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세계관에 대하여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2 궁극적인 관심 대상과 집단적 종교적 초자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들, 이를테면 나무나 물 흙 등이 생겨난 원인의 원인의 ······ 원인을 끝까지 추적하면 무엇이 나올까. 또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 아버지는 누구일까. 이 모든 존재 이전에는 최초에 무엇이 있었을까. 누구나 궁극적인 실재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 거야. 이 의문은 고대 신화에서 현대 과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아직 풀리지 않은 오랜 과제야.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바탕이 되는 궁극적인 실재나 원인을 찾기 위한 실험과 연구에서 소립자를 계속해서 발견했지만 아직도 가장 끝이라할 실재나 원인을 찾지 못했어. 생물학자들도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생겼났는지를 연구하지만 몇 가지 가설만 있을 뿐 그 최초의 생명체의 생성과정과 구조를 밝혀내는 못했어.

만약에 과학자들이 물질이나 생명의 궁극적인 원인이나 실재를 찾아냈다면 철학자들은 그것을 꼭지로 삼아 새로운 과학적 신화인 우주 이야기를 만들려고 할 거야. 이제까지의 모든 과학 지식을 모아서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정리하려 했겠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궁극적 실재와 우주 이야기와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내면화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다면 우리는 눈이 더욱 밝아져서 더 많은 진선미를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공상과학영화에서처럼 그 단일한 과학적인 세계관이 인류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종교적인 삶의 형태로 이끌어갈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그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궁극자이면서 보편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서 이를 유일신인 하나님으로 섬겼어.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최하위 존재 단위를 찾아서 우주 만물을 설명하려 하지.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인들은 세계의 최상위 존재 단위를 찾아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어. 그들은 아브라함이 찾은 최상위 존재 단위인 ‘야웨’라는 궁극적인 실재를 인식체계이자 신념체계의 상부 구조인 세계관의 꼭지로 삼아서 그를 통해 세계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려 했어. 이는 궁극적인 실재라고 믿어지는 대상을 절대화하려는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이 작동된 거야. 단군 신화나 고구려의 주몽 신화도 단군과 주몽의 아버지가 하늘의 주재자라는 궁극적인 실재인 점에서는 마찬가지 사례야.

그렇다면 인간에게 이러한 종교적인 본성이 왜, 어떻게 생겼을까. 종교적인 본성은 어린아이 눈에 전지하고 전능하며 사랑스럽고도 때로 엄격하게 비치는 보호자를 높이고 따르려는 어린아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아. 인간이 어린 시절에 보호자를 닮으려고 애쓰다가 아이 안에 보호자를 닮은 초자아가 생긴다잖아. 궁극적인 실재를 섬기려는 마음은 자아가 그 초자아를 높이고 따르려는 마음이 점점 커진 것이 아닐까. 여기서 초자아는 자아도 아니고 궁극자도 아니야. 내 안에 들어있는 궁극자에 대한 믿음 즉 궁극자의 이미지야.

신은 저 세상에 있으므로 신을 대신하여 신의 뜻을 대행하는 신의 아들인 예수나 단군 주몽을 섬겼지. 이들의 이미지와 가르침이 그 공동체의 사회·문화·윤리·종교적인 초자아가 되었을 거야. 어린아이의 초자아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보호자의 모습일 뿐이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눈에 비친 공동체의 초자아도 사실이 아니고 그들이 믿고 싶은 예수나 단군 또는 주몽의 신화화된 모습일 뿐이야. 자아를 초월하여 사랑하는 보호자처럼 되고 싶다는 어린아이의 본능적인 성숙 욕구가 일체감을 가지고 초자아를 만들어서 이를 높이고 따르게 만들었을 거야. 마찬가지로 고대 공동체도 보다 성숙한 세계관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하려고 신화적인 인간을 초자아로 삼고 이를 높이고 따르려는 종교적 본성이 생겼을 거야.

그런데 취학 이전의 어린 시절에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었던 초자아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호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역할 모델을 찾아서 그의 행동규범을 내면화하면서 성숙하게 마련이지. 그래서 그 문화권의 문화적 가치와 이상을 지닌 어떤 초월적 인간을 찾아 이를 숭배하고 그의 행동규범과 가르침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초자아로 발전하게 되지. 하나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공동체가 신화화로 발전시킨 초자아는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인간의 모습과 그의 가르침이 내면에 형상화된 거야.

