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저항폭력에 마주하기, 모르는 운동에 연대하기.

- 들깨

또, 하나의 유령이 이번 여행을 따라왔다. 인도의 야간열차에서였다. 인도 동부의 오디샤에서 가장 가난한 주인 비하르의 보드가야로 가는 기차였다. 활짝 열려 있는 침대칸의 창 밖이 깜깜해졌을 때 갑자기 장총을 든 경찰들이 소란스럽게 올라탔다. 강도라도 들었나 했다. 옆의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낙살라이트 구역을 지나는 중인데 이들이 간혹 기차를 습격하기도 해서란다. 문득 창밖의 암흑 속에서 쇠창살 같은게 철크덩! 날아와 걸리고 우당탕 총소리가 나며 기차가 멎는 서부영화가 상상됐다. 긴장 됐다. 스릴이라고 쓰기엔 그 느낌은 자못 현실적이었다. 창문을 닫았다. 총을 내리자고 주장했던 병역거부 활동가가 장총을 든 경찰들 덕에 안심이 됐다. 그렇게 마오이즘이라는 어떤 유령과 조우했다.

문제의 그 기차에서 찍은 오디샤주의 풍경. 오디샤주와 비하르 주 모두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꼽히고 있다. 오디샤 주는 철광석과 보크싸이트등의 지하광물이 풍부한 곳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여러 대형 기업들과  주민들, 시민단체들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러해동안 환경파괴와 인권침해로 세계적인 이슈가 됐던 베단타 철강 건도 오리싸주에서 벌어졌다. 비하르주는 낙살라이트의 주요 활동지역이며 오리싸주 일부도 낙살라이트 영향하에 있다.

문제의 그 기차에서 찍은 오디샤주의 풍경. 오디샤주와 비하르 주 모두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꼽히고 있다. 오디샤 주는 철광석과 보크싸이트등의 지하광물이 풍부한 곳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여러 대형 기업들과 주민들, 시민단체들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러해동안 환경파괴와 인권침해로 세계적인 이슈가 됐던 베단타 철강 건도 오리싸주에서 벌어졌다. 비하르주는 낙살라이트의 주요 활동지역이며 오리싸주 일부도 낙살라이트 영향하에 있다.

낙살라이트는 인도 정부에게 가장 위협적인 반정부세력인 마오이스트 무장세력을 이르는 말이다. 시작은 60년대의 농민반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세월과 탄압 속에서도 여전히 인도의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다. “인도 시골지역의 피 흘리는 상처에서 태어난 정치적 활동의 부활”라 불리는 이들은 무장투쟁을 통한 권력 쟁취를 추구하며 인도 정부와 내전 수준의 갈등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이들을 떠받치는 것은 예의 그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농촌의 어떤 계급 – 비단 맑스적 의미에서만이 아닌 문자그대로의 신분적 계급;카스트 – 들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으로 권력 쟁취를 추구하는 마오이스트 공산당도 있다.

인도의 대표적인 공산당 합법 주인 웨스트벵갈 주의 주도 꼴까따. 거기서 내가 묵었던 숙소인 패러곤 호텔. 허름한 대문위로 적색기와 빨간 노동조합플랑이 걸려있다.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꼴까따에서 적색혁명기는 곳곳에 걸려있고 정말 다양한 별별 노조들의 플랑을 볼 수 있다. 이 숙소는 여행자들에게 꽤 유명한데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빈대의 출몰과 함께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낡은 시설로 유명하다. 꼴까따의 숙소는 대부분 이런데 공산당의 정책으로 건물의 개보수가 쉽지 않아 유난히 더 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웨스트 벵갈주는 낙살라이트의 주요 활동지역들인 비하르와 오디샤 사이에 위치한다.

