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궁극적인 관심과 세계관의 중요성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 궁극적인 관심 대상과 세계관의 중요성

홍아야, 이번에는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서 어떤 세계관을 가져야 하는지 얘기 나누고 싶구나. 세계관이라고 하는 관점(觀點)은 우리의 모든 경험에 대한 인식틀이며 해석틀이란다. 세계관은 가치관이나 인간관이나 인생관 또는 사회·역사관등 모든 다른 관점들보다 앞서서 우리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고 판단한단다. 세계관의 해석을 원칙으로 받들고 각 해댱 분야의 하위 관점이 거기에 주석을 붙이지. 삶의 큰 방향을 가장 먼저 결정하는 것이 세계관이니 중요하지 않겠니.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어떤 세계관을 가져야 할 것인지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니. 진선미를 더 잘 경험할 수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네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내가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얘기구나.

사람들이 진선미에 대한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동서나 고금이나 마찬가지란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우주 속에 들어있는 진선미의 의미나 가치를 직관(直觀: 이성으로 따지거나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느낌으로 앎)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홍아야, 인간이 진선미를 경험한 이야기 중에서 진짜로 중요한 이야기는 개인의 삶의 이야기도 아니고 공동체의 역사나 문화 이야기도 아니란다.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또 해석해 주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란다. 그것들은 고대 신화든지 오늘날의 우주의 생성과 진화에 대한 학문적인 담론이든지 우리의 세계관으로 수렴되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이지.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경험이나 삶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의 배경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란다.

여기서 이야기라는 담론은 어떤 화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에 그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가리켜. 그런데 우주에 대한 담론은 우주의 생성과 진화라는 커다란 화제에 딸린 여러 가지 작은 화제들을 논의하여 하나의 전체가 되는 줄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주 거대한 담론이지. 이 거대 담론을 압축하여 개인에게 내면화된 것이 바로 세계관이고.

그런데 문화권마다 다르지만, 그 거대 담론 속에는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인 실재이며 원인이 밝혀져 있단다. 그리고 하나의 문화권은 그 실재나 원인을 꼭지점으로 삼아서 만물의 생성과 의미와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 체계를 만든단다. 이 체계가 내면화 된 것이 개인의 신념체계인데 이는 인식체계나 가치체계나 의미체계가 통합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조건반사체계란다.

바로 이 신념체계의 상부 구조가 사물을 바라보는 문이고 창이고 마음의 안경 역할을 하는 세계관이란다. 흔히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자아의 정체성이 사실은 나에게 내면화된 나의 신념체계, 그 중에 특히 세계관을 가리켜. 나의 새로운 경험 활동의 주체는 경험체계이면서 조건반사체계이지만 그 중에 특히 그 상부 구조인 세계관이 경험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단다.

공자님이 ‘군자는 의(義)에 민감하고 소인은 이(利)에 민감하다.’고 하셨어. 인간에게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관이 생기는 걸까. 그건 가치관보다 앞서는 인식틀이자 해석틀인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그럼, 군자와 소인의 세계관이 어떻게 다를까. 공자는 이상적인 인간을 군자(君子)라 불렀는데 그 군자들이 추구해야 되는 ‘의(義)’는 하늘(天) 즉 우주의 뜻이라는 거야. 자연이 하늘 뜻인 이(理)를 따라 작동 또는 작용하듯이 군자라면 마땅히 하늘 뜻인 의(義)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거야. 군자의 세계관에서는 만물의 궁극적인 실재인 ‘하늘’의 뜻인 의를 따르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므로 군자가 되려면 자신의 이익을 버리더라도 ‘의’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공자가 보기에, 소인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믿는 궁극적인 실재는 무엇이며,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군자가 살아야할 세계는 우주까지 확대되지만 소인들이 살아야할 세계는 그들의 관심 범위인 ‘지금의 여기’ 즉 시장바닥과 같이 몸담고 있는 현실이야. 그리고 시장으로 표상되는 소인의 현실세계의 작동원리는 이익 즉 돈이야. 사회를 작동시키는 근원적인 동력을 이익 즉 돈이라 믿는 사람들은 만물을 돈으로 환산해야만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실감할 수 있어.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발휘되는 돈의 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돈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고 돈을 숭배하지. 그래서 돈벌이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다하려 드는 것은 맘몬(物神)이라는 돈을 섬기는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소인들은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인격적인 능력과 의리에 따른 행동이나 삶은 현실을 움직이는데 사용되는 큰 힘이 아니라고 믿어. 그들에게는 진선미에 대한 경험 능력과 의리를 따르는 행동보다는 그 부산물로 얻을 수 있는 돈이나 권력, 명예 따위가 더 실용적인 가치를 지닌 거야. 그래서 그들에게는 군자와는 거꾸로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것이 목적이고 진선미에 대한 경험 능력이나 의리가 있는 행동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하지. 이와 같이 군자와 소인 사이에 세계관에 따라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뒤바뀌니까 목적과 수단도 뒤바뀌었어. 가치관이나 인생관만이 아니라 윤리·정치·사회·역사관, 등 다른 모든 관점이 세계관이라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니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하니.

