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2주 노동을 마치며, 세종대왕 땡큐.

- 들깨

원래 이주노동자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기분이 몹시 나쁜 일이 생겼고 산에 가고 싶어졌다. 말하자면 도피하고 싶어진 것이다. 한 2주쯤 떠나고 싶었는데 중간에 마감일이 있었다. 아직 쓰려던 글에 필요한 만남들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왜 갑자기 산에 가고 싶어졌는지 쓰는 것으로 이번 글을 대신하려고 한다. 그냥 감정적 투정에 불과한 글일 수도 있겠지만(그런 점을 감안해서 삐딱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여행하면서 이런 에피소드도 한번쯤 쓸 수 있겠지,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네팔의 한국어 사교육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얘기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한다.

네팔에 머물다가 한 친구의 소개를 받았다. 한국어 학원을 하는 사람이 한명 있는데 그의 집에 가서 수업을 조금 도와주면 방도 마련해 주고 밥도 집에서 먹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고 했다. 네팔에 오래 머물면서 뭐 할게 없을까, 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반갑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와 첫 대면을 했을 때 그는 자기자랑이 좀 심했지만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다. 그의 학원에 대려가 한국에서 온 친구라고 소개하며 ‘원어민 발음’을 들려달라고도 하고 고용허가제에 말해달라고도 했다. 그날 그의 집까지 데려가서 정성이 담긴 저녁식사도 얻어 먹었다. 그의 집 옆에 있는 숙소를 얻어 줄테니 거기서 자면서 밥은 자기 집에서 먹고 수업을 조금씩 도와달라고 했다. 사교육에 대한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약간은 설레기까지 하는 제안이었다.

내가 2주동안 살았던 집. 옥상이 있고, 마당과 밭도 딸린 3층짜리 집이다. 이 집이 위치한 곳은 수도인 카트만두의 시 경계를 지난 직후. 한국으로 치면 분당, 일산 정도 되는셈인데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3-4층짜리 건물을 짓고 많이 산다. 아래 두 층은 모두 세를 주고 있었고 지하실은 학원 교실로 사용했다. 내가 묵었던 집은 3층. 하지만 물이 부족해 1층까지 내려와 물을 길어서 3층으로 올려 물탱크에 저장하는게 하루 일과중 하나였다.

2주 동안은 마침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과 여행을 했고 그리고 나서 그의 집으로 옮겼다. 그가 집 옆에 있는 숙소를 구해준다 했었지만 꽤 비싸기도 하고 자기 집 마루에 있는 침대에서 자는 게 어떠냐고 했다. 딱히 그분의 돈을 더 쓴다고 해서 내가 행복할 것 같지 않았고 아낀 돈으로 차라리 집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같이 살면서 네팔의 중산층 가정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다. 그는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날 위해 방을 비워주기 위해 나가라고 했었다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가지 않았다고 내게 몇 번이나 말했었다. 즉, 돈이 아까운 건 아니니 불편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학생들을 만나는 건 즐겁지만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서 난 사교육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일체의 가르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르치는 것은 꽤 힘들었고, 정확한 한국어 표준발음을 들려주느라 목이 아팠다. 물론 그들이 한국에 가서 듣게 되는 ‘구어체’는 다른 것이겠지만. 그보다 더 힘든건 30분씩 한 시간씩 매연으로 가득찬 카트만두의 공기를 마시며 출퇴근 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자기 집에서 하는 수업 두 개 말고도 집에서 30분거리, 한시간 거리에 있는 학원들에 수업이 주 6일씩 있었다. 그는 집안 대소사를 챙기기 위해 내게 수업을 맡기는 경우가 잦아졌고 그의 부업인 가이드를 하러 나가면서 내게 모든 강의를 맡기기도 했다.

네팔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의 학원을 홍보하는 내용의 한 시간 프로그램이다. 사진 속의 여성분이 그의 딸로 이 프로그램의 아나운서를 맡고 있다. 사실 날 이용해 광고하는 상황이 맘에 안들었는데 어쩌다보니 저런 상황으로 흘러갔고 거절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네팔 라디오 88.8MHZ였고 프로그램 시작 전에 딸 분과 미리 얘기하면서 스크립트를 적어서 네팔어로 한시간 가량 인터뷰를 했다. 날 광고에 이용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마다 회의감이 커졌고 보상심리가 생겨났다. 이 광고를 위해 저분이 라디오 회사에 준 돈은 한달에 11000루피(14만원정도)인걸로 들었다.

