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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리세대의 발견

- 말자 1

약관(弱冠)하지 못하여 이립(而立)이 꺽정시러, 스무살이 넘어서도 세상을 탓하다
– 말자1

‘내가 사토리세대?’

얼마 전, 일본에 ‘사토리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는 인터넷기사 제목을 우연히 발견했다. 88만원세대니 프리타족이니 떠들지만, 결국엔 명칭의 이면에 맥락을 같이하는 사회구조적 옳지않음을 바꾸어내는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또 우리가 아무런 세대이면 안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떠드는 강의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식상해질대로 식상해져버린 세대담론 하나가 또 유행처럼 번지고 있음을 알리는 기사였다.

사토리(さとり·得道) 세대 2010년 일본에서 출판된 책 ‘탐을 내지 않는 젊은이’에서 처음 저자가 명명하였고, 이를 아사히 신문에서 조명하여 살살 번지고 있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득도세대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는데, 자동차·명품 등에 관심을 쏟지 않고 돈과 출세에도 큰 욕심을 두지 않는 청년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주로 198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현재 10대부터 20대 중반의 장기불황 속에서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자란 세대가 해당되며, 마치 득도(得道)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젊은 세대라고 하여 득도세대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들은 기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돈 이외에는 벌려고 하지 않으며, 낭비를 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각자의 수준에 맞게 허황된 꿈을 꾸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며 산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들이 꿈이나 원대한 포부를 갖지 않고 지극히 현실에만 안주, 자가발전을 이루지 않으며 소극적인 경제생활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경제를 짊어져야 할 젊은이들이 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비난하며 전략과 마케팅을 강화하거나, 이러한 경향성을 개탄하며 20대들에게 다시금 모조건적 힐링과 도전을 부추기거나, 이러니 요즘 것들을 믿을 수가 있나 나라도 잘 살아야지 하며 방임하는 자들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뭐야, 대체.’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여태껏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신인류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제와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일까. 혹시 당신들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고 모르는 척했거나, 의식의 바깥에 두어 온 것은 아닐까. 사토리적(?) 삶의 양식을 영위하는 이들이 어디 20대 뿐일까? 정말 일본의 지금 20대는 사토리적이기만할까? 그들은 이러한 ‘이름표’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지금의 20대가 가지고 있는 여러 특징 및 경향성 중 ‘욕망하지 않음’에 방점을 찍고 있는 당신의 의도는 무엇일까?

‘나, 포기할래~!’

여러 뉴스기사나 사토리세대라고 불리우는 청년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사토리세대의 청년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 이상의 서비스와 제품을 소비하려고 용쓰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그러한 상태와 지위를 갖고 있는 자신을 한탄하거나, 자신을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지만,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는 것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불황 속에 태어나, 먹고 사는 것을 영위하기 위하여 노력과 좌절을 반복하며 삶을 소비하고 행복을 유예하는 부모 밑에서, 왠만한 ‘개인’의 노력으론 ‘내일의 만족’을 위한 기본적인 돋움판이 되어줄 ‘오늘의 생존’이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체득했을 것이다. 또한 부모의 욕망을 대리만족시키고 나의 삶도 바꾸어 보겠다는 앞서 태어난 형제자매가 눈물로 품었던 ‘장원급제 곧 신분상승, 그리고 나면 가족의 행복’이라는 신화 역시 산산이 부서지는 것도 목격하였을 것이며, 더 이상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 세상이 왔다고 냉소했을 것이다. 거대한 사회모순이 바뀌는 시간을 기다리기엔 내 한 평생이 너무 짧고, 그렇다고 이 기약없는 무한경쟁의 트랙 위에서 오늘이 치열하기만 한 부모와 형제자매처럼 삶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해도 안되는 일을 욕망하느라, 스스로 상처내며 살기보다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만 욕망하며 상처받지 않고, 그럴듯한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쿨하게 살기로 선택하기 되었을 것이다. 저항할 수도, 어떤 일을 해볼 수도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태산같은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트랙 위에서 뛰지 않고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실은, 포기 당한 욕망’

‘도박을 하지 않는다. 해외여행에 관심이 적다. 대도시보다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연애에 담백하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 독서를 좋아하고 박식하다.’ (아사히신문 3월 18일자)

프리터로 88만원을 이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먹고 입히고 재우려면, 도박도, 해외여행도, 대도시의 집과 인프라도, 연애도, 필연적으로 지출을 야기하는 일련의 과정들도 포기해야 하고, 다만 책을 벗삼아 포기한 모든 것들을 지적허영으로 충족시키며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얄리얄리 얄라셩 노래할 수 밖에 없는 노릇아닌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야, 같은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잖아!’하며, 마치 이들이 노력하지 않는 무능력한 한 개인인 것처럼, 편안한 시대에 나고 자라 진짜 어려움이 무엇인지 경험도 못한 엄살 많고 어린양에 익숙한 한 세대의 경향처럼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위에 부딪혀 깨어지는 계란을 눈 앞에 보고도 다시 그 바위에 부딪히겠다 하는 계란이 몇 알이나 되려나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계란이 바위에 부딪히지 않아도 되도록, 또는 부딪혀 깨어지더라도 그런대로 또 다른 방식으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 좀 더 모두가 힘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대 담론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어떠한 면면에나 딱 들어맞는 정답은 아니라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차피 불어버린 유행이라면 나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청년사람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언어가 ‘요즘 것들..말세야 말세..’하고 지나가는 가십거리나 누군가의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객관화된 언어를 온전히 부정할 수 없어 가슴을 저미는 시대의 묵묵부답에 정답은 아니어도 모범답안을 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앞서간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고 책임을 통감하고, 우리와 함께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도 욕망하지 않도록 세팅되어 태어난 인간은 단언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비단 청년의 문제만도 아닐 것이며, 갑자기 그런 청년들이 생겨난 것도 아닐 것이다. 아프다 외칠 수조차 없는 부모세대의 낮은 곳의 자들을 외면해온 결과이자, 우리가 꿈꾸며 애써 만들어가고 있는 미래의 불안한 예고편일 것이다. 거세하거나 거세된 욕망을 부정하다 손가락질하지 말고, 노력과 성취, 일상과 봄바람을 동시에 욕망할 수 있는 성숙함이 ‘20대’로부터, 20대를 둘러싼 ‘주변’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지금이라도 잠시 멈추는 여유와 반성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응답 2개

  1. 아이스말하길

    좋은글 잘봤습니다.

  2. 말하길

    말세라니! 내가 보기엔 말세의 방주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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