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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탓하고, 세상은 내가 문제라 한다!

- 말자 1

약관(弱冠)하지 못하여 이립(而立)이 꺽정시러, 스무살이 넘어서도 세상을 탓하다
– 말자1

포기해야만 두 다리 뻗고 자는 사주

얼마 전 친구와 사주를 보러갔다. 홍대에 위치해있는 사주카페인데, 보고 오는 친구마다 그 아줌마가 늘어놓는 내팔짜가 여간 신통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재미 반, 궁금한 마음 반으로 내 사주를 확인하고자 갔었다.

“말자씨는 어려서부터 야무지고, 딱부러지고, 1등은 놓치지 않았어요. 하는 일 마다 원하는대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잘하고, 결과도 항상 좋았었고. 그래서 어른들마다 하는 말이, 저녀석! 크면 한 자리 하겠다. 저거 저거 여간내기가 아니다. 하는 말들이었지요. 실제로 말자씨는 성품도 착하고, 사주를 보면 참 예쁘고 생기넘치는 봄꽃과도 같아요. 모두가 부러워 할 만한 꽃이지요.”

쿠엑, 이 아줌마 진짜 신통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라며, 잘난척 쩐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얘기를 들어보면 아마 다들 신통하다 여길 것이다. 이 아줌마 테이블로 다가와 불쑥 나의 생년과 생시를 묻고는 한자만 잔뜩 써있는 책을 들썩이며 몇글자를 건져내어 빈 종이에 따로 적어낸 뒤엔, 사기꾼처럼 나에 대한 사전지식도 묻지 아니하고, 썰을 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줄곧 1-2등만 해왔고, 생각보다 내 앞에 놓여진 과업들이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어도 해결이 되어 왔으며, 결과도 매번 좋았다. 학습된 유능감은 자신감 넘치고, 적극적이며, 예의도 바르고, 싹싹한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고 굉장한 능력자로 친구들로부터 동네 아줌마들로 칭송(?)도 받았었다. 가히 우리 엄마가 딸자식 교육의 대가로 불릴 정도였으니까. 그런 나의 내력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아줌마가 신통하지 아니하고서 어찌알겠는가 말이다.
정말 사람을 객관적으로 분류하는 ‘사주’라는 카테고리가 있던가, 아니면 돈도 냈겠다, 재미로다가 신통방통하다 여기는 수 밖에.

“그런데.”

세상 모든 말은 항상 그런데 다음이 중요하다 했던가. 이 아줌마하시는 말씀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말자씨는 그렇게 예쁜 꽃인데, 저항할 수 없는 ‘큰 비’가 한번 오는 바람에 꽃이 저버리고 말았어요. 생각해보세요. 언제부턴가 모든 일들이 그전만큼,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고 원하는 결과도 잘 나오지 않지요? 일하면서부터는 양은 양대로 많이 하면서 상처는 있는대로 받고, 그리고 워낙 성향이 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에 쨘~!하고 선보이고, 쨘~!하고 선보이고 하는 스타일인데, 번번이 중간에 누군가나 어떤 계기가 가로채가고, 가로채가고… 아마 좌절을 많이 맛보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굉장히 많이 지쳐있는 상태고, 그만하고 싶다고 얼굴에 써있네요. ‘사명감가지고 일을 하려기 보다는, 시집가세요.’ 얼굴은 좀 못났어도 말자씨보다 나이가 많은 분께 시집가면,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거예요.”

아니, 요즘은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여성들이 살림도 살림이지만 (비)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자기능력발휘, 자기개발, 자기성취 자기3종셋트를!!!!! 풀장착하고 있다는데, 이거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줌마가 확신에 찬 말투로 또박또박하게, 내가 시집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저항할수 없는 큰비 때문에 화려했던 꽃이 사주에서 졌기 때문이고, 이 상황에서는 애써봐야 힘들기만하고, 다만 못생긴 아자씨한테 시집가면 편안하게 살수 있으니 다른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는 논리의 전개가 실제로 나의 그러했던 과거와 겹쳐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만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확신에 차서 사주를 이야기해주는 곳도 없잖아…ㅜㅜ)

포기해야만 두 다리 뻗고 사는 세상

사주란게 원래 다 믿을 수 없잖아, 사주도 보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며 다른 방법으로 보면 또 좋은 사주가 나오기도 한데…하는 지인들의 타인위안을 위안 자기위안 삼아 애써 재미로 승화시키려는 찰나, 문득 나는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내 사주가,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의 사주를 대표하고 있어~! 아, 得道(사토리)의 순간이여!’

