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름(イルム)> 김임만씨와의 간담회 + 다큐 <카마가사키 권리 찾기> 상영회

- 벌레벌레배급사


<이름(イルム)>은 일본에서 가장 급진적인 일용직 건설노동자, 홈리스 운동이 일어나는 가마가사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활동가인 김임만씨의 재판과 그것을 지지하는 운동입니다.

오사카 아마가사키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 2세인 김임만씨는, 2009년 오사카 시의 하청을 받은 종합건설회사에서 재건축 일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으로서 통명(일본식 이름)이 아닌 ‘김임만’이라는 본명을 사용해왔던 그에게, 건설회사는 ‘가네우미’라는 이름이 새겨진 헬맷을 내밀었습니다. 이후 그는 삼 개월 반 동안 ‘가네우미’라는 일본 이름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하청업체인 건설회사와 원청인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일조선인에게 암묵적으로 일본식 이름을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에 저항하는 소송이었습니다.

3년 여에 거친 심리 끝에 오사카 지방 법원은 2013년 1월 30일 판결에서 ‘강제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소송을 기각, 원고 패소라는 부당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여기에 지난 2월 7일 김임만씨가 항소를 한 상태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가마가사키라는 슬럼에서 일용직 노가다 홈리스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로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벌레벌레배급사에서는 인디 다큐 페스티벌에 초청 받아 서울을 방문한 김임만씨에게, 그를 가로지르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아래는 2013년 3월 31일 카페별꼴에서 열린 김임만씨의 <이름(イルム)> 간담회의 기록입니다. 통역은 카게, 사회는 유선, 촬영은 지로, 기록은 구로, 진행은 죠스가 맡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임만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일주일 전에 한국에 왔고, 영화 상영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이번이 네 번째 상영입니다. 이 영화는 2007년 2월 1일에 시작해서 2011년 1월 가마가사키(釜ヶ崎)의 노동자가 거짓말 구인광고에 속아 후쿠시마에 가서 노동하게 되는 상황으로 끝납니다.
이 영화는 그러니까 4년 동안 가마가사키의 일용직 노동자와 노숙자를 대상으로 한 다큐입니다. 저 역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해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건물을 해체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현장은 여기저기 있었지만, 주로 집에서 가까운 건설현장으로 갔었죠. 거기에서 현금을 1만엔이나 1만 1천엔 정도의 입금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거기엘 주로 갔었습니다.
한국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노가다로 부르죠 일본에서도 도까다(どかた)라고 합니다. 가마가사키의 경우에는 아침 5시에 수배사(*인력사무소 담당자)와 노동자가 만나 현장으로 나갑니다. 수배사와 노동자가 만날 때는 가마가사키의 인력시장에서 만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전화로 보통 통화를 합니다. 전화로 나올 수 있느냐를 묻는 것으로 계약이 성립됩니다. 일용직 노동자라는 것은 아침에 고용되고 밤에 해고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함바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요, 영화의 마지막에 후쿠시마 장면이 나오는데(후쿠시마가 아니라 가까운 이바라키라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속아서 갔다는 데는 변함이 없지요) 후쿠시마 근처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 보통 그런 것처럼, 예를 들어 30일 계약을 맺으면 그 동안 함바라는 곳에 머물면서, 숙식비를 노동자가 물고, 30일 뒤에 함바에서 나올 때 월급을 받는 식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주소인데요. 가마가사키의 건설노동자들은 주소가 항상 바뀌니까, 가마가사키의 해방회관이라는 한 건물에 여러 명의 일용직노동자들이 주소를 두었던 것이었죠. 그 동안은 별 문제가 없이 40년 동안 오사키시에서도 그것을 인정 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계기는 후쿠오카 지방에 한 경찰이 신분을 바꾸려고 인터넷으로 해방회관에 등록되어 있는 주민등록 중 하나를 조작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 경찰관이 체포당한 일을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보도를 했던 것이죠. 그 때 신문에서는 좁은 건물에 3300명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크게 보도를 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이후에 오사카시가 잘못을 바로 잡는다면서 그곳에 등록된 주민등록을 삭제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는 거기에 등록되어 있던 노동자들은 선거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있어야 할 권리를 빼앗긴 사건을 찍은 것이 이 영화입니다. 이런 일은 가마가사키라는 특수한 경우에 국한되어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경우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부터 재일조선인인 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재일조선인은 60만명 정도 살고 있고 90% 정도가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도쿠야마라는 이름의 재일조선인이 나오죠. 그 분은 재일조선인이면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분입니다. 물론 그 장면을 찍으며 처음 만났지만, 그날 밤에 3시간 동안 그분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그 분은 본명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일본에는 지금 일본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이 30만명 정도 있어요.
