 대박이 나서, 나중에는 추라고 하면 추고… 홍대에서 플래시몹을 하기도 했다. 강정스타일을 이대로 묻히게 할 수 없다면서. 야간 고착 때도 춘 기억이 난다. 밤이면 경찰 쪽에서 큰 조명차를 대동해 강정교 부근부터 대낮(까지는 아니고)과 같이 불을 밝히는데, 마치 스포트라이트 같았다! 경찰들이 워낙 많아서 다 팬/관객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사가 좋다. 뛰는 경찰, 그 위에 해군, 뛰는 해군, 그 위에 삼성, 베이베 베이베~

무밍 : 다재다능한 여인들의 손끝에서 뚝딱 뚝딱 만들어졌다. 샘, 조앤, 딸기. 그녀들이 안무를 만들고 가사를 개사하고 뮤직비디오의 대략적인 스토리까지 생각해 놓았는데 어느 순간 박둥글 감독이 찍는다고 하더니 바로 그 다음날 녹음을 하고 뮤직비디오까지 후딱 찍어버렸다. 박감독의 속도란!!!!! 아무튼 그 당일 태풍 전날, 아니 태풍이 오는 날 아침이였나? 아니 이 무슨 이런 날씨에!! 모두가 경악을 하고 박감독의 스타일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녹음도 뮤직비디오도 무사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마쳤었다. 그 뮤비로 일약 배우의 위치로 자리매김까지 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이 자리를 빌어 강정스타일을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 둥글이 : 학창시절부터 전단지 제작과 배포에 뛰어남을 보임. 세계 환경에 대한 위험을 채식과 관련해서 전단지를 제작했고 전국의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끝없는 노숙 중, 곳곳의 투쟁지를 거쳐 현재 강정마을 거주 중. 견과류와 헌지폐를 좋아함. 주로 강정마을의 중덕이와 식사함. (현재 감옥에 있다. http://cafe.daum.net/peacekj/JWOn/470 클릭하면 매력적인 그의 글을 볼 수 있음.)

현재 강정마을에 대한 것이 거의 이슈화되고 있지 못하다.

이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

산호 :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건 고권일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님께 물어보면…나오나?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하면 SKY, 쌍용, 강정, 용산은 많이 알려진 편이다. 여기도 힘든데 다른 곳은 더 힘들겠지, 세계 곳곳에 아직 내가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있다. 사람들을 만나서 강정에 대해서 얘기하다보면 느끼는데,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오히려 벽을 만든다. 이미 다 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고, 아니면 이미 카테고리가 정해져 있어서 자기 언어로 재조합해서만 이해한다. 그 안에서 이미 자기 경계가 분명해서 그 다음 얘기는 다 먹힌다. 불투명한 말이지만, 어딘가 나에게 주어진 몫이 있고 그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몫이라면, 그냥 그걸 그거대로 시도하는 거? 라고 말하지만, 제대로 하는 게 없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이 내가 강정을 만나 다행이다. 도움을 받은 건 사실 내 쪽이었다. 만약 강정에 가지 않았다면, 안 그래도 어려운 문제들을 더 어렵게 생각하고 혼자 썩혔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강정이 있고, 앞으로 더 많은 강정이 생길 것이다. 꼭 강정만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 도움이 지대하게 필요하고, 당신과 같이 하고 싶다. 그런 걸 제안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만들려고 한다. 하나둘, 생기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낫겠지. 아마 해야될 건 무수히 많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4월 6일에 올 당신님을 기다리는 거? 아, 4월 8일에도 북콘서트가 있다!

무밍 : 그러니까 일단은 좀 찾아보고 관심을 가져야겠다. (교과서적인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혼자보다는 같이 하는 게 재밌다. 재미없으면 계속 하지 못한다. 단기적인 짧은 관심은 기억으로 사라져 버린다. 부디 잊지 말고 기억해서 틈틈이, 토익 단어를 외우는 거 말고, 어떻게 상황이 변해가는지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제주도 여행 가면, 놀면서 살짝 강정에 꼭 들려 봤으면 좋겠고…. 두서없고 마음만 앞서는 행동인 것 같다. 그렇다. 두서없이 논리 없이 미끄러지듯 강정에 빠져버렸다. 이건 사랑일까? 그냥 강정은 내 고향이다. 외지것 아니고 육지것 아니고 종북좌파 빨갱이 뭔지 모르겠고. 말도 안 되는 걸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죄인이 되는 거 말이 안 되지 않나?

읽는 이에게

바라는 점

무밍 : 위에 썼던 것과 비슷한 것이겠는데 같이 하자! 허술하다 우리는 매우. 적들은! 언론으로 무장하고 정치를 방패 삼아서 쉼없이 고소하고 공사하고 있는데 우리는 방어하기 바쁘다. 맞서기에 바쁘다. 전복시켜 버려야 되는데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그 옆에서 대놓고는 아니고 그러나 은근히 신경쓰이고 짜증나게 깔짝 깔짝 끝없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 끝없이 골탕 먹이고 끝없이 물 멕이고 끝없이 웃어 재껴버릴거다. 시작은 미약하니 끝도 미약할지라도! 미약한 힘들이 모이면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우리 엄마도 무시한다 너 하나 그렇게 반대한다고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고 니 앞가림이나 하라고. 아무튼 무시를 당하려 해도 뭔가 하고 좀 무시를 당해야 겠다 싶어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이렇게 어설픈데도, 괜찮다,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러면 연락을 주시면 된다!!!! psgangjeong@hanail.net 그리고 은근슬쩍 우리를 보고 싶다면 4월6일 대한문 벼룩시장으로 오면 된다. 맘에 들면 말 걸어주시고, 아니면 그냥 물건만 사고 가도 되고.

(격려의 간식은 우유와 계란도 들어가지 않는 비건용이였으면…♡)

산호 : 곧 봬요!

응답 6개

  1. 슈트말하길

    아. 크리스마스 이브 거리 미사에 참가했는데요.
    저는 기도 할 때 조금 화가났거든요. 아버지 우릴 구원하소서.하는데
    이제 신 밖에 기댈 때가 없구나 날씨는 또 왜이리 춥냐 서글펐습니다.
    그래서 산호 무밍님의 글이 신나고 뭉클하고 해서 기쁩니다.
    특히 신현옥,유리라는 사람과의 만남 부분은 계속 읽게 되네요.
    그냥 두서없이 논리없이, 미끄러진다. 에이 귤 한번 샀으니까. 미사도 한번 가고 플래시몹도 한번 참가하고 그 정도 했음 된다며 연대도 계산할 버릇 하는 나 ㅡㅡ
    강정 목걸이 25000이라서 아 좀 비싼데..하고 안산 제가 부끄러워지는 글입니다.
    벼룩시장 갈께요ㅜ.ㅜ

  2. 말하길

    제주 바닷가에 또 한 무더기의 젊음과 한이 쌓여가네요.

  3. 보라말하길

    아아 너무 뜨거운 시간들. 울다가 웃다가. 종종 만나요-.

  4. 욱꽃말하길

    무밍, 산호.. 너희들을 알게 되어서 무척 행복하다. 알지?

  5. 고추장말하길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본 듯해요. 뭉클하네요. 벼룩시장 갈게요.

  6. 박카스말하길

    ‘강정스타일’ 그 명작을 만드셨던 분들이군요! 대한문 벼룩시장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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