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스테인레스 접시에 담긴 죽음Ⅰ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1. 와, 저 따위 민중……

내가 알기로 그 할머니는 손주 아이 둘밖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명절에 어디 갈 곳이 없는 내가 임대단지에 사는 그 아이들을 명절날이면 꼬박꼬박 보곤 했으니 그로써 할머니 말을 믿을 증거도 충분하다 싶었다. 그런 날 아무데도 갈 곳 없고, 아무도 찾아줄 이 없으니 그런 할머니와 아이들이 무슨 기막힌 일을 한다 할지라도 실은 이해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긴 하지만…..

할머니는 참 힘들었다. 남의 집 할머님께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내 생전에 그렇게 성질 급한 할머니는 처음 본다. 뭐 하나를 알아봐달라고 말을 하고 나면 1시간도 채 안돼 벌써 바리바리 전화를 하신다. 그래서 할머니 번호가 뜨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예사롭지 못한 병을 얻고 말았다. 하지만 졸라대는 것이야 어디 그 할머니뿐이겠는가? 무언가 부탁하는 일이야 다 다급하기 마련이므로 서두르는 것 쯤이야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나도 그런다. 그러므로 이 심장병에는 서두르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인가도 있는 것이다.

그 다른 것은 할머니의 의심증이다. 할머니는 무슨 일이 되었건 사람들은 당신을 하찮게 여기고 속여 먹으려 든다고 믿으신다. 그래서 늘 남을 못 믿는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 일이 뜻대로 안되면 당신한테만 일부러 야박하게 굴어서 그런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끼리는 다 꿍꿍이로 쪔 쪄먹는 짓을 하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 될 일도 힘세고 백 쎈 사람이 가서 부탁하면 안 될 것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 할머니의 지론이다. 그러니 할머니는 늘 일을 미루면서 “그라니 선상님이 가서 쪼까 해주시오. 나는 암시랑도 못 허니께….”하고 할머니보다 배운 것도 많고 힘도 있다는 날 갖다 밀어붙인다. 그러니 내가 가서 할머니 원하는 대로 척척 일을 못 해오면 당신이 요구하신 게 부당하거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이 없고 별 볼 일 없는 못난 인간이라서 일 꼬라지가 그 모양, 그 꼴인 것이 되어 버린다. 물론 딱 대놓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 무어라 쭝얼쭝얼 거리시며 혀을 쳇쳇 차시고 한숨을 내쉬는 편이 아무리 둔한 인간이래도 네가 그 모양으로 일 골을 해 올 줄 알았다고 은근 한심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래야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도록 한다. 나는 분명히 한 번 알아는 보겠으나 어려울 것 같다고 이미 말을 한 바 있다. 왜냐? 딱 봐도 될 것 같지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성의를 보이려고 내 딴에는 시간 내고 품을 내서 알아본 것인데, 형식적으로 “됐다‘고 하는 감사의 말이 그냥 인사말이 아니라 ’됐다, 그럴 줄 알았다‘는 비아냥 조의 말로 들려서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길도 없고, 떨리는 심정을 가눌 길도 없어서 열을 삭히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을 앓기도 했던 것이다.

아직 스스로가 대의명분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는 미몽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소싯적에는 ‘내가 이 따위 민중을 섬기려고 내 젊음, 내 인생을 그 따위로 살았나’하는 쓸데없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하기도 했었다.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으려는 나에게 그 늙으신 민중은 모습은 소화하기에는 너무 얍실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물론 아이들이 공부방에 다니고 있어서 만나게 된 인연이다. 지금 한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아이는 고 3이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봐 았으니 좀 부풀려 이야기를 하자면 할머니와 파랑새가 함께 아이들을 키워온 셈이나 다름없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아시면 할머니는 “무신…아니 .해준 것이 뭐 있다고 키워주고 말고 할 것이 있어,,,내 참말로 기가 막혀서…”하실 것이 뻔하다. 그냥 세월이 그렇다는 거다. 나도 공치사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할머니는 손주 아이 둘을 두셨다. 할머니가 그렇거늘 아이들이라도 이뻤으면 괜찮으련만, 할머니의 두 아이들도 그렇질 못했다. 아니, 차라리 할머니 소원대로 아이들이 제 몫을 척척 해낼 수 있도록 번듯했으면 할머니가 이렇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아니 할 말로 딱 봐도 부족한 티가 나는 아이들이었다.

