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리얼리스트가 된다는 것.

- 성현

벌써 위클리와 함께한지 3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그 동안 너무 열심히 안 해서 위클리에 별로 도움이 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 벌써 4월이 되었네요. 짧으면 짧다고 말할 수 있는 3개월 동안 크고 작은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내 힘은 정말 미약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구나..” 이런 생각들은 시도 때도 없이 뇌리에서 번뜩거렸습니다. 특히 책을 읽는 도중에 이런 생각이 들면 “이 책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라는 나약한 패배의식이 스물 스물 기어오르더군요.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버텨나가야 하는 이 현실은 거대한 아이거 북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무것도 모르던 옛날에는 이 아이거 북벽의 산세와 높낮이가 저에게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북벽을 제대로 오르지 않더라도 부모님이 제공해주는 안락한 쉼터에서 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좋던 싫던 간에 이 아이거 북벽을 올라가야만 하고, 이 북벽 곳곳에는 자본과 국가라는 거대한 모순덩어리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올라가야만 하는, 아니 살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시지프스와 같은 노동자의 형상으로 주조해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이 북벽을 넘어서고 싶습니다. 비록 압도적인 아이거 북벽에 비해 나약하기만 한 저의 모습은 저에게 많은 절망감과 자괴감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 산을 넘어서겠다는 꿈을 품었고, 넘어서기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는 저의 삶이기에, 만약 이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의 삶은 굉장히 무의미해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등반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어서 잘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 자신의 부족함과 미약함을 느낄 때면 그냥 소시민적으로 안주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깐씩 듭니다. 하지만 이때마다 다시 고개를 저으면서 마음을 굳게 먹습니다. 좋든 싫든 간에 이 아이거 북벽과 같은 험난한 현실을 살아나가야 한다면, 시지프스의 노동을 하더라도 자본과 국가가 주조해 놓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노동이 아닌, 이것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저의 삶을 훨씬 자유롭게 할테니까요. 무거운 돌덩이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것은 다 똑같겠지만, 모순들을 직시하지 않고 이리저리 지름길만 찾아내려는 근면함이 아니라, 이 모순을 직시하고 이 모순들을 향해 묵묵히 올라가는 행동이 꿈을 실현시키는 원동력일 테니까요.

고로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법입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하는 순간, 이상주의자는 그것을 방해하는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현실주의자가 항상 위대한 이상주의자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억압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이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명저 <자본론>이 탄생한 이유가 아닐까요. 그러니 저는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냉정한 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의 힘도 그가 품고 있는 꿈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꿈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만이 남게 됩니다. 실천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관조하고 순응하면 되는 풍경으로서의 현실 말입니다.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을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체념과 냉소뿐일 것입니다.

위클리를 통해서 저는 더 많은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들의 모습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클리는 제게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구요. 우리의 글들이 여러분들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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