인도의 대표적인 공산당 합법 주인 웨스트벵갈 주의 주도 꼴까따. 거기서 내가 묵었던 숙소인 패러곤 호텔. 허름한 대문위로 적색기와 빨간 노동조합플랑이 걸려있다.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꼴까따에서 적색혁명기는 곳곳에 걸려있고 정말 다양한 별별 노조들의 플랑을 볼 수 있다. 이 숙소는 여행자들에게 꽤 유명한데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빈대의 출몰과 함께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낡은 시설로 유명하다. 꼴까따의 숙소는 대부분 이런데 공산당의 정책으로 건물의 개보수가 쉽지 않아 유난히 더 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웨스트 벵갈주는 낙살라이트의 주요 활동지역들인 비하르와 오디샤 사이에 위치한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 내내 나는 마오를 만났다. 시작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말레이시아에서였다. 고대적부터 동-남 아시아의 길목이었던, 그리고 대항해시대와 식민제국주의의 요충지였던 말라카에서 ”말레이시아 독립 기념관”에 우연히 갔었다. 무료입장인데 에어컨이 나온다는 이유로 쉬러 들어간 2층짜리 작은 집에는 믈라카의 역사와 영국의 해협식민지 시절, 그리고 말레이 연방의 독립이 전시돼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은 1957년, 하지만 지금의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의 탄생은 독립으로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시뻘겋게 피가 튀긴 참혹한 모습으로 장식(?)된 공간엔 1948년부터 60년까지 지속됐던 ‘긴급사태’(Malayan emergency)가 전시돼 있었다. 사실상 내전사태였던 말레이시아 공산당과의 치열한 대립, 그리고 공산당 척결이라는 과정과 동반된 독립, 혹은 국가 수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말레이시아의 국가 정통성도 ‘반공’과 깊은 연관이 맺어져 있었다. 독립이후인 60년에야 종결된 이 긴급사태는 선주민인 말레이인을 비롯해 인도인, 중국화인 등으로 구성된 말레이시아의 종족갈등과 관련이 있다. 영국 식민세력은 화인들을 우대하고 장려했지만 40년대의 일본 점령세력, 그리고 말레이 민족세력은 이들 화인들을 경제·정치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많은 화인들은 중국 본토의 마오이스트‘와 관계를 맺으며 치열하게 투쟁했고 13년만에 장렬하게 박멸됐다. 콸라룸푸르의 높이 솟은 페트로나스 타워,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경제발전, 그리고 여러 민족과 종교의 조화라는 현재모습의 뒷면에는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말레이사아라는 나라와 마오이즘을 연관지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말레이시아 독립기념관의 긴급사태 관련 전시물. 사용되는 단어들은 상당히 거칠었고 시각적으로도 강렬했다. 그만큼 치열했으리라. 이 긴급사태는 사실상 내전수준이었지만 말레이시아에 진출한 영국 기업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말레이시아의 정치상황은 평화롭다. 하지만 여전히 화인들의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언어, 교육, 문화 등을 두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독립기념관의 긴급사태 관련 전시물. 사용되는 단어들은 상당히 거칠었고 시각적으로도 강렬했다. 그만큼 치열했으리라. 이 긴급사태는 사실상 내전수준이었지만 말레이시아에 진출한 영국 기업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말레이시아의 정치상황은 평화롭다. 하지만 여전히 화인들의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언어, 교육, 문화 등을 두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여러 사정 때문에 단 4일밖에 머물지 못했던 태국에서는 마오주의 게릴라가 80년대에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 정도만 언급해두자. 그리고 프랑스로 유학가서 스탈린과 마오의 공산주의를 배워왔던 폴포트의 크메르루즈도 마오주의의 한 극단적인 이상주의였다는 것도 이전 글에 썼던 것 같다. 네팔과 인도의 곳곳에서 접하게 되는 티벳의 난민들과 달라이라마 임시 정부 역시 59년, 마오주석의 중국령 티벳으로부터 탈출해 나왔다. 따지고 보면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마오의 중공 이후 외세로부터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쟁이 한국전쟁이란다. 마오가 신화가 된 배경은 물론 항일무장투쟁이라는 과정이었다. 나만 몰랐지 마오주의라는 틀은 동-남 아시아를 이해하는 중요한 틀이라는 것은 여행에서 배운 여러 소중한 깨달음 중 하나이다.

