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김기택의 시 <하품>에서 얼굴을 찢는 입의 정체

- 하얀(수유너머N)

1. 기관화된 신체

김기택의 「하품」은 지하철에서 하품하는 승객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시를 포함하여 『사무원』이라는 시집은 도시라는 공간에 적합하게 맞춰진 도시인을 담고 있다. 가령 시「사무원」에서 30년간 의자 고행을 하는 사무원을 다루고 있다. 이 사무원의 다리는 인간 다리 둘과 사무실 의자 다리 넷이 구별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신체를 사무실에 최적화한 그에게 달마다 통장으로 “시주”가 입금된다. 두 다리에서 직립하던 인간이 사무실에서 여섯 다리로 살아가기까지 그의 사무실에서의 삶은 그의 다리를 사무실에 적합한 기관으로 고착화시킨다.

여섯 다리의 사무원의 신체라는 이미지는 기관화된 신체에 대해 다시금 사유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신체의 부분들이 알맞은 기능을 수행하게끔 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인간은 인간 신체를 기관(器官)으로 파악한다. 기관이란 여러 조직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각 기관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생명체는 이것들이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 기관들이 각기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신체를 그 기능하는 바로 묶고 분류해서 파악한 것이 기관이다. 하지만 신체를 일정한 기관으로 파악해내는 것도 어떤 배치에 의해 가능하다. 가령 입은 사회 속에서 말하고 먹는 기관을 수행하지만 사적 공간에서 그것은 섹스를 하거나 구토를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기관화된 것으로서 신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신체의 다양한 강밀도를 고착화하는 훈련을 통하여 단일화된 것이다.

다시 사무원의 여섯 다리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이 시에서 묘사된 사무원이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우며 기이하고 기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동안 질서 정연하게 앉아 근무하는 것이 사무실에서의 질서, 혹은 그곳에서 근면성의 척도라면 그 상황 속에서 여섯 다리로 고착된 그의 다리는 기형적인 것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가 두 다리로 직립하는 것 역시 무릎으로, 엉덩이로, 혹은 두 손과 두 다리로 기어 다니는 것이 정상적 인간이 아니다라는 질서 속에서 훈련된 것이다. 이런 질서 속에서 우리가 살지 않았다면 두 다리로 직립하는 우리의 다리는 정상인 것이 아니라 기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영국에서 정상성의 범주인 백인 성인 남성이었던 걸리버가 말의 나라에서는 어리석은 행동과 악덕을 일삼던 야후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상황 속에서 신체는 어떻게 배치되냐에 따라 기관은 다르게 기능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다른 기관으로 변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관의 변환을 가로막으며 기관의 정상성의 범주를 마련하고 고착화하는 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수축된 안면근육에 밀려 반쯤 닫혀진 눈에

눈을 치켜뜬 지하철 승객들이 보인다.

치켜뜬 눈 속에 목젖과 목구멍이 비친다.

얼른 입을 닫아야 할 텐데

(…)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하품」에서 하품하고자 하는, 혹은 그것마저 넘어서려하는 입을 방해하는 것은 지하철 승객들의 눈, 즉 시선들이다. 앞서 ‘질서’, ‘척도’라고 말한 바 있는 바로 그것은 시선에 의해 마련되며 유지된다. 시선들은 말하지 않지만 일정한 질서들을 명령한다. 그리고 ‘나’는 그 명령들과 ‘나’를 겹쳐 놓는다. 이를 들뢰즈는 “공명”이라 말한다. 안면성의 추상기계를 통한 흰 벽과 검은 구멍의 배치 속에서 두 주체의 검은 구멍이 겹치는 것이 바로 공명이다. 우리는 시선, 검은 구멍의 공명을 통해서 일정한 질서에 알맞게 신체를 기관으로 고착화하며 이를 통해 ‘나’라는 주체를 수립한다. 잘 정립된 ‘나’는 아무데서나 입을 섹스기계로 만들면 안 되고 항문을 배설기계로 만들면 안 된다. 나는 나의 기관을 잘 제어할 때 비로소 나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를 두 다리로 걷게 했던 것, 직립 보행하는 인간 주체로 나를 훈련하게 만든 것도 바로 거대한 부모의 시선일 것이다. 그들은 한없이 먼 곳에서 서서 우리를 끊임없이 내려다보았다. 그 먼 시선으로부터 가까워지는 방법이 바로 네 다리를 두 손과 두 다리로 분리해내는 일이었을 테다.