일년에 약 1만 명 정도의 재일조선인이 국적으로 일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과의 결혼을 통해서 그렇게 되기도 하는데…… 일본인과 결혼을 하게 되면 보통 아이의 국적은 일본이 됩니다. 아이는 국적을 선택을 할 자유가 있기는 있지만, 일본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본 국적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국적인 재일조선인의 경우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신의 본명을 쓰겠다는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 중에서 일본 이름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재일조선인이라는 구분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점에 가도 강상중이나 손정의 같은 유명한 사람들의 책이 많이 팔리고 있을 뿐, 그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재일조선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 상황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1960년에 태어났고, 만으로 52세입니다. 재일조선인에 포함되는 각각의 사람들이 각자 이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일본식 이름과 본명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재일 조선인들 중에는 같은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조선식 이름을, 누구는 일본식 이름을 쓴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가족인데도 국적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민족임에도 언어, 이름, 국적이 다른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한국말을 못합니다. 일본교육 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와 역사의 문맥 속에서 민족학교를 탄압받아 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재일조선인의 90% 이상은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고, 10%만 민족학교를 다닐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데, 고교무상화에 민족학교만을 제외시키는 식으로 일본정부는 민족학교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제가 맨 처음 제 본명을 알게 된 것은 스무살이 넘어서 였습니다. 대학교 재일조선인 동아리에서 선배의 도움으로 제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 학교 안 동아리에서는 동포들과 이름과 역사, 한글을 공부하기도 하면서 정체성에 대해 깨달아가기도 하지만, 일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그런 경험들은 잊어혀갑니다.
오사카 지방에서는 민족학교가 아니라 민족학급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본 학교 안에서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모여서 그 안에서 본명을 알리거나 본명을 쓰겠다는 선언을 하거나 합니다. 아니면 대학교 안에서 민족동아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 그런 경험들을 갖기도 하지요. 그러나 사회에 나오면 그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저도 결혼을 하고 일을 시작하고 나서 본명을 쓸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고무회사에 일을 했는데 부모님은 다 일본이름을 쓰시면서 은행을 이용하고 사업을 꾸려나가셨습니다. 본명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10년전 회사가 넘어지고 나서 저는 다시 본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무너진 다음에 저는 다큐멘타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가마가사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 일을 했던 곳은 오오바야시구미(大林組)라는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큰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의 침략전쟁 때 여러 활약을 했던 회사였지요.
오오바야시구미의 역사는 과거일 뿐이라고도 생각하고 싶지만, 지금 현재의 이야기라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일했던 현장은 오사카 역 바로 옆에 있는 한큐(阪急) 백화점이었습니다. 한큐는 전철 회사인데, 백화점도 몇 개 가지고 있는 큰 회사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외국인등록증에는 일본식 이름이 써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배사한테 전화가 와서 본명이 아니라 일본식 이름으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갑작스러워서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모든 노동자의 지문을 찍고 일을 시키는 좀 이상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는 본명으로 지문을 등록을 했다고 하니, 수배사가 그렇다면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쓸 헬멧을 받기 위해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본명 스티커를 떼고, 일본명이 붙인 헬멧이 있었습니다. 제 본명 스티커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본명이 적힌 스티커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재판이 시작된 것이죠. 처음에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판을 시작하면서 오오바야시구미라는 회사가 외국인을 고용할 때 취업 신고 서류를 만들어야 했기 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강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영구영주권자라 그럴 필요가 없었죠. 그런데도 굳이 일본명을 강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2009년 5월에 재판이 시작되어서, 3년동안 19번의 변론을 가졌습니다. 이례적으로 긴 재판이었습니다. 피고인으로 세운 사람들은 오오바야시구미라는 회사, 하청회사, 그리고 원청인 일본 정부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혼자 재판을 시작했지만, 네 번째 재판에서부터 변호인들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조금 주목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30일에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완벽하게 졌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여러분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질의응답:

