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팀 버튼을 옹호하며

- 조지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팀 버튼 특별전”이 매주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근래에 나온 팀 버튼의 영화들이 예전과 달리 흥행에서 실패한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사람들의 열광이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팀 버튼이라는 영화감독이, 좀 마이너한 성향이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른바 “예술영화”보다는 “대중영화” 쪽으로 분류되고 있는 그가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가 영화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스케치나 디자인을 한 작업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소품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전시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감독 특별전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특별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팀 버튼에게는 일관된 세계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초기작인 《비틀쥬스》에서도, 《가위손》에서도, 《크리스마스의 악몽》에서도, 《유령신부》에서도, 비교적 최근작품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약발이 떨어졌다, 혹은 너무나 비슷한 작품을 만든다는 비판과는 무관하게 팀 버튼은 계속해서 자기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작품이 아니라 자기 세계의 이미지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지금의 특별전이 열리기 전에, 2000년대 중후반에 들어 팀 버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한 것은 그의 “약발 떨어진”작품만큼이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와의 비교와에 있었다. 놀란은 2005년부터 《배트맨 비긴즈》로 시작하여, 2008년 《다크나이트》로 정점을 찍고, 2012년에 《다크나이트 라이즈》로 끝을 맺으며, 헐리우드 식의 히어로물 영화에 한 획을 그었다. 흥행과 비평 양자에서 큰 성공을 거둔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는 여러모로 9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던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시리즈 2편을 기점으로 완전히 자기 방식대로 배트맨을 해석해냈던 두 감독의 행보가 판이했기 때문이다. 놀란은 성공했고, 팀 버튼은 참패했다. 흥행만이 아니라 비평에서도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팀 버튼은 그만 배트맨 시리즈에서 하차하게 된다.
놀란의 배트맨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팀 버튼 한 지면에서 이런 말을 남겼었다. 20년 전의 나의 배트맨은 어둡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는데, 지금의 배트맨은 어둡다는 이유로 환호 받고 있다고. 이 말에 덧붙여서 한 비평가는 사회적으로 이유를 설명한다. 팀 버튼의 시기는 미국이 최고의 경제성장기를 누렸던 때여서 어두운 영화가 먹히지 않았던 것이고, 놀란의 시기는 금융시장의 파산, 월가점거 등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두운 영화가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평적인 측면에서 놀란의 배트맨은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나 선악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반면, 팀 버튼의 배트맨은 상투적인 헐리우드 영화와 같은 선악 이분법에 빠져있지는 않지만, 그 문제를 더욱 성찰한다기보다 어두운 스타일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한계를 보인다고 첨언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상투적인 문구가 형성된다. 깊이 있는 놀란의 배트맨과 동화 같은 팀 버튼의 배트맨(이 문구에는 동화와 깊이는 대립된다는 놀라운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아마도 놀란의 배트맨에게서 깊이가 발견된다면, 바로 선악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조커를 통해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조커는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인 하비 덴트와, 밤의 수호자 배트맨, 그리고 마피아 패거리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그들을 미리 계획하는 자, 질서를 만드는 자로 분류한다. 조카가 보기에 이런 질서를 만드는 자들은 한통속이다. 거기에서 누구는 선이고 누구는 악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자의적인 분류일 뿐이다. 그래서 조커는 그들 모두를 교란시킨다. 질서를 세우는 자에 반대편에서 혼돈을 일으키는 자로서, 고담시의 모두를 교란시킨다.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장면 중에 하나는 바로 조커가 거두어들인 돈을 불태우고, 자신과 동업했던 마피아를 쏴 죽이는 장면일 것이다. 조커에게는 마피아라는 배후 세력도 없고, 돈이라는 목적도 없다. 혼돈 그 자체, 순수한 악 그 자체로 드러난다. Why so serious?라는 조커의 질문에는 전율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런 세계야말로 비현실적인 것(부정적인 의미에서 동화적인!)이 아닐까? 초인적인 배트맨 만큼이나 조커는 압도적이다. 너무나도 쉽게 사회의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물론 결국에는 조커가 잡히긴 하지만, 적어도 조커가 활보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마피아들도 그의 밥이다. 놀란의 세계에서 진정한 악당은 사회적 배치를 넘어서서 존재하고, 심지어는 그 배치의 판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졌다. 악당이 사회 속에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넘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조커만이 아니라, 1편의 악당인 듀커드나 3편의 악당인 베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의 사회인 고담시는 악당들에 의해서 존립을 위협받거나 배트맨에 의해서 구원되어질 수 있는, 아이들의 장난감 성 같은 곳에 불과하다.
이것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팀 버튼의 배트맨이야 말로 현실적이다. 1편의 조커는 특이하기는 했지만 결국 마피아 패거리의 두목에 불과하고, 2편의 악당인 팽귄맨은 사업가 맥스 슈렉에 의해서 이용당할 뿐이다. 팀 버튼이 그려내는 악당은 사회를 위협하고 질서의 근간을 질문하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만의 기괴한 스타일을 갖고 있는 범죄자에 불과하다. 범죄자일 뿐인데, 광인이고 괴물이라는 스타일 때문에 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센세이션이라는 것이 사회에 근간을 뒤집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팀 버튼은 영화를 통해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상상해내는 세계가 물리적 세계, 이른바 진실된 세계라는 잣대에 비교해서 허위로서 무가치한 것이 아님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상적 세계가 물리적 세계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졌다고 순진하게 믿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벽을 잘 알고 있었다.
놀란의 세계에서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장면은 김박감 있고 절박하다. 그들은 사실적으로 싸운다. 반면에 팀 배튼의 세계에서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은 마치 연극과 같다. 느릿느릿하고, 비현실적이다. 팽귄맨과 그의 패거리인 붉은 서커스단이 등장하는 장면은 더 가관이다. 도대체가 싸우는 장면인지, 카니발의 한 복판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화면은 배트맨과 팽귄맨의 대결에서 오는 긴장감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비현실적인 동화 같은 질감으로 채워진다. 눈으로 덮여있는 하수구에서 노란 오리보트를 타고 있는 팽귄맨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기는 힘들다. 현실적이지 않다고, 어떻게 악당이 저렇게 유치할 수 있냐고 외면하거나, 아니면 그 기괴하고도 환상적인 이미지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팀 버튼을 좋아했던 것은 바로 그 이미지로부터의 매혹일 것이다. 팀 버튼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서 성찰할 것을 질문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로 초대한다. 영화감독으로서 갈수록 힘을 잃고 있는 팀 버튼이 전시회로 부활하고 있다는 것은, 비단 틈새시장을 노린 자본의 마케팅 효과(마치 작년에 열풍을 불었던 90년대 문화처럼)의 결과만이 아니라, 아직도 팀 버튼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의 영화는 별로일 수 있지만,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아직도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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