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6. 행복의 주관성과 상대성 그리고 객관성과 절대성

하버지, 어떤 사람은 사과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오렌지를 좋아하잖아. 그래서? 사람마다 욕구가 다르면 추구하는 만족이 다르고 만족이 다르면 그에 따른 행복도 다르게 마련이잖아? 다르지. 그래서? 만약에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라면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다름을 추구하여 행복하도록 서로 격려해야 좋지 않을까. 그렇고말고. 그 다름이 이전보다 더 좋은 거라면 계속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한 생명이 가진 가능성을 실현하여 행복해지는 길일 거야. 그러다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다름을 추구하여 만족한 결과가 진화일 거고.

생명체는 친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지만 낯 설은 것, 자기와 다른데다가 힘까지 가진 것에는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넘어서 자기 존재를 위협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 본능적인 반사일 거야. 그런데도 너는 다름, 차이를 환영하고 격려하자는구나. 다름을 환영하고 추구하고 격려할 수 있는 용기와 너그러움이 보다 새로움을 찾아서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만족으로 너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아, 내 말은 추구하는 대상이 이전 것보다 나은 것이든 못한 것이든 그리고 남에게 유익을 주든 피해를 주든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야. 그리고 추구하던 것을 얻거나 이루었을 때의 만족한 느낌도 다르고. 그러니까 행복은 주관적인 거라는 거야. 그렇지, 만약에 행복이 주관적이지 않다면 누구에게나 자기의 행복이 아니지.

그럼 하버지, 행복에 주관성 말고 또 다른 특성이 있을까? 상대성이 있어. 누구에게나 생명의 가능성을 증진시키는 상태는 유쾌하고 만족하고 행복한 느낌으로 나타날 거야. 반대로 생명의 가능성을 감쇄시키는 상태는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불행한 느낌으로 나타날 거고. 양수와 음수의 크기가 상대적이듯이 유쾌와 불쾌, 만족과 불만족, 행복과 불행의 크기도 상대적일 거야. 그리고 서로가 의존적이라서 양수가 있으니까 음수가 있고 음수가 있으니까 양수가 있듯이 불쾌와 불만과 불행이 있기 때문에 유쾌와 만족과 행복이 있을 거야.

네 말대로 사과를 좋아하는 것과 오렌지를 좋아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관성이지 상대성은 아니야. 두 사실이 서로의 만족이나 행복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까. 그런데 뜨거운 사막을 걷는 두 사람에게 갈 길은 먼데 갈증을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한 조그만 물병이 하나 있다고 하자. 누구든지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불쾌 상태의 갈증을 풀어 유쾌 상태의 만족으로 바꿀 수가 있지. 그런데 그에게 갈증이라는 생명의 가능성을 감쇄시키던 상태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없었다면 만족이라는 생명의 가능성을 증진시키는 상태에 대한 유쾌한 느낌도 없었을 거야. 두 느낌은 하나의 생명현상에서 반비례하는 두 양상이라면 불행과 행복은 상대적인 느낌이랄 수 있지.

또 한 편 내가 마신 만큼 상대가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의 만족 즉 행복이 상대편의 불만족 즉 불행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경우도 상대적인 행복추구이지. 내 안에서나 상대방과 나 사이에서 반비례한다면 불행과 행복은 상대적인 거지. 물론 공감으로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해서 둘 다 행복해졌다면 비례의 경우도 서로의 행복에 영향을 주었으니까 상대적이야. 아, 상대성은 비례적이든 반비례적이든 두 사물의 변화에 서로가 영향을 주는 성질이네.

그러면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행복의 사례도 있지 않을까. 흔히 목이 마른 두 사람이 반절쯤 물이 담긴 컵에 보고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예로 드는데 이는 바로 행복의 주관성과 동시에 상대성을 보이려는 사례야. 어떤 사람은 이제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다른 이는 뭐라 하겠니?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하겠지. 그래. 한 사람은 긍정적인 반사체계를 다른 사람은 부정적인 반사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다른 관점과 기준으로 보니까 물의 양이 많거나 적게 보이겠지. 각자가 자기의 반사체계라는 관점이나 기준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이지.

그런데 물의 양은 일정한데도 각자 다른 관점이나 기준 즉 다른 반사체계로 보면 달리 보이니까 상대성이지. 그래서 한 쪽은 그 물이 떨어질 때까지 괴로울 것이고, 다른 한 쪽은 마실 때마다 즐거울 거야. 그러면 홍아야, 행복은 마음먹기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들 하는데 이는 행복의 어떤 성질들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니? 아, 그렀네. 행복의 주관성과 상대성 때문에 마음가짐이라는 수행의 가능성이 생기는 거네. 그래서 성숙과 진화의 가능성이 열리는 거고.