그렇다면 초자아의 초자아는 누구인가 또는 무엇일까. 즉 한 사회·문화·종교 공동체 구성원이 닮으려는 그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인간이 닮으려는 초자아는 누구이거나 무엇인가. 그(또는 그것)는 예수나 단군이나 주몽의 신화와 그들의 가르침 속에 들어있는 그들의 아버지이고 하늘의 주재자인 신이지. 그러나 그 신을 예수나 단군이나 주몽이 발견한 것은 아니야. 궁극적 실재라고 믿어지는 그 꼭지점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신화화 과정에서 그 공동체의 문화적이고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초자아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한 것이야.

물론 처음에는 한 인물을 신화화 하는 과정에서 초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지. 그리고 그 초자아를 꼭지점으로 삼아 문화적이고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체계를 완성하려고 신화화가 계속되고. 그 과정에서 초인의 원인이 되는, 초인이 닮으려한 궁극적인 실재가 그 문화체계와 신념체계의 꼭지에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하나의 그 공동체의 신념체계가 완성되잖아. 그래서 그 궁극적인 실재를 자기들 공동체 신념체계의 꼭지점으로 삼은 세계관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같은 세계관으로 공동체를 통합시키려고 공동체의 초자아를 대상화한 신을 초인의 아버지로 만든 거야.

인간이 비어있는 신념체계의 꼭지를 채울 수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현실세계에서 감각 경험으로 찾을 수 없게 되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 그래서 고대의 우주 이야기와 그 속의 주인공을 만들어낸 거야. 기독교인들에게는 신화화된 예수의 모습과 예수를 닮은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 아버지의 영향력이라는 성령이 삼위일체라는 하나의 초자아로 내면화 되어 있어. 다른 고대 신화의 영웅적인 주인공과 함께 그 영웅의 원인인 아버지도 그 공동체에게 하나의 초자아로 신화화되고 내면화되어 있을 거야.

그리고 근대의 우주이야기였던 형이상학도 지식의 정수를 모아서 우주를 창조한 최고의 조물주이고 절대자인 궁극적인 실재를 찾으려 했어. 그러나 현대 과학은 근대의 형이상학에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하여 이를 부정해 버려. 그리고 이번에는 근대 과학이 직접 과학적인 우주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사물을 분석하여 가장 작은 단위 존재인 궁극적 실재를 찾아 나섰지만 아직 이야기의 실마리인 그걸 찾지 못했어.

홍아야, 아직은 너나 나나 우리의 신념체계 안에 궁극적인 실재를 추적할 만큼 충분한 배경지식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어. 아직은 우리의 경험세계의 범위나 깊이에서는 궁극적인 실재를 찾기가 어럽다는 것을 알아. 그래도 홍아야, 우리가 같이 찾아보자. 그걸 찾아야만 우리의 세계관 즉 신념체계를 완성할 수 있거든. 이제부터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가, 우리가 그것에서 우리의 삶에 어떤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를 묻고 그 대답을 찾아보자꾸나.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리된 세계관과 인식체계 또는 신념체계를 가지고 인생이나 우주에서 더 많은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또는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뭘까. 어떻든 그것은 우리의 인식체계 안에 새로운 것이 생긴다는 것이지. 그런데 그 새로운 깨달음 또는 경험이 경험체계 안에서 정합적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기존의 경험들이 재구성되어야 해. 이러한 재구성을 깨달음 도는 경험이라 하지. 그 새로운 것은 그것과 동일한 수준의 단위존재인 다른 선택지들과 나란히 놓일 거야. 그리고 그것 위로는 그것과 동일한 단위존재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 줄 수 있는 상위 존재 단위가 놓이고, 그 아래로는 그것을 꼭지로 삼는 선택지들인 하위 존재 단위가 놓이고.

그래서 하버지가 바라는 새로운 신화, 새로운 우주 이야기에는 최저, 최소, 최하위 존재 단위만이 아니라 진화를 이끌어 낸 우주 최고의 반사체계, 경험체계가 포함되는 최고와 최대와 최상의 존재 단위가 포함된 우주 이야기란다. 그리하여 양쪽의 궁극적인 실재가 포함된 우주 이야기를 내면화한 반사체계와 세계관을 가지기 바란단다. 그래야 인간과 우주를 바로 볼 수 있고 더 많은 진선미를 경험하여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홍아야, 인간은 종교가 있든지 없든지 왜 인식체계의 꼭지 놓여 있는 그 궁극적인 대상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인간은 어떤 대상을 자신의 인식체계에 비추어 특히 그 상부 구조인 세계관에 비추어 특히 그 꼭지점에 놓인 궁극적인 실재에 비추어 그것이 가진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일 거야. 이를테면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이라고 믿어서 돈을 섬기기 때문에 돈벌이에 매달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보아야만 가치를 실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궁극적인 실재가 자리한 꼭지는 모든 경험을 하나의 체계로 통일시킬 수 있는 동일한 출발점이면서 연결고리지. 우리가 정리된 경험체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꼭지가 필요했어. 그런데 거꾸로 종교적인 본성은 우리의 경험체계가 그 꼭지에 놓인 궁극적인 대상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지도 몰라. 그 꼭지에 있는 신성한 것이 우리 존재와 의미와 가치와 힘의 근원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의 핵심 중에 핵심일 거야.

