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얼굴의 정치학과 감정노동자의 얼굴

- 박임당(수유너머N)

살아가면서 수없이 부딪치는 사람들, 어쩌면 친구나 가족보다도 더 자주 보는 사람들 중에 이들이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해주는 사람들, 식당에서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 홈쇼핑에서 전화주문을 받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감정노동자다.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물론 이미 익숙해져서 안부를 묻거나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슈퍼마켓의 아저씨가 아닌, 서비스직 종사자 전반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통된 표정이나 몸짓, 태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친절’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표상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감정노동자들이 손님을 맞이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일까.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을 넘나드는 사유를 펼친 책, 이진경의『노마디즘』에서는 얼굴의 정치학을 이야기한다. 얼굴의 정치학을 다루는 장에서 중심된 내용은 권력의 얼굴, 즉 안면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장을 읽으면서 권력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감정노동이라는 주제가 자꾸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풀어보려고 한다. 감정노동자의 얼굴도 안면성을 가지는가?

먼저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부터 정리해보자. 이들이 말하는 정치성을 갖는 얼굴이라는 것은, “표정이 다른 사람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질 때 비로소 정확하게 정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은 언어 또는 기호와 같은 효과를 지닌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은 항상 잉여적인 명령어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기표로서의 얼굴이 갖는 효과는 ‘내말을 듣지 않으면 죽음뿐이다’라는 전제군주의 명령어가 된다. 우리는 모두 그 얼굴이 방사하는 메시지를 주시하게 되며, 그의 질서를 따르게 된다.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예수의 얼굴로 대표되는, 흰 벽과 검은 구멍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바로 최종 심급의 얼굴이라고 들뢰즈·가타리는 말한다. “모든 인간이 얼굴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서도 특정한 인간, 특정한 사회구성체 안에 사는 인간만이 얼굴을 갖는다는 것”이다. 권력의 배치를 필요로 했던 유럽의 사회구성체에서 바로 그 얼굴이 필요해졌고, 때문에 그 사회에서 가장 보편화 된 백인 중년 남성의 얼굴을 단순화시켜 흰 벽과 검은 구멍으로 이루어진 안면성의 추상기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안면성의 추상기계는 두 가지 층위에서 작동하는데, 예수의 얼굴로 대변되는 하나의 ‘원소’와 같은 얼굴을 구성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위 얼굴들이 구체적인 얼굴들을 분류하고 선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두 번째 층위이다.

이 두 번째 층위의 작동방식이 내가 감정노동자의 얼굴을 엮어 보고자 시도하는 지점이다. 흰 벽과 검은 구멍은 스스로의 척도를 가지고 다른 얼굴들을 분류하며 이름 붙인다. 노예, 어린이, 여자. 그것들 사이에 감정노동자의 얼굴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감정노동자의 면면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적당한 웃음, 따뜻한 시선, 공손한 자세 등이 떠오를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어떨까. 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을 넣어 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런 감정노동자를 어디선가 마주하게 된다면, 적잖이 당황하거나 불쾌하게 될 것이다. 그건 우리가 기대하는 그들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정노동』에서 감정노동에 관한 다양한 층위의 연구를 담은 앨리 러셀 훅실드는 기업에서 원하는 감정노동의 매뉴얼이 있다고 쓰고 있다. 감정노동이 판매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한 감정이다. 그 감정의 통제와 관리의 매뉴얼을 만드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고객들의 기대이며, 이는 표준적인 얼굴이 원하는 대상으로서, 그리고 그들이 기대하고 서비스 받기를 원하는 대상으로서의 얼굴이 된다. 그 얼굴은 앞서 제시한 특성들―따뜻함, 친절함, 환한 미소 등―을 가지는 부류로 기대되는 ‘여성’ 또는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얼굴이다. 실제로 훅실드는 여성 승무원의 사례를 들면서, 이들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면에서만 여성인 것은 아니며, 여성성에 관한 미국 중산층이 지니고 있는 개념을 눈에 명확히 보이도록 정제한 결과물”임을 말한다.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여성’을 분류해내고, 상대적으로 하찮은 직종으로 인식되는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얼굴에 ‘여성성’이라는 얼굴을 새겨 넣은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여성성’이라는 얼굴―돌보는 자, 복종하는 자, 순응하는 자―을 극대화 시키는 노동자만이 ‘진짜 여성’이 될 것이며, 이들 ‘진짜 여성’만이 ‘친절’의 아이콘이자 감정노동자의 표준적인 얼굴로서 그들의 영역에서 군림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굴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자들로 하여금 ‘진짜 여성’이 되도록 강요하기도 하고, 그들이 욕망하는 궁극적인 얼굴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여성성’이 바로 감정노동의 사회에서는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사회구성체 전반에서 감정노동자의 얼굴은 표준화된 얼굴보다 몇 단계 정도 낮은 위계의 얼굴이고, 첫 번째 얼굴이 대상화 시키는 얼굴이 된다는 측면에서 이것을 안면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것 또한 분명하다. 친절을 기대하는 손님의 얼굴인 두 개의 검은 구멍과 이에 공명하는 감정노동자의 두 개의 검은 구멍이 흰 벽 위에서 만들어내는 추상기계, 이는 안면성의 추상기계와 같은 원리이지만 생성되는 얼굴이 사회 전반에서는 메타 기표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대상화된다는 측면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그것과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논의를 정리해보자. 감정노동자의 얼굴은 안면성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이것이 나를 헷갈리게 했던 지점이다. 감정노동자의 얼굴을 사회구성체 전반에서 작동하는 안면성의 효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감정노동자의 사회만으로 국한해 그 안에서 안면성을 가지는 것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어느 한 쪽으로 결론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백인 중년 남성이라는 얼굴의 효과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직종에서는 동일화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얼굴로 작동하는 감정노동자의 얼굴, 그 미묘한 지점에 위치한 그것에 ‘대상으로서의 안면성’이라고 이름 붙여 보는 것은 비약일까. 권력 배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안면성의 효과가 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권력이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참고한 책

이진경, 『노마디즘』, 휴머니스트, 2002
앨리 러셀 훅실드,『감정노동』, 이매진, 2009

응답 1개

  1. ^.^말하길

    예전에 한 책에서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자신이 오늘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하며 표정에 대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말하기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서로를 대상화시키고 있는 뭔가는 아닐까 생각도 드네요.ㅎㅎ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