농담같지만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20-30대 청년들도 여느 세대들처럼 대통령, 의사, 과학자, 미스(터)코리아(?)를 꿈꾸며 열심히 ‘봄꽃’같이 멋진 미래를 욕망하며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날 때부터 불황 및 다갖춘 소수만을 위한 리그라는 ‘저항 할 수 없는 큰비’ 덕분에, 불안고용에 시달리며 자식 가르치고 밥먹으며 살아가는 소시민적 부모의 그늘 아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그럴듯하게) 행복을 담보하는 ‘신분상승 및 부자’로서의 삶은 도저히 자신이 이루어 낼 수 없는 허황된 꿈임을, 잡으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생채기만 내는 꿈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깨달아왔던 나의 행복과 나아가 우리가족의 행복을 담보 하는 길이라는 것이, 좋은 연봉으로부터임을, 좋은 연봉은 좋은 직장으로부터, 좋은 직장은 유수대학입학 및 졸업으로부터, 유수대학 입학과 졸업은 치열한 스펙관리와 족집게 과외다, 선행학습이다, 어학연수다 하는 돈으로만 살 수 있는 값비싼 교육기회로부터, 그러한 행복의 급행티켓은 사실은 부모의 연봉으로부터라는 순환고리임을 20-30세가 되면서는 더 뼈가 저리고, 자존심과 심장이 미어지게, 무기력이 내 온몸의 곳곳을 돌아다니도록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생애주기별로 맞닥뜨린 좌절과 상처의 30년을 겪고도, 그 상처의 원인이 내가 아닌 기득권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전체 구조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그 상처의 길을 계속 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토리 세대의 출현은 묵묵부답의 시대가 낳은 역사적 결과이지,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특정한 세대의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웃기는 사주결과 덕분에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는, 시대의 잣대로 나를 대어보아서는 도무지 나를 사랑하며, 상처받지 않고 살 도리가 보통사람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네 잘못이야. 네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 네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잘하는 사람도 있잖아.’라고 근시안적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의 대안을 함께 찾아보자. 구조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구조의 문제도 해결해보자.’라고 했다면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해야하는 일이나, 하고싶은 일’은 애써 외면하고, ‘할 수 있는 일’만 행하며, 희노애락 중 희락으로만 살아가는 세대들은 출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체 파이가 줄어든 상태에서는, 세대간 계층이동이 불가능하고, 경쟁을 통한 선발이 모두에게 상처를 남길 뿐이며, 자기개발을 부추기는 세태가 자칫 인간성의 훼손, 여러명이 모여 분업하고 협력하여 만들어진 사회라는 시스템 자체의 불가능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토리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걷어치워!

나는 연령으로보나 무엇으로보나, 사토리세대적 좌절과 학습된 무기력, 기존 트랙위에서 더 이상 도전하거나 그것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같은 세대임에 틀림이 없다. 흔히 사토리세대는 ‘지레 겁먹고’, ‘노력과 성취’를 포기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이 세대에 대한 오해일뿐, 사토리세대가 진정 욕망하길 포기한 것은 작금의 세상이 욕망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람보르기니, 해외여행, 명품가방 등 돈으로만 살 수 있는 것들, 마음과 다르게 남을 딛고 일어설 때만 얻어지는 명예와 화려한 수식들.. 그들은 여전이 내가 나의 행복과 내 가족의 행복을 포기하지는 않았듯이, 그들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방식, 다른 장소, 다른 사람, 자신이 뛸 ‘다른 트랙’을 찾으며 ‘진짜 행복’을 욕망하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를 가능케하는 것들을 욕망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관심과 시선을 돌리는 세대를 무기력하고, 어딘가 얼빠진 비정상적 세대인 것처럼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바라보며 세대품평(?)을 하고 있는 자신들을 부끄럽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관성적으로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사회적 지위는 대단하지 않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과 그 여정에 함께 한 사람들과 삶의 할 일을 찾는 세대, 소유욕과 허영으로 삶의 허기짐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변화들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세대, 그리고 내일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오늘의 가치를 희생하고 유예하지않는 긍정적 의미의 나르시스트들로 좀 더 멋지게 포장해주고, 그러한 변화가 사회 변화에 긍정적 흐름으로 물 댈 수 있도록 선배들과 진짜 어른들이, ‘삶의 장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맞대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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