가르치는 피곤함 보다는 집에서 부인분과 부딪히는 피곤함이 더 컸다. 애초에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이것저것 읽고 공부하고 쓰는 시간을 많이 가지기 위해 집에 있었는데 하루 종일 집에 계시는 부인은 그게 탐탁치 않았던 것 같다. 완벽하게 분업이 이루어진 가부장제 집안 답게 내게는 부엌에 들어오는 걸 허락지 않았고 대신 내가 배고프기도 전에 계속 뭔가를 만들어서 내게 갖다 주었다. 또 물도 큰 문제였다. 물이 부족한 카트만두라 가사노동의 상당부분이 물을 떠오는 것에 소모된다. 그래서 내가 집에서 양치라도 할라치면 부인분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눈치를 보느라고 봐서 내가 이 집에 머무는 16일동안 샤워는 단 1.5번(그것도 살짝 몸에 물을 묻히는 정도의 찬물 샤워였다), 빨래는 속옷 두 번, 겉옷 한두 개 밖에 안했다.(참고로 빨래를 세탁소에 맡기면 1키로에 600원쯤 한다) 오랜 여행을 하면서 웬만큼 냄새엔 이골에 난 나도 스스로가 냄새가 나서 하체만 씻기도 할 정도였다. 나름 아껴 쓴다고 했지만 난 계속 눈초리를 받았고 억울한 감정이 들어 물을 사올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먹을 수 있는 정수된 물 20리터가 한국돈으로는 650원밖에 안하는데 말이다. 650원 아끼려고 이 고생을 한다니. 돈으로 뭔가를 계산하게 하는 세상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는구나….

갑자기 그는 유명 출판사에서 연락을 받았다며 나를 출판사 사무실로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나는 거기서 한 20종류쯤 되는 한국어 학습교재를 봤는데 하나같이 오타 투성이에 말도 안되는 표현들로 가득했다. 가령 제일 잘 팔린다는 “45일에 끝내는 한국어 자신을 배웁시다”라는제목을 비롯해서 말이다. 디자인은 중학생의 레포트보다도 못했다. 내게 출판을 도와줄 수 없냐고 해서 적어도 오타는 없게, 말도 안 되는 표현은 없게, 그리고 조금 예쁘고 깔끔하게 해줄 수 있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설명도 짤막하게 작성해 주기로 했다. 두 분은 흡족해 하며 3개월 동안 책을 쓰기로 하고 나왔다.

네팔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한국어 교재. 45일에 끝내는 한국어 자신을 배웁시다라는 말은 Learn Korean myself의 번역인 것 같다. 이 저자분을 한번 뵀는데 한국에서 4년정도 일하고 오신 분이셨다. 이 외에도 어떤 한국어 교재를 봐도 오타는 쉽게 발견이 됐다. 저작권, 대필 등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서 한국의 책을 그대로 짜깁기한 책, 남의 책들을 짜깁기한 책, 저자가 자신이 쓴 내용도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사기도 많아서 내가 묵었던 집 분도 예전에 쓰신 책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출판사에서 책을 그냥 들고 와서 집에 수백권이 쌓여 있었다.

그가 내게 얼른 책을 써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저자가 먼저 좀 작성을 해 오셔야 제가 확인도 하고 타이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 그가 내가 먼저 책을 다 쓰면 자기가 번역을 하겠다고 했다. 아, 당황한 나는 “책을 아예 제가 쓰는건가요?”라고 물었고 그는 웃으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책을 구성하고 쓰는 것과, 누군가 내용을 정해주면 타자치고 확인하는 작업은 분명 다른 것이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는데, 그는 진지했다. 그가 책을 쓰는 대가로 준다는 만루피(13만원)는 탐나는 돈이 아니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내게 앞으로 있는 3개월의 기회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승낙했다. 사실, 여기서 진작에 관뒀어야 했다.

그는 갑자기 그 스무 종 정도의 책을 내게 가져다주면서 이 책은 어디가 좋고 저 책은 어디가 좋고 문법은 어느 책을 보시라 했다. 똑같으면 안 되니까 예문을 바꿔줄 수 있냐고 했다. 짜깁기를 해달라는 것인데 저작권 개념이 희미한 네팔이라는 핑계로 그에 대한 윤리적 고민은 치워 뒀다. 근데 자꾸만 늘어나는 참고도서의 목록에 내 노동시간은 엄청나게 길어졌다. 네팔에 여행 와서 한국어 타자 연습을 내가 왜 하고 있는지,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만나겠다고 왔는데 왜 노트북만 쳐다보며 한국어 교재를 짜깁기 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몰려왔다. 네팔어 타입정도는 직접 하시라고 말하는 내게 자기는 타자 배우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솔직히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고 했더니 한국어 수업은 안 나가도 된다고 ‘배려’해줬다. 그러면서도 네팔어 번역을 할 때(물론 타자는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나도 같이 가야 한다고, 자기는 워드프로세서를 쓸 줄 모르니 컴퓨터로 같이 검토해보자고 하며 내게 계속 추가적인 품을 요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내게 더 나은 책을 요구했다. 내가 애초에 여기 책 쓰러 온 게 아니라 학생들 만나러 온 건데 하는 빡침…저자는 당신이에요 하는 빡침…

