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모방으로서의 과학

- 남창훈(면역학자)

20세기 후반 이래 첨단 생물학의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모방이라 할 수 있다. 자연현상과 생명현상을 모방하여 소기의 성과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생물학이 모방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를 한 가지 들어 볼까 한다. 바로 항체공학이다. 거의 대부분의 생물학 연구가 자연의 사례를 탐구하고 그 사례가 작동하는 원리원칙을 따르면서 거기에 한 두 가지 변용이나 연구자의 아이디어를 개입시킴으로써 생명을 활용한 응용(Biotechnology)을 실현시켜낸다. 이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항체공학이라 생각된다.

암은 몸 안에서 어떠한 연유로 인해 만들어진 돌연변이가 세포 성장과정이나 세포 자연사과정에 중대한 변화를 유발시킴으로써 발생한다. 몸 안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빈도는 그리 크지 않으며,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여러 통제 기작을 통해 제거되어 발암에 이르는 빈도를 다시 대폭 줄여준다. 만일 몸 안에서 아주 비일비재하게 돌연변이가 발생한다면 인간이라는 생체는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수명을 영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몸 안에서 예외적으로 높은 빈도의 돌연변이가 보장되고 때론 오히려 촉진되는 기관이 하나 있다. 비장이 그것이다.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침입하는 외부 물질들이 인체 내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과정을 차단시켜낼 목적으로 항체가 만들어진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인체 내로 침입해 들어오는 외부 물질은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각각의 물질들에 항체가 특이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선 외부물질들의 종류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항체가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한다. 바로 이 과정이 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외부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여러 물질들에 대응하기 위해 인체는 끊임없는 돌연변이를 명하고 이를 활용한다. 그리고 그 결과 다종다양한 항체들이 만들어져 우리의 신체는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비장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오랜 시간 동안 눈 여겨 보아 온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세자르 밀슈타인이다. 그는 비장내의 Germinal center라는 곳에 분포하는 B림프구에서 빈발하는 돌연변이가 어떤 기작을 통해 어떤 양상으로 벌어지는지를 대략 30년에 걸친 시간 동안 연구하였다. B림프구는 항체를 만들어내는 세포이다. 그 내부에 있는 항체 유전자에 변이와 조합과 교차 등이 발생하면서 특정 항원에 대한 항체가 우연의 논리를 통해 만들어 지는 일이 벌어진다. 항원과의 친화성이 있는 항체를 보유한 B세포들이 골라지고 그것들이 대량으로 증식을 한 다음 다시 변이와 교차 등이 벌어지고 또 그 가운데서 친화성이 가장 높은 것이 선택되어지고 그것이 증식하여 일정한 숫자에 이르게 되면 일차적인 면역반응이 완료된 것이다. 그렇게 선택된 B세포들은 기억력을 지닌 것처럼 작동하여 다시 동일한 종류의 항원이 인체에 침입하였을 때 원점에서부터 변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곧장 그 항원에 작용하여 중화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일련의 현상들은 아주 많은 변수들이 작용하고 그 결과 아주 복잡한 기작을 통해 이뤄진다. 나는 일생동안 이 수수께끼 같은 면역현상을 투명하게 밝혀내기 위해 연구에 매진한 세자르의 집념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가 간 길을 보면 험산준령을 한 발짝 한 발짝 한 걸음에 10분 20분을 들여 올라가는 산인의 자태를 떠올리게 한다.

요즈음 심심찮게 등장하는 첨단 신약 가운데 하나인 항체신약의 개발은 이러한 밀슈타인의 오랜 탐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즉 인체 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실험실에서 실험관내에 그대로 옮겨 놓기 위해 많은 실험을 반복하였다. 비장에서 벌어지는 돌연변이를 시험관 속에서 PCR이라는 기법을 통해 그대로 모방하고, 돌연변이된 수많은 종류의 항체군을 파아지라는 바이러스 머리 위에 진열하는 기법을 통해 항체 선별과정에 활용한다. 이처럼 몸 속에서 항체가 골라지는 과정을 시험관 속에서 그대로 모방하여 수행한다. 이러한 실험들의 모든 모티브는 인체 내에 존재하는 오래된 생리적 절차에 있다. 그리고 그 절차는 아주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이 절차를 모방하여 그 수준의 60-70% 정도에 도달한 것이 항체 신약 개발 과정이다. 이 기법은 현대 응용 생물학의 최첨단에 해당된다. 모방이 현대 과학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다른 여러 예들이 있다. 과학의 중요한 특징을 창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의 일면만 본 오해라 할 수 있다. 과학의 특징 중 아주 중요한 면모는 이처럼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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