지금 여행 중인 네팔은 마오주의자들의 가장 성공한 투쟁이라고 불리운다. 2000년대까지 계속됐던 마오주의자들의 무장투쟁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수도함락이라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세력이 되기까지 했다. 이후 마오주의 당은 다른 정당들과 연합해 제헌의회를 구성했다. 물론 제헌의회는 헌법구성에 실패하고 작년에 해산됐다. 지금 네팔의 정치는 혼란스럽다.

네팔에서의 마오이스트. 내가 네팔에 들어간 다음날 가장 인기있는 마오이스트 지도자의 지방(부뜨왈) 연설이 있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루 머물렀는데 적색 혁명기를 들고 소리지르며 오토바이나 버스를 타고 연설장으로 몰려가는 청년들로 북적북적 대는것을 볼 수 있었다.(윗사진) 아래사진은 그 집회에 대한 신문보도이다(kathmandu post 2013.2.23.)제헌의회가 해산된 지금 네팔은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당들간의 다툼이 치열하다. 마오이스트 당들도 서로 다른 노선으로 쪼개져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다.

네팔에서의 마오이스트. 내가 네팔에 들어간 다음날 가장 인기있는 마오이스트 지도자의 지방(부뜨왈) 연설이 있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루 머물렀는데 적색 혁명기를 들고 소리지르며 오토바이나 버스를 타고 연설장으로 몰려가는 청년들로 북적북적 대는것을 볼 수 있었다.(윗사진) 아래사진은 그 집회에 대한 신문보도이다(kathmandu post 2013.2.23.)제헌의회가 해산된 지금 네팔은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당들간의 다툼이 치열하다. 마오이스트 당들도 서로 다른 노선으로 쪼개져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다.

네팔에서의 마오주의가 힘을 잃었다는 여러 평가도 있다. 동의하기엔 섣부르다. 물론 네팔을 여행하면 마오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공산당에 대한 상투적인 혐오와 더불어, 사실 그들은 제대로 된 공산당도 아니며 부패했고 변질된, 껍질만 마오이스트란 얘기들까지. 하지만 여행하며 접할 수 있고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네팔의 상류층이거나 비싼 상점을 소유하고 있는, 혹은 엘리트 대학생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네팔의 시골지역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여전한 지지가 있다. 마오주의 세력의 건강함이나 정당성은 둘째치고 사실상의 대안세력이 부재한 상황도, 즉 내전에 대한 두려움도 이러한 지지를 구성하고 있다. 어차피 네팔의 마오이스트는 왕정의 부패와 폭정을 먹고 자란것이기도 했다.

네팔의 마오주의는 비단 네팔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 중국, 미국 등의 거대한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서 네팔은 인도 동북부의 마오주의 무장세력과의 연관 때문에 인도와 편치 못하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티벳 난민 문제로도 복잡하다. 공산당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갖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짐이 된다. 네팔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티벳 난민들은 마오주의 정권이 중국의 눈치를 볼수록 자신들은 네팔에서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며 내게 토로했었다. 네팔을 둘러싼 국제정치에서 마오주의는 철지난 유령이 아니라 여전히 가장 중요한 틀 중 하나다.

인도의 포스코 프로젝트 지역을 찾았을 때 마오주의에 또 부딪혔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직접 눈으로 가장 둘러보고 싶었던 지역이 오디샤주의 포스코 프로젝트 주였다. 건설 예정지에서 강제 수용 현잘을 살펴보고 주민들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잘 상상이 안가는 현장의 이미지를 살피고 찍어보고 싶었다. (포스코 프로젝트 반대운동은 영화 <아바타>로 곧잘 비교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포스코 프로젝트를 접근하는 것은 현지 주민들의 신비화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오디샤 주의 주도인 부바네스바르를 방문했고 반대 활동가들을 만났다. 현장에 가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부가 ‘낙살라이트’를 핑계로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몇 달전 한 이탈리아 관광객이 납치된 이후로 광범위한 농촌지역에 출입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포스코 프로젝트 지역은 낙살라이트와는 무관한 곳이라고 했고 낙살라이트를 핑계로 많은 것들을 숨기려는 꼼수라 했다.