우리는 아무에게나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서 ‘당신이 얻기를 가장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어. ‘당신 무엇을 가장 즐거워합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고. 남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캐묻지 않으면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나 의식하진 못하더라도 우리의 반사체계의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그 반사체계의 꼭지에 놓인 그 궁극적인 실재와 조화된 삶을 살려 할 거야. 우리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언제나 조건반사로 추구하며 살 거야.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의 인식체계, 경험체계, 신념체계, 반사체계의 꼭지점에 자리잡은 그 궁극적 대상을 최고의 가치로 절대화하고 그것과 조화된 삶을 살려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다는 거야. 앞에서 돈벌이로 돈을 섬기려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자세도 그러한 종교적인 본성의 발로가 아닐까.

하버지가 보기에는 세계관이 잘 정리된 사람일수록 종교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 아마 잘 정리된 세계관일수록 자신이 믿는 궁극적인 실재나 원인을 항상 더 분명하게 의식하며 그것의 바람에 더 충실하게 살아갈 거야. 특히 궁극적인 실재를 물질이나 에너지로 믿는 근대 후기의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계관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진화 논리를 인간에게 적용하여 제국주의 시대에 더 철저하게 지배 권력을 추구하도록 만들거나 자본주의 시대에 더 철저하게 물질 즉 돈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어. 그래서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가치보다 자기에게 편리와 풍요를 가져오는 물질이나 권력의 가치를 더 높이게 만든 것도 종교적 본성의 발로가 아닐까.

그러나 하버지의 세계관으로 우주를 바라보면 진선미로 우주의 진화를 이끌어온 신이 보인단다. 우주의 반사체계인 신이 없었다면 끝없는 혼돈만 계속될 뿐 새로움에 따른 진화는 없었었을 거야. 빅뱅의 혼돈에 진화를 가져올 진선미에 대한 정보가 어딘가에 무언가가 있어야 되는데 그곳 또는 그것을 화이트헤드는 신이라고 불렀어. 화이트헤드의 세계관은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는 하버지의 안경이야.

그에 따르면 신은 모든 단위 존재들이 지닌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만족하는 것을 만족한대. 신이 반사한 진선미를 경험함으로써 우주의 만물이 진화하고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고 개체의 생명이 성숙하여 행복해지는 것이 그의 바람이면 기쁨이며 행복이래. 그래서 하버지도 하버지에게 주어진 경험 가능성을 열심히 실현하여 행복해지는 것이 우주의 진화와 역사의 발전과 개체의 성숙에 참여하는 길이고 신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 믿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진화에 목적이 없다지만 그와 하버지는 목적이 있다고 보는 거야. 그 목적은 진화의 정점에 있는 인간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신이 반사한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는 거야. 그 목적은 신을 닮아가는 거지.

그런데 만약에 진선미를 반사하는 우주적인 반사체계가 없다면 어찌 될까. 엔트로피만 한없이 증가할 뿐 그 무엇도 진선미를 경험하면서 진화하거나 발달하거나 성숙할 수가 없었을 거야. 이러한 나의 믿음이 유물론적인 무신론자가 보기에는 자기가 만들어낸 신의 노예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보일지도 몰라. 만약에 무신론적인 유물론이 주장하는 대로 모든가 우연한 존재라면 지구별에 지금과 같은 우연이 나타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버지는 온도나 기압이나 중력이나 물이나 대기 구성 등 생명이 가능한 모든 변수를 지구 환경에 맞추어 생명이 생길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단다. 차라리 만물이 진선미를 더 많이 경험하여 더 많은 가능성을 실현하기를 바라는 진선미의 우주적인 근원을 가정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단다.

짧은 시간 동안의 우주 변화는 방향이 없는 혼돈으로 보여. 그러나 긴 시간 동안을 살펴보면, 특히 진화의 정상에 서 있는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모든 단위 존재들이 진선미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더 많이 실현하여 더 많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음을 어찌 부정하겠니. 하버지는 신이 자신을 닮은 존재와 함께 진선미를 교감하려는 진화의 방향을 인정하고 진선미를 더 많이 경험함으로써 그 근원과 일체감을 가지고 싶어.