그러면 거꾸로 행복에 객관성이나 절대성은 없을까? 있지. 행복이 아무리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특성이 있더라도 행복해지려면 객관적 조건과 절대적인 수준을 갖춰야 된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 사람이 살아가는데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객관적인 조건들로는 건강, 가족, 재산, 직업, 명예, 지위, 지식 등이지.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어. 우리는 건강을 잃거나 굶주리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지금의 상태를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라고 말할 수는 없어. 객관적으로 불행한 조건을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믿음만으로 바꿀 수는 없잖아.

그렇다면 객관적인 조건들을 얼마나 갖추어야 행복해져? 이 객관적인 조건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행복의 조건들이야. 건강을 살펴보더라도 건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기본적인 소득이야. 소득이 있어야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고 병이 나도 고칠 수가 있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소득이라는 것이 자기 혼자 노력했다고 많아지는 것이 아니잖아. 직업을 얻고 임금이 결정되고 승진을 하고 하는 것들은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거야. 그래서 사회는 행복하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을 평등하게 갖추도록 노력해야하는데 이런 노력이 성공한 사회를 복지 사회라고 하지.

그리고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앞서 말한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을 평균보다 더 많이 갖추었대서 저절로 평균이하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야. 문제는 어느 정도의 소유에서 만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어. 홍아는 돈이 얼마나 있어야 만족할 수 있겠니. 그야 많을수록 좋지. 그게 문제야. 그러면 한없는 욕심 때문에 만족할 수 없어서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서 하버지는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도록 욕심을 줄이자는 거잖아. 그렇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보다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차지하려는 행복 경쟁 때문에 불행해진다고 보는 거야.

그러나 현실에서는 객관적인 조건이 아무리 불리해도 만족할 수 있도록 욕구만을 줄여서 행복해질 수는 없어. 반대로 한없이 커지는 욕구를 다 만족시킬 만큼 객관적인 조건들을 다 갖추기도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행복을 얻으려면 이 경쟁 대열에서 빠져나와야 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자는 것이 우리의 해결책이야.

참으로 어려운 것은 어느 선에서 만족할 수 있는지 그 기준선을 정하는 거야. 그리고 기준선이 정해졌다면 기준선 안쪽에서는 언제나 만족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 즉 수행이 필요하고. 하버지는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는데 하버지가 몸담은 사회에서 평균을 기준으로 정했단다. 하버지의 부나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소유욕이 평균을 넘어서면 욕심부린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비우려고 애쓰지. 그리고 만약에 평균에서 약간 못 미친다면 그대로 만족하기로 결심했단다. 여기서 평균은 어떤 수치가 아니라 하버지의 직관적인 느낌이야. 그런데 홍아야, 왜 하버지가 평균선으로 정했는지 설명할 틈이 없으니 네가 생각해봐.

하버지는 절대로 평균을 넘어서지 않겠다는 거야. 한마디로 화려한 의식주는 거북하니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거야. 하버지가 어떤 힘이 가졌다면 그것이 어떤 힘이든 고생하는 이들의 고생을 풀어주는 데 쓰자는 거고.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겠다는 거야. 이를테면 하버지가 썼던 차로 하버지의 평균이라는 기준선을 찾아보자. 차가 없이 살았던 적이 더 많고, 한 번도 새 차를 사본 일은 없어. 중고차 아반떼가 하버지가 정한 기준선이었단다. 외식할 때는 5천 원짜리가 기준선이었는데 먹고 싶은 걸 골라 먹으려고 지금은 7~8천 원짜리로 올렸어. 지금도 모든 소비 영역에서 지켜왔던 이 기준선을 평균 이하로 더 낮추거나 높일 생각은 없단다.

그런데 어떤 기준선을 지키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지켜지는 것은 아닐 텐데? 그렇지. 모든 소비 영역에서 행동과 삶으로 자신이 정한 기준선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증명해야지. 저절로 그렇게 되어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반복하여 연습하는 것이 수행일 거야. 이런 노력 없이 행복을 쉽게 얻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지상에서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 인구가 열명 중에 한둘이라니까 샤워할 수 있는 한국인의 평균 소비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너무 과분하단다. 하버지는 조깅을 하니까 매일 한번은 샤워를 하는데 따뜻한 물로 씻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몰라. 하버지는 조금이라도 덜 소비하는 생활 방식이 어떤 경로로든지 나나 지구의 건강에 지속적인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단다. 그러니까 화석 연료를 아끼려면 샤워도 잠깐 동안 끝내야지. 그렇게 쓰고 남는 것은 필요한 사람들과 조금씩 나누며 살았단다.

행복의 주관성의 반대 개념인 행복의 객관성이 있다면, 행복의 상대성의 반대 개념인 행복의 절대성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절대성이라 글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행복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을까.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니까 인간성의 일부로 존재하는 거잖아.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행복과 불행이 그리고 만족과 불만이 그리고 유쾌와 불쾌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므로 서로가 의존하는 상대적인 상태이지.

