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지 않으면 달리 살지 못하는 자들을.

- 성현

영화 <박쥐>에 대한 비평


영화가 시작되면 하얀 병실의 벽 위로 가볍게 움직이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한동안 어른거리고, 이윽고 문이 열리면 신부 상현(송강호)이 들어온다. 하얀색이 주는 창백하고 차가운 톤은 이 영화의 주된 분위기를 구성한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집의 대부분을 하얀색으로 색칠하기도 하는데, 이렇듯 병실의 느낌을 주는 하얀색은 이 등장인물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환유이다. 세상은 병실이며 그들은 모두 어떤 병을 앓고 있다. 영화 초반의 상현은 극도의 우울증을 앓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다른 수녀에게는 자살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윤리적(?)으로 자살하기 위해 임마뉴엘 바이러스EV1)의 실험대상이 되기를 갈구한다. 연구소의 흑인 의사가 정확하게 갈파한 것처럼(“기도에 무력감을 느낀 성직자들이 자살의 다른 방법으로 실험대상을 자처한다”, 심리학적으로 자살과 순교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는 교인답게 순교를 위장한 자살을 하고자 한다.

상현은 신의 질서를 어기려고 한다. 아니 그는 어길 수밖에 없다. 신의 질서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아무리 환자에게 마음을 많이 주어도, 환자의 죽음 앞에서 그는 철저하게 무력하다. 신의 질서는 그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신의 질서 안에서 그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진실을 안 상현은 EV라는 신의 질서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그는 몰락하고 있다. 신부로서의 삶을 포기하기 위해 그는 모든 감각적 쾌락을 추방하고 자아중심성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체가 그에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신의 질서가 주지 못한 구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브가 뱀이 준 사과를 먹은 결단을 한 것처럼, 그 또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을 통해 그는 뱀파이어로 새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변태가, 그 자체로는 상현에게 행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자신의 말마따나 ‘모든 쾌락을 갈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뱀파이어의 피가 부과하는 ‘향유2)의 끝없는 반복적 순환에 사로잡힌 끔찍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상현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 ‘기괴한 자동장치’의 작동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그것의 숙주인 육체를 삭제해야 하는가 사이에서 고뇌한다. 근데 이 고뇌를 종식시켜 주는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태주라는 여인이다.
태주를 통해 상현은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녀가 태주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상현은 태주를 통해 뱀파이어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내가 뱀파이어가 아니었으면 우리 둘이 만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태주 또한 상현을 통해 삶의 주인공으로 도약한다. 새벽에 잠깐 집 밖으로 나가서 뛰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었던 예전의 삶에서, 상현과의 만남을 통해 현실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현과 태주의 만남을 통해 <박쥐>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만난다. 이 19세기 소설의 놀라운 점은 금지된 곳에서 비로소 욕망이 작동하는 과정을 징그러울 만큼 생생하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금지가 사라지면 욕망도 사라진다는 이 아이러니 한 진실. 이 진실은 여과 없이 이 영화 내에서도 드러난다. 불륜을 벌이던 상현과 태주가 태주의 남편 강우를 살해하자, 그들의 관계에 남은 건 사랑이 아닌 죄의식에서 기인한 증오와 책임회피였다.

태주는 상현에게 太主이다. 태주는 상현에게 새로운 진리이자 질서이다. 뱀파이어로서의 상현의 삶의 본질은 태주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상현이 강우를 죽이고 한때의 자신의 아버지였던 노신부마저 죽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태주였다. 뱀파이어로서의 삶에서 근엄하고 억압적인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무기력한 아버지는 필요없었다. 외설적이지만 자극적인, 상현의 나쁜 피를 힘차게 돌게 하는 새로운 신인 태주가 있기 때문이다. 상현에게 태주는 그런 존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 앞에서 서로는 극단적인 미움으로 감정이 선회된다. 이러한 감정의 극단화는 결국 상현의 손으로 자신의 상징계를 무너뜨리게 만든다. 바로 이 과정에서 박찬욱 감독 작품의 서사 중의 주요 특징인 ‘오인’이 나타난다. 끔찍한 살육에 이어진 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루한 느낌의 부감숏 다음에, 카메라는 바닥으로 내려와 라 여사가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선을 알아차리는 상현의 뒷모습을 비춘다. 상현은 그 시선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눈빛이라는 게 오묘한 거에요. 긍정하고 부정 사이에 수많은 단계를 표현할 수 있거든.”)

