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아들을 위한 뿔피리

- 이상욱

바람소리, 풍경, 쉬거

바람 부는 소리는 들려오고 다른 어떤 배경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떤 배경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그저 바람이 불 때 바람 소리가 날 뿐이다.
텍사스의 풍경 또한 태연하기만 하다. 풍경을 이루는 공기와 날씨는 결코 등장하는 인물의 심경이나 스토리의 박진감에 보조를 맞추는 법 없이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풀들은 잔잔히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풍차 또한 바람에 제 몸을 맡긴다. 그것은 언제나 그래왔듯 밤을 맞고, 또 아침 해를 맞을 뿐이다.

단발머리를 한 사내가 체포된다. 그 특이한 헤어스타일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안관이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그는 망설임 없이 손목을 채운 수갑으로 보안관을 무참히 목 졸라 죽인다. 그러나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에 비친 표정은 스릴러 영화의 여느 싸이코패스 살인마와는 다르다. 그는 결코 살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감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직 탈출하기 위해 보안관을 살해한다.

단발머리만큼이나 쉬거의 ‘무기’는 결코 어디서 그 용법이 연원한 것인지 알기 힘들다. 보통 사람을 살리기 위해 쓰이는 산소통은 결코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구멍을 뚫으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노인들의 몸과 정신에 새겨진 세월의 지혜는 쉬거 앞에선 무력할 뿐이다. 그들은 풍경만큼이나 태연했지만 그 태연함이 딛고 선 지반이란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들은 금세 여유를 잃고 불안에 휩싸인다.(혹은 불안에 휩싸일 겨를도 없이 살해당한다.) 그들의 지혜, 그것이 쌓인 삶이 파괴되고, 몰락하는 것은 딱 동전의 양면이 뒤집히는 것만큼의 무게만을 가질 뿐이다. 여태껏 해결하지 못한 일이 없었던 해결사의 낙관주의도, 약속이 지켜질 것을 믿는 칼라진의 순진함도, 그리고 모스의 ‘강한 의지’마저도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얼마만큼의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무력해진 채로 소멸된다. 동전은 어디에서부터 누구의 손을 거쳐 왔던, 뒤집힐 뿐인 것이다.
코엔 형제가 이미지와 사운드, 서사로 직조해낸 이 위대한 영화는, 그 매체적 속성에 걸맞은 방식으로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해낸다. 그저 들릴 만하기에 들릴 뿐인 바람 소리와 태연한 텍사스의 풍경, 그리고 쉬거는 삼위일체로서 각각 ‘세계’라 불릴만한 것의 양태들로서 작용한다. 영화만이 만들 수 있는 이 유령 같은 캐릭터는 그 고유의 물성들-소리, 이미지, 그것들이 발현하는 어떤 성격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인물-을 통해 선언한다. 세월의 무게가 쌓일만한 장소는, 그것에서 비롯한 지혜와 규칙들이 안착할 만한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고. 즉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아버지의 뿔피리

쉬거를 쫓던 보안관 벨은 마침내 그를 잡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는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깨달은 것이다. ‘유령’ 같은 쉬거는 결코 자신의 지혜와 노련함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쉬거의 앞에선 금세 무력해지는 세월의 무게지만, 그것을 지고 있는 이에겐 내려놓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법. 그는 은퇴한 선배 보안관 엘리스를 찾아가 마지막 희망을 간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엘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옛날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그 시간에 더 많은 것들이 저 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라구. 문에 붕대라도 감아야 할 지경이야.(…)신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무도 모른단다.(…)네가 겪은 것도 새로운 것은 아냐. 이 나라는 늘 사람들이 힘들어. 세월을 막을 순 없어. 그게 허무야.”
쉬거는 다가오는 세월인 것이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과 그것이 발휘하는 지혜와 노련함을 청소하는 세월이 바로 쉬거인 것이다.

은퇴한 벨은 아버지에 관한 꿈을 꾼다. 꿈에서 아버지와 그는 함께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춥고 눈이 쌓인 산 속이었는데 아버지는 벨을 지나쳐 먼저 달려갔다.
“그냥 과거를 타고 가셨던 거지.” 그때 그는 지나쳐 가던 아버지가 가진 뿔피리를 보았다. 그 안에선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마치 달빛과 같은 색깔이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가지고 어둡고 추운 곳에 먼저 가 불을 피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거기 갈 때마다(…) 거기 계셨어.”

아들을 위한 뿔피리

과거를 탄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을 위해 어둡고 추운 곳에 먼저 가 계셨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보다 쉬거와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세계를 먼저 만나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쉬거와 세계를 만날 때마다 무력해지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쉬거는 언제나 아버지를 과거에서 끌어냈을 것이다. 아버지의 발이 되었던 과거라는 세월의 무게는 쉬거 앞에서 금세 사그라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뿔피리는 결코 바람 소리의 틈을 비집고 배경음을 울려 퍼지게 하지도, 텍사스의 태연한 풍경에 불을 밝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뿔피리는 그저 그렇게 단 한 번의 쉬거와의 마주침으로 사그라지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거기 갈 때마다 아버지는 거기 계셨어.”
아버지도 쉬거처럼 ‘유령’같이 다시 거기 계실 것이다. 과거를 타고, 불을 밝히는 뿔피리를 들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사 카슨 웰즈의 낙관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쉬거는 매번 아버지의 이마에 바람구멍을 낼 것이다. 아버지는 다만 매번 에우리디케의 손을 놓치는 오르페우스처럼 언제나 그곳에 다시 가 계실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을 위한 뿔피리가 울려 퍼지고, 빛을 밝히는 일은 가능할까? 어둡고 추운 쉬거의 몸에 아버지가 불을 당기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벨의 말처럼,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버지는 우리가 그곳에 갈 때면 언제나 그곳에 다시 계실 것이고, 뿔피리 또한 그럴 것이란 것이다. 세계의 양태는 바람 소리, 풍경, 쉬거 뿐이 아니다. 그것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뿔피리로 완성되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노인은 그곳에 다시 방문할 것이다.

응답 4개

  1. 별유말하길

    영화를 본지 오래됐는데 읽어보니 영화내용이 다시한번 정리가 되네요~다시 한번 영화 보고 싶어졌어요. ^^ 웃음웃음만족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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