하나의 문화권 속에는 하나의 우주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그 이야기를 만든 하나의 신념체계가 들어있고 신념체계 즉 그 문화 상부구조인 세계관이 들어 있어. 거꾸로 하나의 세계관이 하나의 우주 이야기와 하나의 문화권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니까. 그 세계관을 가진 신념체계는 그 문화권의 구성원들에게 내면화되어서 새로운 경험을 거기에 비춰보아 새로운 경험이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고 선택하게 만든단다. 그러면서 새로운 경험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새로운 우주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문화권은 해석된 경험들 가운데 어떤 것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인지 그걸 찾는단다. 그리고 거기에 궁극적이고 본질적이고 영속적이며 관심을 기울인단다. 세계관을 가진 신념체계는 찾아낸 그 궁극적인 실재를 체계의 출발점이자 모든 경험의 연결고리가 되도록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문화체계의 꼭지에 모시지. 그리고 거기서 시작하여 경험들을 위계적으로 재배치하고 재구성하여 스스로의 문화체계를 가다듬지. 보이지 않는 문화체계가 실현된 것이 사회체계야. 그리고 그 문화권에 속한 개인은 그 꼭지를 정점으로 삼아 만든 문화체계를 충실히 내면화하여 따름으로써 문화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게 만든단다. 그러니 한 사회의 문화체계에서나 한 개인의 신념체계에서 궁극적인 실재와 그것을 반영한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 거니.

하나의 우주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든지 그 이야기가 만들어낸 세계관에 비추어서 보아야 새로운 인식 즉 경험이 가능해져. 그러나 인간의 신념체계는 경험들이 마구 뒤얽혀 있어서 전후좌우와 상하종횡으로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을 비춰보는 안경이나 창 또는 마음의 거울로 작용하기가 어려워. 안경의 굴절이 너무도 불규칙하고 색깔도 칙칙하여 새로운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으므로 새로운 경험이 힘들어. 우리는 대개 혼란스러운 신념체계가 만든 비뚤어진 고정관념으로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고정관념은 고정관념을 불러들여서 사람을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우주 이야기를 만든 관점 즉 세계관은 우리가 어떤 것이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이면서 실재인지를 밝히는 것으로부터 우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줘. 이를테면 주역은 중국의 고대의 세계관이었지만 한국이나 일본 월남 등 동아시아 문화권의 세계관으로 발전되었지. 우리나라 태극기도 바로 주역의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단다. 만물의 생성을 음(陰)과 양(陽)이라는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에너지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는 주역의 세계관을 잠깐 살펴보자.

태극기의 중심에 있는 원은 아직 상대적인 에너지인 음과 양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하나의 근원이며 그 이름은 무극(無極)이야. 무극은 마치 블랙홀 속에 양자가 대칭으로 무한히 압축되어 있는 상태와 같은 거지. 그러다 자발적으로 대칭이 깨지면서 빅뱅이라는 혼돈이 생기는데 혼돈은 대칭되는 두 에너지가 뒤섞인 모습이지. 아마 태극이 그 혼돈 상태에서 작용하는 상대적이고 대칭적인 두 에너지를 상징하는 지도 몰라. 만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모두 그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빅뱅의 플라즈마 상태로 다시 블랙홀의 양자 대칭으로 환원된대. 마찬가지로 만물은 태극을 거쳐 무극으로 환원된다는 거야.

그런데 무극보다는 만물을 생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이며 원인을 태극이라고 보고 우리나라 국기에 그걸 그려 넣었어. 아마 비어있는 원 하나만 그리는 것보다는 태극을 그리는 것이 훨씬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르지.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무극이 곧 태극이라 하여 양자를 동일시하나 하버지는 무극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있어. 아무튼 이 무극이 태극의 양의{兩儀:음(푸른 색)과 양(붉은 색)으로 나뉨}로, 사상(四象: 태극기의 네 귀의 건곤감리의 네 모습)으로, 팔괘(八卦)로, 육십사효(六十四爻)로, 이어서 만물이 생성된다는 것이 주역의 우주 이야기를 간추린 주역의 세계관이고 인식 틀(체계)이란다. 여기에도 무극 또는 태극이라는 궁극적인 실재가 우주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고 있어.