PPSS의 대변인인 펄샨의 집 벽. 보통 힌두교 신들의 그림이 걸려있는 인도인들의 집과는 달리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진이 벽에 액자로 걸려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나는 당시 며칠 뒤 열리는 힌두 축제에 대해 물었는데 자신은 힌두교도가 아닌 공산주의자라고 그는 대답했었다. 현실적으로 공산당원을 만나기 힘든 내게는 낯설고 새로웠다. 포스코프로젝트의 반대 활동가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점은 한국적인 접근에서는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보수언론에서는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PPSS의 대변인인 펄샨의 집 벽. 보통 힌두교 신들의 그림이 걸려있는 인도인들의 집과는 달리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진이 벽에 액자로 걸려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나는 당시 며칠 뒤 열리는 힌두 축제에 대해 물었는데 자신은 힌두교도가 아닌 공산주의자라고 그는 대답했었다. 현실적으로 공산당원을 만나기 힘든 내게는 낯설고 새로웠다. 포스코프로젝트의 반대 활동가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점은 한국적인 접근에서는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보수언론에서는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내가 만난 이들도 공산주이긴 했다. PPSS(포스코 프로젝트 저항 연합)라는 단체의 대표와 대변인이었던 그들은 ‘비폭력’을 기치로 부족 마을과 연대해 싸움을 해 가는 활동가였다. 내가 처음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내게 찬성이냐 반대냐를 물었는데 나는 ‘반대’라고 하는게 좀 불편했다. 나는 평화활동가이고,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것과 비슷하게 반대에 가깝지 않겠냐고 답했고 그제서야 그는 한국에서 온 작은 연대에 반가워했다. 그리고 강정마을의 최성희 활동가가 보낸 편지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강정과 달리 난 포스코 프로젝트의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들은 정부에 의해 또 스스로에 의해 고립돼 있기도 했다. 나는 무장투쟁 마오이스트와 비폭력 공산주의자들을 구분하며, 또 한편으로는 잘 모르는 투쟁에 연대하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어떤 운동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돌아봐야 했다.

따지고 보면 포스코를 반대하는 평화적 공산주의자들보다 인도 정부와 상층 계급, 자본가에게 대항하는 낙살라이트들이 더 처참한 억압 속에 있을것이다. 억압과 착취가 심할수록 그 저항도 거칠고 폭력적이기 쉽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무장 봉기를, 저항폭력을 대할 때 곤란함을 느낀다. 병역거부를 고민하며 활동해오던 내내 스스로에게 부여한, 또 부여된 평화주의자라는 딱지는 어째야 할까 곤혹스럽다. 총을 내리자고 하는 이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얘기하는 이가 사람의 머리를 잘라 전시하기도 하는 무장세력에게 연대할 수 있을까. 일말의 지지라도 보탤 수 있을까.

아바이 사후. PPSS의 대표이다. 그는 권위적인 느낌의 카리스마형 리더로 느껴졌다. 수배중인 그를 만날 수 있던건 운이 좋아서였다. 그가 설명해준 포스코 반대 프로젝트 운동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와 비슷해 보였다. 현지 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국가와 거주민들의 대립이 컸고 여기에 찬반으로 나뉜 주민들간의 대립이 있었다. 환경이 파괴될 우려와 인도의 자원이 유출될 우려들. 경찰을 동원해 사람들을 몰아내고 활동가들에겐 무차별적인 고소로 벌금을 쌓아가는 방식 등. 최근 강제토지수용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심지어 폭발사고로 네명의 활동가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정보는 제한돼 있다. 옆으로 보이는 분이 대변인인 펄산.

