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2013, 일본, 시민권을 빼앗긴 사람들 : 재일조선인이 찍은 가마가사키 사람들 – <가마가사키 권리찾기>(Give Back Kama’s Right! 2011) 상영회 리뷰

- 권은혜(수유너머N)

왼쪽부터 변성찬 평론가, 큰콩쥐님, 김임만 감독님, 와다 요시히코상 http://www.nomadist.org/xe/galary/1516892

오사카-니시나리구-가마가사키

지난 3월 30일 토요일 수유너머N에서 재일교포 2세 김임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가마가사키 권리찾기> 상영이 있었다. 이튿날은 수유너머R에서 상영이 있었고, 뒤이어 현재 감독이 진행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본명쓰기와 관련한 투쟁인 ‘이름투쟁’의 간담회도 열렸다.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초청된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제의 해외프로그램담당이자 한국 다큐멘터리스트인 강석필감독에 따르자면 “오랜 기간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던 일본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 따라 억압받고 소외되는 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의 경향과 비슷하게 사적다큐멘터리의 경향이 강했던 일본 다큐멘터리진영에, 다시금 투쟁의 현장이 기록되는 것이다.
가마가사키(아이린 지구)는 일본 오사카시 니시나리구에 있는 슬럼이다. 지도에도 제대로 표기되어 있지 않은 이 지역은 일용직 노동자, 홈리스,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로, 겨울이 되면 하루에 다섯 명씩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이다. 야쿠자도 연관되어 있는 곳으로, 1990년에는 야쿠자가 노동자들의 계약에 간섭하는 대가로 경찰서장이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자, 노동자들이 경찰서를 포위했던 사건인 10월 가마가사키 투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가마가사키에 대해 “일본의 어둡고 더러운 비밀”이라 비판한 적이 있다. 이는 일본 내에서 심지어 오사카시에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지적으로, 가마가사키는 철저히 비가시적 영역으로 은폐되어있었던 곳이었다.

다큐멘터리는 2007년 오사카시청에서 가마가사키 해방회관을 거주지로 등록하고 있는 3200여명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행한 주민등록말소처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시작한다. 가마가사키 해방회관은 한 시민단체에서 마련한 공간으로, 거주지등록이 되어 있어야 주민등록이 가능하고 그래야만 일용직으로나마 일을 할 수 있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간 행정 말단에 있던 공무원들은 암묵적으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해주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한 경찰관이 이혼 후 다른 삶을 살기위해 이름을 바꾸고 가마가사키 해방회관에 주소지를 등록한 것이 발각되면서, 가마가사키 해방회관은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고, 미디어에서는 이곳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을 불온세력으로 몰아갔다. 이에 오사카시청에서는 주민등록말소와 해방회관의 철거를 강행하게 된다. 반사회적 힘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대응하는 가장 단순무식한 행정처리. 그렇게 한다고 해서 3200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단체교섭에서 나온 발언처럼 돈을 못 벌고 병에 걸린 노숙자들만 더 많아져 시 당국이 더 손해를 볼 것이라는 예상이 현실에 가깝다. 오사카시청의 이러한 결정은 가마가사키 주민들의 선거권박탈의 문제로 이어지며 더 이상 이들을 일본국민으로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법의 자기모순적 결론에 이른다.

재일조선인이 일본빈민투쟁을 카메라에 담게 된 이유

김임만씨의 아버지는 올해 83세로, 재일교포 1세다. 김임만 씨가 통명(일본식 이름)이 아닌 본명(한국 이름)을 공식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소송을 시작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 재판에 반대하셨다. 그러면서도 그의 아버지는 미리 만든 고베의 묘에, 본명으로 묘비를 쓰셨다.
재일조선인에게 있어, 본명에 대해 알아나간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해나가는 것이자,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일의 시작이다. 이것은 마치 성소수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커밍아웃을 해 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재일조선인에게 본명의 사용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타인과 사회로부터도 그 존재를 인정받는 일인 것이다. (이와 함께 제국주의 시대 식민의 역사가 불려들여짐은 물론이다.)
1970년대 재일조선인 1세 최창화 목사 이후, 재일조선인 이름에 관한 재판은 이번이 두 번째다. 공식적으로만 60만으로 추산되는 재일조선인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40년이 넘게 제기되지 않은 문제였음에도, 그가 이 소송을 건 까닭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게 되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름 소송에 대한 그의 발언 중 담겨있던 이 말은 그가 소송을 하게 된 배경이자, 다큐멘터리스트로 살아가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가 하고자 했던 작업은 무엇보다 재일조선인의 문제였다. 일본 내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묻힌 지 오래인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꺼내어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카메라를 사서 영상을 찍기 시작할 무렵 그는 NDS(나카사키초 다큐멘터리 스페이스)의 다큐멘터리 감독 느노가와 데츠오를 만나 가마가사키를 알게 되었다. 느노가와 데츠오씨를 따라 단 하루동안 돌아본 추운 겨울 가마가사키는, 한쪽에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월동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김임만 감독은 가마가사키를 다큐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고, 4개월 프로젝트로 시작한 작업은 5년 여 동안 지속된다. <가마가사키 권리찾기>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다큐멘터리다. 이름소송에 대한 발언 중 “자기 일을 알리기에는 남의 일도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지난 5년 간 가마가사키에서의 경험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된 말일 것이다.