그밖에도 문화권마다 다른 여러 우주 이야기의 출발점이 있어. 그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우주의 궁극적인 힘이나 실재나 원인이라고 믿고 섬기는 것들이지. 이를테면 유교의 의인화된 ‘하늘’과 ‘의리(義理)’이나 도교의 의인화된 ‘자연’과 ‘道’나 불교의 ‘부처’ 의인화된 ‘眞(佛性)’. 기독교에서 하느님, 힌두교에서 브라만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찾은 우주 만물의 근원적인 실재이며 원인이면 힘이며 또한 모든 경험의 연결고리이며 우주 이야기와 문화체계 신념체계의 출발점이지.

또 그 궁극적인 실재나 원인이라는 것이 시대와 분야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단다. 자본 주의 사회는 돈이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이므로 돈을 섬기지. 그러나 근대 이전의 사회는 정치권력이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이었으므로 권력을 섬겼어. 그 권력을 하늘이나 신이 준 거라 하여 권력을 대행하는 인간을 중국에서는 천자(天子), 이집트나 고구려에서는 태양의 아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제우스의 피를 받은 사생아들이라 했어. 궁극자, 절대자, 권력자의 상징인 하늘이나 신을 섬기는 것을 대신하여 신들의 지상의 대행자를 섬기라고 만들어낸 신화들이었지.

그 밖에 특정 문화나 특정 종교의 인격신들은 많지. 인격신은 아니라도 일상생활에서 신처럼 섬기는 것들 즉 물신(物神)들도 많이 있어. 육체적으로 외모나 심리적인 리비도나 성애(性愛) 또 사회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돈 등이 있어. 그것이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또는 영향력)을 지녔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절대화하고 그 가치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그것을 궁극적인 실재로 떠받드는 거야.

자연과학에서는 우주의 질서나 에너지를 근원적인 실재나 원인으로 보고 우주의 생성이나 진화를 설명하지만 아직은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네 가지의 에너지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지는 못했어. 그러니까 모든 과학 담론을 묶어서 하나의 우주이야기를 아직은 만들어내지 못한 거야. 그러나 이제 우주와 세계에 대한 과학 쪽의 우주 이야기가 근대인과 현대인의 세계관을 좌우하게 되었어. 근대에 나타난 제국주의나 자본주의도 과학 쪽의 유물론적인 무신론과 진화론이 만들어 낸 거야.

이를테면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주의는 생물학적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원주민을 인간 이전의 진화 단계로 보아 노예로 부리거나 무참하게 죽일 수 있었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힘의 논리의 귀결점이 제국주의였지.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 아니라 내가 돈을 위해서 필요해진 인간들이 많이 살고 있어. 평생 동안 오로지 돈을 모으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돈이라는 물신을 받들어 섬기는 일종의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고대에는 궁극적인 실재와 그에 따른 세계관이 우주 이야기 즉 신화에 담겨 전해왔으나 오늘날의 우주 세계 이야기에 대한 모든 학문적인 성과가 과학이나 형이상학의 담론 속에서 하나로 용해되어 통합되면서 수정된단다. 우주 이야기(현대의 과학 담론들)와 궁극적인 실재 그리고 신념체계인 세계관, 이 셋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거나 쇠퇴하지.

그런데 궁극적인 실재를 찾는 과학적인 실험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미립자를 발견하는 과정이야 표준모형 이론의 최종적인 증거는 힉스 입자인데 곧 발견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어. 그러나 미시세계에서 약력과 강력과 전자기력을 하나의 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이 완성되더라도 거시 세계의 중력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에너지를 하나의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통합 이론을 완성하지는 못한 거야.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모든 과학 담론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설명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우주 이야기도 궁극적인 실재도 과학적인 세계관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은 우주와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 담론을 만들어 내려는 근대의 형이상학 노력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하여 이를 부정해버렸어. 그러나 한 순간도 삶을 멈출 수 없는 인간에게 세계관이 없다면 경험활동도 할 수 없게 되지. 그렇다면 현대인은 우주와 세계를 어떻게 비추어 주는 안경을 쓰고 있을까. 현대인은 아직도 굴절이 불규칙하고 색깔도 칙칙한 안경을 쓰고라도 우주와 인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그 안경은 기존의 문화적인 세계관을 과학적인 지식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세계관이야. 물론 고대나 근대의 안경보다 우주와 인생이 훨씬 더 잘 보이겠지만. 현대인은 아직도 불완전한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한 순간도 세계관 없이 경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세계관은 계속 발전한다는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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