그런데 앞에서 누군가가 인간의 수많은 욕구를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 욕구 단계 설 또는 욕구 수준 설을 주장했다고 했었잖아. 그리고 어떤 종류의 욕구든지 만족과 불만족이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욕구에 대한 만족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행복에도 단계나 수준이 있다고 하셨어. 매슬로우라는 미국의 심리학자의 주장대로라면 어떤 욕구나 그에 따른 만족도 위계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어떤 단계나 등급이나 수준의 차이는 결코 그 하위 단계와 바꿀 수 없는 질적 차이래.

이를테면 제일 높은 수준의 자아실현 욕구를 이루어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고 행복해진 사람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생리적, 안정적, 사회적, 자존적인 하위 욕구를 채워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대. 다만 자야실현에 방해가 되니까 하위 단계욕구를 추구하지 않는 거래. 그리고 차상위 욕구에 대한 만족은 차하위 욕구에 대한 만족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 포괄적이며 고차원적이어서 만족의 질량이 훨씬 크대. 어떤 사람이 도달한 수준 안에서 욕구를 바꾸어 다른 것을 선택하기는 쉽지만 수준을 넘어서 차상위 수준의 욕구를 추구하여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면 그 위계성 즉 차이는 상대적인 절대성이랄 수도 있어. 그래서 차하위 수준의 욕구는 차상위 수준의 욕구가 무엇인지, 어떤 가치나 의미를 지녔는지, 그 만족 상태가 어떠한지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홍아야, 그런데 왜 이제까지 우리가 행복의 특성을 찾는 거지? 우리가 어떤 특성을 가진 행복을 추구해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마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더 큰 만족을 얻어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러한 행복의 주관성과 관련해서 우리가 하고 싶다는 것이 정말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가 타고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내기보다 남의 말에 더 귀를 기우리는 경우도 많겠지. 그렇단다. 사회는 어린아이를 사회화시킨다면서 끝없이 그 문화권의 가치와 의미를 내면화시키지. 그 과정에서 본래의 인간성에 반하거나 본래의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도록 엉뚱한 방향으로 동기를 부여하기도 해.

주관성도 조작될 수 있다는 거지? 그래. 네가 어릴 때는 음감이 무뎌서 책을 읽듯이 멜로디가 거의 없는 노래를 했어. 누가 네게 노래를 잘하니 노래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면 그건 네가 행복을 찾는 방향이 아닐 거야. 그런데 그림은 곧잘 그렸어. 엄마와 아빠가 그림을 잘 그리고 관심도 많아서 네게 물감이나 스케치북 칠판을 사다 주면서 격려해 주었지. 그런데 네가 그림을 잘 그렸던 것이 엄마와 아빠의 성화 때문인지 네 소질 때문인지 아직은 모르겠어. 아무튼 주관성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아빠와 엄마가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그 중에 네가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도록 격려해주었고 지금도 행복을 그렇게 찾을 수밖에 없을 거야.

하버지 그럼, 내가 행복을 찾는데 행복의 상대성은 어떤 도움이 될까? 네가 무엇에 만족하든지 너나 다른 사람의 불만 상태를 떠올리면 더 행복한 느낌을 증폭시킬 수도 있어. 그러나 거꾸로 네가 불행할 때 행복했던 느낌을 떠올리는 것은 너를 더 비참하게 만들겠지. 그런 상대적인 행복은 잠시뿐이니 부질없이 그런 행복에 매달려 있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영속적이고 포괄적이며 고차적인 행복이 무언지 찾아가야 돼. 이를테면 식도락가들이 멀리 맛있는 것을 찾아가서 먹는 즐거움은 잠시 뿐이란다. 그러다가는 오히려 맛이 없는 것이 자꾸 많아지지 않겠니. 그러나 건강하기 위해서 꾸준히 운동을 열심히 하면 무얼 먹든지 언제나 맛있단다.

내 안에서 불행과 행복의 상대성을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더 영속적이고 더 포괄적이고 더 고차적인 수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남들과의 관계에서 행복의 상대성을 추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같은데? 다르지. 남들과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주관성의 문제이지만 남들의 행복과 관련되는 나의 행복이 누구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불행이 될 수도 있어. 나의 행복이 피해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선이지만 가해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은 악에 동참하는 거지. 그건 남의 불행으로 이룬 행복이니까. 우리의 삶에서 어느 한 구석이라도 나좋다고 남이 싫어하는 일 즉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말자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첫 번 째 원칙으로 삼아야 할 거야. 그 다음에 남 좋은 일을 한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고.

우린 행복의 객관성에 대하여도 앞에서 살펴보았어. 우리 모두가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도록 노력하되, 적은 소유에도 만족할 수 있도록 욕심을 비우자고.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보다 영속적이고 포괄적이며 고차적인 행복을 추구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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