도쿠야마상

사건이 시작된 2007년부터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주민등록회복투쟁이 진행되고 있던 2009년까지를 담아낸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언쟁이 붙은 도쿠야마상이 나오는 부분이다. 일본 참의원 선거날 투표를 독려하고 있는 활동가와 그를 찍고 있던 김임만씨와 사토레오상 앞에 나타난 한 중년의 남성은 “우리가 투표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라는 말을 던진다. 선거에 관한 흔하지만 무서운 회의론. 그러나 그의 이 말은 그저 흔한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오간 몇 차례의 언쟁 끝에 그가 한 말은 외국인에게 선거권이 있냐고, 없는 사람이 어쩌겠냐는 토로였다. 그 역시 재일조선인이었다. 옆에 있던 사토레오상이 외쳤다. “선거권 없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다구요.” 자신이 재일조선인임을 밝힌 김임만 감독은 카메라를 든 채 도쿠야마상에게 본명을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얼굴이 카메라에 기록되고 있음에도, 본명은 이야기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일용직노동자에게조차 재일조선인임을 드러내는 것이, 그 이름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 알 수 있는 제스처였다.
영화에 더 이상 기록되지 않은 최근의 상황을 보면 가마가사키의 주민들은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다. 오사카 시에서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도 생활보호 지원을 가능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민등록이 없으므로 일용직으로도 일하기 어렵고, 선거 역시 불가능하다. 오사카 시는 그들이 시의 지원이 없이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는 명백히 가마가사키 주민들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다. 실제로 운동도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더군다나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보면 카메라는 폐허가 된 후쿠시마로 가 있고, 가마가사키에서 후쿠시마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광고가 보인다. 한국의 80~90년대 다큐멘터리들에서 봤을법한 가마가사키 주민들의 강한 투쟁의 장면들이 무색하게도 김임만 감독이 선택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후쿠시마의 풍경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도쿠야마상의 장면을 떠올리려 애썼다.
도쿠야마상은 김임만씨와 같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하는 가마가사키의 재일조선인 일용직 노동자와 본명으로 카메라를 들고 가마가사키를 찾아온 재일조선인 다큐멘터리스트의 만남.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마가사키와 김임만 감독이 가장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 순간이었다. 이 장면이 끝날 즈음 도쿠야마상은 사토레오상과 김임만 감독에게 이러한 현실을 잘 알려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영화 상영 후 GV 자리에서 감독은 도쿠야마상이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 곧이어 현재 그가 진행 중인 이름투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외롭지 않냐고 던진 질문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독하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가마가사키의 상황이 결코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선거권을 박탈당했던 사람 중 이 다큐멘터리를 제출해서 소송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있고, 카메라를 끄고 세 시간동안 이어진 술자리에도 끝내 본명을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알려주길 부탁한 도쿠야마상이 있다. 고독하지 않다며 보였던 그의 웃음은 현재 가마가사키의 상황이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는 다른 ‘희망’을 떠올리게 했다.

덧 : 나카시마 미유키의 <시대>

https://www.youtube.com/watch?v=oWRAuocRb0A

30일 GV가 끝나고 뒷풀이가 이어졌다. 12시가 가까워오자 김임만 감독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인디다큐페스티벌 일정을 소화해야했던 지난 일주일의 피곤이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김임만씨와 같은 NDS의 멤버인 기무라 조 상을 택시에 태워 배웅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한 이 중 한국에서 유학중인 쿠마상이 있었다. 술을 잘 마시기로 소문난 그도 연거푸 들이킨 맥주와 소주와 사케에 취했는지 연신 일본음악을 듣자고 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계속해서 “확실한” 사람이라 말한 나카시마 미유키가 생각난다. 한국으로 치자면 한영애 같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사의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음색이나 노래의 음과 리듬은 그 날의 상영회와 곧 잘 어울리게 다가왔다. ‘시대’라는 그녀의 노래는 처음부터 위기와 절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힘이 미리 말해주듯 “오늘은 무너진 나그네들도 다시 걷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김임만 감독은 4.3 때 오사카로 건너가서 다시 사할린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귀국한 이들에 대한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올해 안으로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내년에도 이맘때 즈음 영화와 함께 그를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때 함께 이 노래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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