2. 하품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 스스로를 자신의 기관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기관화된 신체와 ‘나’는 동일성 속에서 기관들을 주체의 아래 복속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대로 조절이 불가능한 부분들은 숨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와 동일성 속에서 복속되지 않는 기관들은 기관이라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시 「하품」에서 목젖과 목구멍이 타인에게 드러나 버린다. 이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바이다. 나의 목젖과 목구멍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순간 시 속 ‘나’는 당황한다. 쿨cool과 시크chic가 현대 도시인의 미덕이 된 시대에 이런 급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는 당혹의 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나의 입으로 가리고 있던 목젖과 목구멍이 드러나는 것은 외투의 헐거워진 단추가 떨어지는 것처럼, 가방이 열려 가방 속 물건들이 거리에서 제멋대로 뒹구는 것처럼 혹은 비밀로 수런스러운 당신의 마음들이 갑작스레 헐거워져 상대에게 노출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목구멍과 목젖을 타인에게 노출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스스로를 당혹의 상황에 빠지고자 의도한 ‘나’인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시에서 하품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다 본 스포츠신문을 다시 훑어보는

무료한 얼굴이 잠시 긴장하더니

갑자기 가쁜 숨이 몰아친다.

콧김와 입김이 심상치 않더니

코와 입과 턱에 근육이 돋더니

입이 공기를 크게 베어 물며 열린다.

턱뼈에 무게를 싣고

느리지만 힘차게 벌어지는 입.

얼굴의 중앙을 한껏 밀어올린 정점에서

입은 숨을 멈추고 잠시 정지해 있다.

포효하는 지루한 침묵.

나태 속이 짧은 긴장.

수축된 안면근육에 밀려 반쯤 닫혀진 눈에

눈을 치켜뜬 지하철 승객들이 보인다.

치켜뜬 눈 속에 목젖과 목구멍이 비친다.

얼른 입을 닫아야 할 텐데

둥근 공기의 힘에 밀려 닫히지 않는다.

질긴 고기로 단련된 이빨도

공기 한줌의 완력에 밀려 할 일이 없다.

다물려 할수록 커지는 입속으로

무덥고 탁한 것들이 거세게 빨려온다.

입을 찢듯이 벌려 제 일 다 보고 나서

공기는 슬며시 입에서 빠져나온다.

(…)

위의 인용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스포츠 신문을 보고 있는 것은 ‘나’라는 시적 자아이다. 그러나 이 시는 시적 자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다음 행에는 긴장하는 얼굴이 전면에 나타난다. 하지만 이 얼굴의 긴장은 얼굴 스스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굴이라 통칭하는 부분들의 움직임이 세 번째 행부터 묘사된다. 콧김과 입김의 발생, 코와 입과 턱의 근육의 움직임이 묘사되면서 얼굴은 얼굴을 이루는 수많은 부분들을 나타낸다. 얼굴은 얼굴이라 부를 수 없이 부분으로 조각난다.

이 부분들을 움직이며 드러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나’가 아니고, ‘얼굴’도 아니다. 바로 주체 ‘나’에 복속되어 있던 입이다. ‘나’에게 입은 나의 기관이라서 나의 의지대로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하지만 이 시에서 입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얼른 입을 닫으려 하지만 다물려 할수록 입은 더욱 커지고 이때 입은 공기와 연합하여 나의 얼굴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입이 벌어지는 사태를 감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 시는 과연 하품하는 것은 나인가 입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질문의 당황스러움을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마주해야 한다. 나의 신체의 기관이라고 생각했던 입이 더 이상 나에게 복속되는 기관으로서 자리, 고정성을 거부한다.