한정욱 – 새벽 5시에 출근 하신다고 했는데 퇴근은 몇 시인지, 일 하실 때 봉급은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김임만 – 일용직 노동이란 것을 설명을 드리자면, 건설 현장 같은 경우 날마다 어느 현장에 몇 명이 가게 되는지 모릅니다. 매일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수배사들은 노동자들을 매일 모아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아침 5시에는 모여야 8시에 현장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8시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5시에 거기로 가야 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2시에 일어났다는 노동자가 나오는데, 일찍 일어나서 그곳에 가야 일을 얻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수배사들도 새벽 3시쯤에 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매일 일찍 모아야 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보통은 한번 얼굴을 알게 되면 전화로 연락을 해서 나올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일당은 2007년, 2008년 까지는 1만엔에서 1만 2천엔 정도였는데, 리만 브라더스 사태 이후에는 8천엔에서 9천엔이 되었습니다.

윤여일 –재판은 1심만으로 19번의 변론과 3년 동안의 기간이었는지, 아니면 2심까지 포함해서 3년 동안의 기간이었는지 궁금하고요,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언론이나 사회의 반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변호인단이 그렇게 꾸려졌지 않을까 싶은데요, 재일조선인 단체나 다른 사회 단체에서 결합하는 방식이었는지…
김임만 – 19번이라는 것은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첫번째 재판만 그렇게 했었습니다. 다른 단체와의 결합이나 사회에 알리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재판을 하면서, 그것만으로 벅찼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와의 회의만 해도 35번 정도였기 때문에 재판에 집중하느라 바깥에 제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바깥에 알리는 일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처럼요..

고병권 –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어떤 법적이거나 제도적인 장치 안에서 억압이 있기 때문인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는 문화적이나 사회적인 문제가 있는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는 어떤 제도적인 벽이 있는지 사실 확인차 여쭤보고 싶고요, 두번째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창씨개명이나 식민지 시대에 있었던 여러 문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일본에서 본인이 느끼는 억압성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는지, 여기 나눠주신 자료를 보면 마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어떤 것을 본인이 계승하려고 하는 의지를 표출하신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임만 – 첫번째 질문, 제도에 대해서 답을 하자면 외국인등록증 같은 경우 일본식 이름을 같이 쓸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정부가 인정을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서류에 명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이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국적조항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취직을 할 때 차별을 받기도 합니다. 제 친구의 경우인데요, 이력서를 본명으로 내면 안되고 일본명으로 하면 된다는 그런 분위기도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역사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그렇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식민지문제가 아직 남아 있고,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창씨개명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당자사의 경우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2중 3중의 억압이 존재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 억압을 받으면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살 수 있는, 그러한 역사적으로 쌓여있는 억압적 상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름 문제로 말씀드린다면 재일조선인으로 본명을 자기 스스로 말하며 일할 수 있는 직업은 의사나 변호사 같은 것 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주장할 수 있고, 자기 권리를 말할 수 있음에도 자기 스스로 억압하게 되는 경향으로서의 억압도 있다고 봅니다.