아바이 사후. PPSS의 대표이다. 그는 권위적인 느낌의 카리스마형 리더로 느껴졌다. 수배중인 그를 만날 수 있던건 운이 좋아서였다. 그가 설명해준 포스코 반대 프로젝트 운동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와 비슷해 보였다. 현지 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국가와 거주민들의 대립이 컸고 여기에 찬반으로 나뉜 주민들간의 대립이 있었다. 환경이 파괴될 우려와 인도의 자원이 유출될 우려들. 경찰을 동원해 사람들을 몰아내고 활동가들에겐 무차별적인 고소로 벌금을 쌓아가는 방식 등. 최근 강제토지수용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심지어 폭발사고로 네명의 활동가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정보는 제한돼 있다. 옆으로 보이는 분이 대변인인 펄산.

소위 말하는 ‘당사자’로서 운동을 기획하지 않는 한 운동의 방식에 참여하고 연대하고 지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게다. 강정마을에서도 난 ‘외부세력’으로서 어떻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지, 저항자들의 ‘폭력’을 접할 때 끊임없이 고민스러웠다. 물론 우리는 세계평화의 이해당사자로서, 지구생태의 거주민으로서 모든일에 당사자성을 가질수도 있다. 포스코 프로젝트 반대 투쟁에서도 낙살라이트 운동에서도 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참여자로서, 한국 국적의 기업과 경제정치적으로 연관된 소비자이자 유권자로서, 그 밖의 나름나름의 입장의 당사자로 자칭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확산탄 문제와 비슷하게도 포스코의 주요 투자자중 하나가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온 지구에서 벌어지는 중차대한 일들을 나의 노후와 연결 짓는 성실한 매개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피해자, 현지 주민, 억압받는 농민, 즉 당사자보다 발언권이 밀린다. 지지나 연대, 혹은 참여가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손쉽게 여기서 중립적 방관을 택하곤 한다. 심정적으론 이해가 가지만 뭔가 하긴 곤란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머물기 보다는 찬성이냐 반대냐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왜 그 지경까지 갔는지, 그 일련의 과정에 어떠한 것들이 얽혀있는지, 이런 방식이 아니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현재 상황에서, 앞으로 벌어질 국면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 이 부분들이 내가 서있는 지점에서 내가 쏟을 수 있는 열정을 사용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차단돼 있는 포스코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한국기업 포스코에, 한국 정부에, 한국의 언론에게 끊임없이 알권리를 요구하는 것 등이 지금 꼽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찬성과 반대 말고도, 지지나 연대가 아니고도 우리가 할 일은 많은 것 같다.

마오에 대한 관심도 그래서 생겼다. 그는 갔지만 그의 유령은 여전했다. 가장 착취받고 억압당하는 곳에 그 유령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거기서 계속되는, 엇비슷하게 주고받는 또 다른 폭력들을 본다. 사람들은 그를 계속해서 호명하며 농민, 제국, 계급, 무장, 전위정당 등을 얘기하고 있다. 물론 유령의 미래는 어둡다. 곳곳에서 마오이즘은 산업화와 함께 산속으로 몰려났고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사라져갔다. 덩샤오핑의 시장경제에, 일본과 남한의 기적적 경제 발전에, 태국의 산업화와 말레이시아의 신경제정책에 그는 몰락했다. 이러한 과거는 인도와 네팔의 마오이스트들이 산업화, 개발화와 함께 마주하게 될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고백하건대 나는 마오에 대해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었다. 마오는 내가 자라온 시대에서 너무 낡은 인물이었다. 빨간책이든, 문화혁명이든, ‘진정한 마오이스트’라는 바디우든 그와 그의 사상이 어떤 식으로 기억되고 활용되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마오를 만났고 그의 시선으로 아시아를 여행할 필요를 느꼈다. 한국에 가면 몇몇 책들을 골라놓고 그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 폭력을 단순히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는 것, 그것이 내겐 병역거부를 고민해온 과정이었다.

* 포스코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굳이 쓰지 않았다. 최근 다른 곳에 쓴 글에서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했기에 굳이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가난한 인도에 필요한 개발, 그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http://blog.amnesty.or.kr/7065/)를 비롯한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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