아마 아이들이 그래 보였던 이유는 발음에 문제가 있었던 탓이 더 클 것 같다. 두 아이 모두 턱관절 구조가 조금 돌출되어 발음이 불분명한 특징이 있었다. 또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이들의 생모가 ‘전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어디가 좀 모지랜 사람’이었다고 하니 분명 가계의 유전적 소인도 있었던 듯하다. 그래도 생모가 아이들을 낳고 2~3년 정도는 함께 살았던 모양이나 결국은 가출을 해버려 갓난아이 적부터 할머니가 두 아이를 거의 손수 기르다시피 했던 모양이다. 지금 하는 것을 보면 그 ‘모지랜 며느리’가 못 미더워 두 아이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하셨을 것 같다. 할머니가 전혀 글도 모르시고, 또 우리를 만났을 때 아무런 경제활동 없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나오는 생계보조비에 의존해서만 생활하시던 참이어서 할 수 없이 공부방에 아이들을 보냈지, 안 그랬으면 벌써 다른 길을 찾으셨을 터이고, 공부방을 보내면서도 젊은 교사들이 하는 냥이 못마땅하고 탐탁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참고 넘긴 것을 잘 아고 있어 하는 말이다.

할머니의 또 다른 특징은 남들 흠은 엄청 잘 보면서 당신네는 늘 변명할 거리가 잔뜩 있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그렇게 타박이 심하면서 아이를 낳고 금방 집을 나갔다고 하는 아드님에 대해서는 일절 반구가 없다. 그러나 가만 눈치를 보면 그런 며느리를 할 수 없이 들일 수 없었을 만큼 아드님의 상황도 그렇게 온전하지는 못했던 눈치다. 그런 아들조차 며느리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집을 나가버리고 지금껏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하나 없는 눈치다. 하지만 누가 할머니 속내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뿐이고, 할머니가 너 정도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고 결정하면 나로썬 도리가 없는 일이다. 나 따위. 이렇게 한심한 공부방 교사 따위가 저 늙은 여인네의 마음을 어찌해볼 수 있겠는가?

아무튼 할머니가 공을 인정하든 안 하든 그 아이들의 곁에는 지금까지 파랑새가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대소변 실수를 할 정도로 모자람이 있다고 하는 아이들의 장애 진단을 받게 설득한 것도 파랑새고, 졸업을 시켜서 취업을 도운 것도 파랑새다. (할머니는 모르시므로 이 자리에서라도 공치사를 좀 해야겠다. 큰 아이를 취업시킬 작정으로 나는 지난 2년여 동안 격주 일요일에 하는 자원봉사자들과 아이들 영어 수업을 하였다. 조그만 중소기업의 고위임원이 하는 봉사활동이다. 일요일에 아이들 보러 나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돈이 있는 사람들이니 혹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길이 있을까 하는 속셈을 품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다. 실은 게으름이 많은 탓에 영혼구제를 영원히 해주고, 영생을 줄 수도 있다는 훌륭한 보험마저 일요일 휴식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사양을 해오던 난데 혹하고 넘어간 것이다. 그래도 봉사자들이 소탈하시고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많아서 힘든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봉사자 분들게 부탁을 드렸던 첫 번째 일이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데 필요한 경비를 지원받는 일이고, 두 번째가 학원 다니기를 소원하던 다른 아이의 학원비를 지원받는 것이며, 세 번째가 할머니의 장손을 그 회사에 취업시키는 것이었다. 그 외 봉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먹는 간식과 가끔 영화를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나는 힘들게 만난 지니의 세 가지 소원 중 두 가지나 할머니 댁을 위해 썼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마음을 그 민중은 알지 못한다. 무서워서 공치사를 차마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라도 한다.)

2. 아이구 지긋지긋한 세월!

할머니의 건강도 나날이 안 좋아지셨고, 큰 아이 취업도 시켜서 전화가 뜸하니 한결 느긋해진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할머니 며느리나 된 듯 한 세월을 살았던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하도 아이들이 경험도 없고, 또 다른 아이들처럼 척척 책을 읽어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니 내 딴에는 마음을 쓴다는 것이 영화나 연극이나 어디를 많이 데리고 다니며 견문을 넒혀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 초보 공부방 교사인 나의 판단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차가 없어서 학교에서 공부 마친 아이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공연을 하는 대학로나 남산의 국립극장까지 아이들을 끌고 가서 공연 하나를 보여주려면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그 때는 정말 공부방이어서 정부 지원이 한 푼도 없었던 시절이다. 남들이 도와주거나 내 돈을 털지 않으면 무엇 하나 할 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작은 지원 단체에서 공연 같은 것을 신청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지원신청을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새끼들 입에 뭐 들어가는 것만 봐도 흐뭇하다고 내 딴에는 애들 육신이 아니라 영혼에 밥 들어가는 모습이 뵈는 것만 같아 힘든 줄도 모르고 아이들을 끌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하도 지원신청을 해대니까 나중에는 그 단체의 홈페이지에 아예 대놓고 남들 생각해서 작작 하라는 말이 올라올 정도였다. 신청을 하는 나나, 그런다고 그런 말을 올리는 그 쪽이나 생각해보면 가관이지만 아무튼 그러고 살 때였다.