네팔 분들이 한국어능력시험을 위해 학원에 많이 다닌다. 적어도 수백군데는 되는 것 같았다. 학원은 대개 3-4개월 코스로 진행되는데 학원별로 차이가 있지만 5천-7천 루피정도의 수강료(한국돈 6만5천원-9만원)를 받는다. 보통한달 월급이 학교 교사가 15000루피정도 되므로 적은 돈은 아니다. 시험직전이 되면 유명한 학원은 만루피가 넘게 받아도 가득가득 들어찬다고 한다. 한국어 능력시험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서 학생들은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데 정작 한국에 가면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실패한다. 이유는 대화위주보다 시험위주로 공부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한국어책은 공손한 말투로 공부하게 돼 있지만 고용주들은 대부분 반말과 명령조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위 책은 내가 본 책중엔 유일하게 그런 ‘현실’을 담고 있다. 강사들은 대부분 실제로 한국에 가서 듣는 언어들을 학생들에게 말해준다. 대부분 강사들이 이주노동자 출신이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구석에 앉아서 그런 짜증을 달래며 때 아닌 집필에 몰두하고 있을 때 부인이 와서 물 좀 길어 오라고, 방 좀 치우라고 꾸중하면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녀가 나를 부르는 호칭 아저씨!!! 는 며칠을 들어도 적응이 안됐다. 그녀가 짜증을 담아서 몇 번씩 불러야 내가 돌아본 것도 서로의 짜증을 키우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아저씨! 아줌마!는 그들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 때 들었던 말투들일걸 생각하니 마냥 미워할 수는 없긴 했다. 그가 깔아준다 했던, 내일이면 온다던 인터넷은 14일 동안 오지 않았고 내 짜증은 커졌다. 여러 가지 용무를 해결하러 나는 인터넷을 하러 시내에 나가야 했다. 80여명이 꽉 끼어차서 성추행이란 단어가 무색해지는 버스(조금 큰 마을버스 정도의 크기)를 타고 시내에 갔다 와서 녹초가 되고 나면 인터넷이란게 이토록 접속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결정적으로 이 집에 옮겨 산 이후로 나는 100군데가 넘게 뭔가에 물렸다. 빈대를 의심했지만 집주인은 그럴 리 없다고 했고 나도 아니길 빌었다. 그저 모기가 좀 많으려니 했다. 3일전 새벽 세시에 잠이 깬 내가 불을 켰을 때 나는 모기장을 바둥거리며 올라가는 빈대 세 마리를 찾아서 직접 눌러 죽였다. 죽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 아마도 내 것이었을. 빈대를 경험해본 사람은 자기 피를 먹은 빈대 세 마리를 죽인 후에 기분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빈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인터넷 검색 창에 “인도여행, 빈대”라는 검색어를 찾아보시길 바란다.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속담을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해했다.

난 그에게 빈대가 나왔는데 어떻게 할까 물었다. 그가 한 첫마디는 “그거 당신 가방에서 나온거에요” 였다. 물론 지난 6개월간 빈대에 물리지 않았던 내가 들고 다니던 가방에서 빈대가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치자. 그가 두 번째로 한 말은 “빈대같은거 우리집에 없어요”였다. 그래, 그의 입장에선 억울하겠지. 하지만 중요한건 지금 나왔다는 거였다. 어디서 나왔느냐를 따지자는 게 아니었다. 그가 다음날 내게 말한 것은 네 몸에 잔뜩 난 것은 알러지라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알러지성 두드러기 같은 건 앓아본 적이 없는 나지만, 여긴 네팔이니까 어쩌면 그 말을 믿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직접 눌러 죽인 빈대의 기분 나쁨을 잊을 수 없었다. 모기장에 얼룩진 핏자국을 보면 더욱 그랬다.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라고 헛웃음을 지으며 집을 나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오기 며칠전에 학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학원매니저가 내게 자랑스럽게 내이름이 들어간 새로 만든 간판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내게 허락을 구한적도 없고 내게 얘기해준 적도 없었지만 자랑스럽지 않냐는 태도로 내게 이것을 보여줘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Kim sungmin이 내 본명이다) 이주동안 30명가량의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네팔은 9월에 한국어 능력시험이 있다. 아직 공식 발표가 나지 않았고 발표가 나는 5월부턴 학생이 많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 위험과, 네팔에는 농축산업만, 그것도 적게 쿼터가 주어진 것 때문에 한국어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 한다. 쿼터를 정하는건 애초에 한국의 산업인력공단 맘대로고 네팔에선, 그리고 그 밖의 송출국들에서는 그 발표만 기다린다. 그리고 그 발표에 따라 이와 함께 형성된 사교육 시장의 희비가 달려있다.