이제 새로운 비극이 다시 발아했다. <박쥐>에서 태주라는 캐릭터는 매우 독특하다. <테레즈 라캥>에서는 여주와 남주를 동등한 주체로 등장시켜 그들의 개별적 심리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박쥐>에서 태주는 하나의 주체라기보다는 상현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인다. 강우의 피살 이후에 태주의 심리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현과 같은 죄의식을 난데없이 외간 남자 영두와 정사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 더욱 극단적으로 묘사한다. 더 나아가 뱀파이어가 된 태주의 모습은 상현이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모습을 더욱 확고하게 보여준다. 이 둘의 관계는 기괴해졌다. 태주는 분명 상현의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상현은 태주에게 피를 주입함으로써 아버지가 되었다. 태주의 “난 이제 여자가 아니네”라는 말은 “난 당신의 딸로 다시 태어났네”로 들을 수도 있다. 동시에 그녀는 상현 안의 극단적인 타자성이자 심연. 즉 자기 안의 괴물의 현신, 혹은 결코 보아서는 안 될 그의 도플갱어가 된다.

이 비극의 씨앗은 이미 태주가 상현의 능력을 궁금해 하는 옥상장면에서 잉태되어 있었다. 태주는 500원짜리 동전을 가리키며 “이거 구부릴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이에 상현은 동전을 아예 찢어 보인다. 태주는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어요?”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상현은 태주를 안고 훌쩍 뛰어내린다. 이건 악마가 금식 기도를 마친 예수를 유혹하는 성경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변용한 것이다.(악마의 첫 번째 시험은 ”신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예수는 40일간 굶었고, 상현은 오래 피에 굶주려 있었다.(여기서 떡과 돈은 사실상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는 끝내 시험에 들지 않지만 상현은 굴복한다. 이어 상현 품에 안겨 뛰어내리는 태주 얼굴은 쾌감으로 가득 차있다. 그건 기꺼이 욕망에 투신한 자가 느끼는 하강의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쾌감이다.(이 숏에서 대표적이지만 이 영화에는 뛰어내리는 순간의 아찔한 감각은 있어도 뛰어오르는 순간의 짜릿함은 없다.)

헤겔에게 있어서 몰락은 타락이나 분열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이 타락과 분열이 있음으로 인해 신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세계가 형성이 되고 운동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헤겔에게 있어서 다시 통합시키고 화해시킴으로써 상승(고양)의 계기로 이용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그에 반해 상현은 끊임없이 내려간다. 일정 정도가 지나면 몰락은 쾌감이 아닌 고통을 동반한다. 그 고통은 바로 그가 분열시키고자 한 질서가 주는 반작용에서 나온다. 상현이 ‘인간의 법’을 어기고 강우를 죽인 후에 그는 죄의식을 느꼈고, ‘신의 법’을 어기고 태주를 살린 후에도 그는 똑같이 죄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반작용(금지) 앞에서 그는 순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자의 죄의식을 넘어서기 위해 ‘신의 법’을 파괴하는 결단을 보였고, 후자의 죄의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든 상징계를 파괴하는, 즉 동반자살을 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현은 심연을 대면할 때 생기는 역설인 심연 또한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을 내던짐으로써 금지를 넘어서서 심연으로 다가간다. 그러한 투쟁을 통해 그는 질서(상징계)에 파열음을 내어, 그 질서의 심연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을 드러낸다.

“태주 씨를 사랑했지만, 지옥에서 만나요.” – 상현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 태주

태주를 뱀파이어로 만든 건 분명 상현이지만, 태주는 상현에게 아버지이다. 태주는 상현에게 전체이자 부분이다. 태주는 상현에게 분명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상현의 심연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징계를 만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데, 그 세계 자체가 심연이고 모순이라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 그 세계와 상현 자신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해체시켜야만 한다. 다시 여기서 상현의 ‘목숨을 건 도약’이 시작된다. 비록 상현이 예측한 도약한 이후의 세계는 지옥이지만, 그는 분명 ‘다시’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이자 둘인 이 두 사람이 태양(죽음) 앞에서 서로 ‘화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물적인 본능(“뭐긴 뭐야. 인간 먹는 짐승이지.”)에 머물러 있던 태주는 결국 상현을 ‘인정’함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상현 또한 그 인정을 통해 자신의 ‘양심적인 행동’에 대해서 ‘자기확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절대적 금지(부정)인 죽음 앞에서 이루어진다. 강우라는 금지가 사라진 뒤에 어긋나기만 하던 그들이 다시 금지 앞에서 화해하는 이 장면은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몰락과 금지의 변증법적 종합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오버일까. 상현의 몰락과 금지의 변증법적 도약의 끝은 결국 죽음이었고, 죽음 앞에서 비로소 상현은 구원을 받게 된다. 근데 정말 죽음 이후가 있을까. 우리는 ’다시‘와 ’끝‘ 중에서 어느 말을 들어야 할까.

1)임마누엘이란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의 이름이다.
2)향유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 헤겔의 말마따나 향유는 순수한 부정성에 사로잡혀 있는 개념이고, 대상을 가공*변형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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