그렇게 허겁지겁 애들을 끌고 가려면 할머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할머니가 애들을 안 보낸다고 할까봐, 또 늦는다고 타박을 줄까봐 벌써 허락 전화를 하기 싫어 몸서리를 치는 일부터 시작이 된다. 할머니는 공부 안 시키고 애들을 쓸 데 없는데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데리고 나가면 할머니네 얘들이 제일 신나하는 축에 든다. 제 또래보다 훨씬 지적 능력도 떨어지고 발달 수준도 느리니 애들이 겅중겅중 신나서 천방지축으로 군다. 어디 가서 없어지고 난리를 부리다 늦게 돌아오게 되는 데는 할머니 애들 탓이 제일 크다. 그래도 전찰을 타면 꼭 돌아오는 중간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 건 할머니네 집이다.

처음에는 물론 좋게 시작한다. “선상님, 언제 오시남요?”이렇게 시작한 전화는 처음에는 한 몇 분 간격으로 “인자 어디세요? 허이구 얘들 씻겨서 재워야 되는디, 낼 학교까지 가야 할 아이들을 뭐 한다고 그라고 델꼬 다닌다요?” 하는 푸념으로 이어지며 어디냐는 확인 전화가 발발이 이어진다. 이때쯤 되면 내려서 달리는 전철을 뒤에서라도 더 밀고 싶은 심정이 된다. 전화기 울리는 소리만 봐도 경기가 날 지경이고, 할머니는 점점 더 톤이 높아지다가 막 소리소리를 질러대며 열이 나서 당신 하실 말씀만 히시고 전화를 툭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앞에서 태평스레 앉아서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공연히 열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아니 누구 때문에 더 늦은 건데…. 아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건데…….내가 다시는 쟤들 데리고 오는가 봐라. 한 번만 더 데리고 오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하고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간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뭐라고 할 수 없다. 성질이 머리 끝까지 치받으면 할머니가 아이들을 때리는 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겁 많은 아이들이 얼마나 벌벌 떨까 싶어서다. 괜히 보러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 온다. 할머니는 대놓고 전화기에 대고 “선상님, 그러는 거 아니요. 갸들이 얼매나 불쌍한 아이들이라고……없는 집 아이들이라고 공부도 안 시키고 그딴 데나 델고 다니고 그라는 거 아니요, 사람이 그라면 못 쓰요.”하고 벌써 고함을 지른 뒤다. 연극이 뭐라고, 뮤지컬이 뭐라고 어찌 또 유혹을 못 이기고 아이들을 끌고 왔을까 후회가 막급이다. 하지만 다 벌어진 일이다.

하루는 참다참다 못해 할머니 너무 하신다고 전화에다 대고 나도 막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러다 울음이 터져 막 흐느꼈다. 뭐 생각해보면 완전 며느리가 “어머님 해도 너무 하셔요, 흑흑” 이런 버전이었던 것이다. 그러곤 끝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시절이 지나고도 우리는 아직 함께다.

3. 30년 만이라고, 못 믿겠는데

그렇게 첫째를 졸업시키고 이제 둘째만 건사하면 내 볼일은 끝난다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실은 둘째도 구로에서 함께 만든 청소년전용지역아동센터로 진작에 옮겨 다니게 하려고 했다. 아이나 우리나 다 원한 일이지만 아직도 나한테 뜯어 먹을 것이 있다고 느끼셨는지 할머니가 반대를 하셔서 파랑새를 그대로 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결 느긋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2월에 모처럼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30년 만에 동생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가붙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왠 친동생…….이 또 무신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아 또 뭔 일이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할머니 동생이라고……그것도 암에 걸려 30년만에 나타난 ……….(To be continued! Granny will be back!)

응답 1개

  1. 김금옥말하길

    선생님..마지막 구절에서 절로 뻥 터지는 웃음소리 들어셨나요….그리고 한 번 더 눈물을 떨굽니다…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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