3. 기관을 찢는 입

기관으로서 자리를 거부하는 입의 활동.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통하여 일정한 고정성에 벗어나 나와의 복속 관계를 벗어나 질료적 흐름으로 공기와 함께 연합하고자 하는 입의 욕망을 보게 된다. 입은 이제 기관이 아니다. 일정한 선을 넘어서버림으로써 한없이 벌어지고자 하는 욕망들이다. 이 시에서 입은 기관 없는 신체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란 잠재성(virtualité) 차원의 개념으로 현실이 아닌 것이 아니라 현실(réalité)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현재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화된 것을 변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관 없는 신체는 끊임없이 변화되고 생성되는 새로운 힘, 욕망의 강밀도가 끊임없이 그 분포를 달리하며 신체의 잠재성을 고르게 분포되는 질료적 흐름의 극한 상태로 밀고 간다.

나와의 동일성 속에서 입은 다른 기관으로 전환되는 것에 제한적 자유를 갖는다. 하지만 김기택의 시 「하품」에서 입이라는 기관이 가진, 다른 종류로 변환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입은 시의 말미에서 다시 나와의 관계 속으로 수렴되지만 입이 나를 넘어서 벌어진 이전과 이후의 감각들은 다르다. 이후 나는 지하철 속 권태로운 질서를 이질적으로 느끼게 되며 그런 공기가 무겁고 텁텁하다고 느낀다. 기관의 다양한 변환은 신체가 이미 가진 능력이지만 이 능력은 감각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들어설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쪽으로만 쏠려 있는 강밀도의 흐름을 바꾸어 놓고, 이미 있던 길을 꺼내 놓는 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로서 ‘입’의 정체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가 탈주선과 관계있다고 한 것일 테다.

입의 움직임으로 인해 얼굴은 나와의 동일성을 상실한다. 우리는 동일성을 상실한 채 펼쳐지는 얼굴의 부분들, 신체에서 뿜어 나오는 김과 코, 입, 턱과 그것들과 함께 있는 근육들을 본다. 당신은 이것들을 사파리를 뛰어다니는 사자와 하이에나에게서 보았을 것이다. 들판을 뛰어다니며 드러나는 그것들의 근육과 다른 육체를 찢어발기며 드러나는 인간과는 다르게 느꼈을 힘. 우리는 이 힘을 시「하품」에서 얼굴의 부분들에서 인간 신체에 이미 있는 동물성들을 보게 된다. 뱃속은 그르렁거리고 구멍은 벌름거린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기관들을 찢어버리는 힘의 펼쳐짐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신체가 갖은 역동성이자, 인간의 신체에 이미 있는 역동성이자, 욕망들이다.

입은 이제 얼굴에 조차 복속되지 않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를 입이 얼굴을 찢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이 얼굴을 찢는다는 것은 입 스스로가 갖는 안면성이라 할 수 있을까. 입은 얼굴이라는 흰 벽과 검은 구멍이 없이도 스스로를 표현해 낸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 입은 동일한 질서 기관으로 기능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하며, 인간 신체에 이미 잠재해있는 역동성의 욕망을 표현해낸다. 신체는 이미 기관 없는 신체이다.

응답 1개

  1. h말하길

    재밌게 봤어요~ 하품이라니ㅋㅋ 참을 수 없는 것, 통제불가능한 것으로서의 하품은 정말 얼굴을 ‘찢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근데 한편으로 하품이 정말 안면성을 무너뜨리는 지점일까.. 고민이 들어요- 니체식으로 말하면 ‘하품하는 얼굴은 정말 가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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