?? – 일본식 이름을 강요하게 놔두었다고 정부를 향해 소송하셨죠, 그리고 재판에서 패소하셨는데, 거기에 대해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임만 – 여기에 판결문이 있기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원고 김에게 통명(*일본식 이름)의 사용이 강제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으며, 원고 김이 주장하는 국가의 부작위(不作爲)와 원고 김이 주장하는 정신적 손해와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피고의 나라가 입법상 행정상의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고 김에게 통명 사용이 강제 되었다고 하지만 특별영주권자에 대한 외국인노동자의 고용상황에 신고증이 필요없다는 것을 주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고 김이 통명의 사용이 강제되었다고 하는 것 등의 주장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재판의 원고는 저이고 피고는 오오야바시라는 회사와 하청업자, 그리고 국가인데, 하청업체인 수배자 회사의 사장이 재일조선인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같은 상황의 사람인 것이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본명을 스스로 말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억압구조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저의 재판의 지원해주는 사람들 중에서는 학교선생님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이 자신의 학생들에게 본명을 알게 지도를 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문제에 민감합니다.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생의 국적을 알 수도 있고, 그 때문에 이지메를 당하지 않게 지도해야 하기도 하고… 한 선생님한테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40년 전 하청업체인 수배자 회사의 사장의 누나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 선생님이셨는데, 본명을 쓸 수 있도록 가르쳐왔던 분이셨죠.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 분은 과연 40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가르쳐왔던 것이 옳은 일이었나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택균 –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것이, 제 사촌인데요.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본명을 쓰고 있습니다. 동경대학을 나오고… 전체 선생님의 발언은 한국사람이 한국인임을 부정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는데, 제 사촌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구요. 자기는 일본사회에서 성공하고, 또 본명을 쓰면서 살고 있지만, 진짜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말도 잘 못하고, 한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짜 한국인이 아니다, 라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체성을 내세워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정체성이라는 게 뭔가 하는 이중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회견문을 보면, 진술서를 쓴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런 어려움과 그러한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드시는 작업 이면에는 한편으로는 일본사회에 저항하는 한편,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데…
김임만 – 아주 어려운 질문입니다. 정말로요. 다큐멘터리를 하게 된 계기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자유로운 표현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해방으로서의 표현으로 다큐멘터리를 선택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것은 활영하는 사람이 있고, 찍히는 사람이 나뉘어지죠. 촬영을 하는 사람으로서, 촬영을 당하는 타자와 만나면서 자신을 포획해간다는 것이 다큐멘터리에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타리는 이렇게 상호적인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을 상영합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경우 한국어자막을 통해서 상영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면서 관계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재판이라는 것은 해보니 알게 된 것ㅇ기지만, 너무 귀찮고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재판을 하지 않았으면 다큐멘터리가 3편정도 더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의 과정에서 밝히고 싶었던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본식 이름을 왜 강요당하게 되었는지도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이름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그것을 쓰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재일조선인으로서 겪는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말씀드려야 할 게 많이 있지만 너무 깊은 질문이라서, 일단은 이 정도로 답변을 하겠습니다.

동현 – 홈리스 행동의 동현입니다. 오늘 저희 회원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시간을 잘못 알아서 늦게 왔어요. 그래서 앞의 이야기를 못 듣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보고 싶은데요. 한국에서는 건설일용직 노동자와 노숙자 운동이 아주 다르고,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깨너머로 듣기에 일본에서는 건설노동 운동과 홈리스 운동이 잘 교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실제로 이 두 운동이 어떻게 이어지고 연대하고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홈리스 행동 – 홈리스 행동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한달에 8만엔으로 일본에서 사는 이주 노동자 애기가 나왔는데 많이 힘든가봐요. 8만엔으로 일본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궁금합니다. 어떻게 사는지.
김임만 – 영화에서 나온 주민 등록의 문제는 건설 노동자와 노숙자, 그리고 지원자(활동가)가 함께 운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노숙자와 노조의 운동은 아주 떨어져 있죠. 이러한 운동의 사정을 보기 위해서는 가마가사키나 다른 일본의 인력시장의 운동의 역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 카페 벽에도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70~80년대 산야와 같은 도쿄 인력시장에서는 노조 운동하는 사람들이 노숙자 지원을 같이 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분리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8만엔으로 일본에서 생활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일본에는 외국인 연수생제도가 있습니다. 3년 간 연수를 하는 제도죠. 1년째는 한 달에 6만엔, 2년째는 한 달에 7만엔, 3년째는 8만엔을 받고 나서 본국에 돌아가는 제도가 있습니다. 예전에 알던 중국사람이 있었는데요, 그 분의 경우에는 처음에 브로커에게 빚을 지고 일본에 왔다고 합니다. 3년 동안 계속 일하면 150만엔을 본국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나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중국인 노동자 4명이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아주 싼 슈퍼에서 밀가루를 사다 만두를 만들어 먹고 외식을 전혀 하지 않았었습니다. 1~2년째에는 힘든 얼굴을 했었습니다. 중국에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임만 –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름> 재판에 대한 한국어 자료가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메일로 남겨주시면 한국어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활동을 지원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름을 남겨 주시면 소식지와 인터넷 블로그에 이름을 올리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제 재판과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이름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