애초에 방을 구해준다는 건 그였으므로 나는 방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집 근처가 아닌 여행자 거리에 가는 게 여러모로 더 편할 것 같았고 그곳에 숙소를 구하고 일주일에 한두번씩 오면 (방세를) 얼마나 주실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는 거기 가면 올 필요 없고 책이나 완성하자고 했다. 처음에 아주 미약하게 시작한 100쪽짜리 책은 이미 300페이지 분량에 모든 최신 한국어 교재를 다 반영하고 오디오 씨디도 있으며 한국에서 만든 외국인용 한국어 교재의 자료까지 반영된 방대한 기획이 돼 있었다. 이제까지 열흘을 넘게 들여 만든 70페이지 정도의 초고가 아까웠지만 앞으로 들일 내 고통이 더 클 것 같아서 책은 엎었다. 나는 이곳에 애초에 책을 쓰러 온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엎었다. 불만만 늘어놓고 계속 말을 바꾼다며 그냥 가라고 했다. 나는 이게 그가 정말 화나서인지, 아니면 예상보다 한국어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이 없을 것 같아서 문득 내게 지출하는 돈이 아까워져서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밤, 그러니까 오늘 밤이다. 그는 술을 잔뜩 먹고 내게 돈을 밝힌다고 욕했다. 자기 아들은 내 집에서 불평 안하고 살았는데, 그리고 불편하면 니가 돈 벌어서 살으라고 했는데 나는 여기 와서 불만만 얘기한다고 날 혼냈다. 그가 내게 한 달 숙소비로 들여야 하는 돈 5만원은 한국에서 내가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이라 말하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자 그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면 왜 돈얘기를 하냐고 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자본주의의 상식을 그는 이해하지 않았다. 돈 벌러 온건 아니지만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내 입장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난 또한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님을 지적했다. 그의 술 취하고 화난 말에서 내 말을 오해한 것이 너무도 많이 보였고 난 그것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한국말을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내가 잘 못 이해한 거라고 날 비난했다. 제가 말했는데 왜 제가 이해를 못하냐고 항변하고, 한국말을 못 하는건 죄송한 건 아니라고 달래고, 내게 방을 구해준다고 한 건 그였음을 계속 상기시켰지만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결심한 듯 했다. 내 설명이 그에게 들리지 않음을 깨닫고 대화할 의지를 상실했다.

엎어진 출판은 그에겐 아쉬움 이상은 아닐 것이다. 네팔엔 책 쓰고 돈 못 받는 일도 비일비재한데 선인세 안 받은 책 하나 엎어지는 게 별일일까. 그는 한국말을 반 정도밖에 못 알아 듣지만 카트만두에서 잘 알려진 명강사였다. 새삼 느끼지만 말하는 실력과 가르치는 실력은 다른 것이다. 그는 비록 자기 손으로 한국어를 치지 못하고, 심지어 네팔어도 치지 못하지만 몇 권의 책을 쓴 저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금이 300프로나 붙는 자가용을 장만해 운전수까지 둬가며 하루에 14개의 한국어 강의를 뛰었던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는 내게 책 편찬의 대가로 주기로 한 돈보다 두 배 쯤 되는 돈을 주차장에 차가 몇 대 더 들어가는 공사비로 지출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즉, 그는 충분히 잘 사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난 아쉬움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2주였지만, 그리고 끝은 좋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도 화기애애 했던 순간들이 있다. 네팔의 상류층 답게 아들은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고 딸은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분과 결혼했다. 사진은 네팔의 새해, 그러니까 지난 4월 14일(네팔 날짜로 2070년 1월 1일이다)에 주인집 부부와 딸 부부, 그리고 외손녀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다. 이날은 외손녀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상은 지난 2주 간의 동거에 대한, 그러니까 2주노동자였던 내 쪽의 입장에서만 기록된 편파적인 기록이다. 아직 난 쫓겨나진 않았고 짐을 싸둔 상태이다. 오늘 따라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오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나갈 내 신세가 뭔가 처량하지만 다시 여행자로 돌아온 신선한 기분도 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빈집이라는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에서 살아가는 것도 벅찬데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나이도 30살 정도 차이가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의 집에서 사는 게 애초에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 한국어 권력을 이용해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내 알량한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여러 가지 착잡한 마음을 담아두며 글을 마친다. 어쨌든 이런 경험도 세종대왕 덕분이다. 세종대왕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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