그는 하늘에 계실 뿐만이 아니라 하버지 안에 초자아로 계셔. 나의 행복이 그의 행복이고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고 믿어. 돈을 섬기는 사람들이 돈을 위해 사는 것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 믿지. 그들은 돈과의 일체감 때문에 돈벌이에 최선을 다해. 하버지의 자아도 초자아와 일체감 때문에 서로를 위해 더 많은 진선미를 경험하여 행복해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서로가 잘 살기를, 서로 행복하기를 바라며 동시에 서로의 행복이 서로의 행복이듯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해야 한다.”는 예수는 신과의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을 아주 잘 표현했어. 종교적인 본성은 자신이 믿는 궁극적인 존재를 닮으려는 마음이야. 도가의 사람들은 도(道)를 본받으려 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의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에 합류하려 하며, 사회 진화론자들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려 하며, 잉카의 태양 숭배자들은 태양의 넉넉함을 따르려 해. 인간의 본성에는 신적인 힘,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며 살려는 종교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어.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초자아는 부모나 보호자를 닮은 자아의 일부로써 어린 시절 부모를 비롯한 보호자의 행동방식이 내면화되어 생긴 거래. 그런데 그 초자아는 사회화 과정에서 그사회의 문화적인 전통과 이상과 가치와 양심을 지닌 역할 모델을 찾아 성숙을 계속하게 마련이야. 이상을 추구하는 초자아는 쾌락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자아를 억압하고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가능성을 실현하여 자아를 완성하려는 또 하나의 ‘나’야.

그러니까 한 사회의 문화적·종교적 초자아인 궁극적인 실재의 신성이 내면화된 것이 개인적 심리적 종교적인 초자아라는 거지. 그래서 어쩌면 인간이 찾은 신은 포이에르바흐의 말대로 인간 자신의 집단적이고 문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자아일 거야. 어쩌면 그것은 포로이드가 말하는 초자아가 투사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인 초자아일 거야.

그런데 어린 시절 우리가 보호자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의 행동방식을 내면화했듯이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초자아가 형성되려면 한 집단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으로 그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는 초인적인 한 인간을 만나야 돼. 제정일치의 원시사회에서는 주술사가 가장 뛰어난 지식인으로서 한 집단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야. 그는 그의 공동체에게 우주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이야기 안에서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를 밝혀주고 그 실재와 조화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려 했을 거야.

그런데 제정이 분리되자 주술사와 역할을 분담하는 한 영웅이 나타나고 주술사가 그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서 전승시키는 과정에서 그 영웅이 신화화되면서 집단적인 초자아가 형성되었을 수도 있어. 그래서 뛰어난 영웅의 영향권에 속한 집단은 그의 말과 삶을 신화화하고 그 문화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신화를 내면화하면서 신앙이라는 신념체계를 세웠겠지. 그리고 그 영웅적인 존재와 신화와 세계관 즉 신념체계는 서로가 순환적인 발전을 부추겼을 거야. 예수나 단군이나 주몽의 신화가 그런 예들이지.

1980년대 역사적인 예수를 연구한 미국의 <예수 세미나>에서 인간 예수의 신화화 과정을 연구했단다. 이 세미나는 유대 종교의 한 분파가 실재했던 한 인간 역사적인 예수를 소재로 하여 그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인간상을 조형하는 신화화 과정을 밝혀냈어. 또 이 분파가 다시 여러 분파로 갈라지면서 분파마다 서로 인정하기 어려운 다른 예수상을 조형한 사실도 밝혀내. 수많은 분파(예수 공동체)마다 서로 다른 텍스트에 서로 다른 예수상을 그려냈지.

그런데 로마 황제 콘스타티누스 대제가 원하는 대로 주교들이 그의 권력에 힘입어서 교리를 통일하고 성경의 정전을 정하게 돼. 그리하여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서로가 용납할 수 있는 예수상을 그려낸 네 복음서와 바울 서신들을 묶어 신약성서라는 정전을 만들어 내고 나머지는 이단으로 몰아 수거해서 불태웠어. 그래서 우리가 믿는 예수는 역사상의 인물 그대로가 아니라 신의 아들 또는 신의 대리자로 조형된 인물이라는 거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종교 집단의 이상적인 인간상, 결국은 이상적인 우리, 즉 한 공동체의 집단적 초자아야. 초자아가 형성 되는 단위가 개인이냐 집단이냐에 따라 개인적인 심리 현상과 집단적인 종교 현상으로 구분되지. 그러나 하버지는 집단적 초자아를 추구하는 종교 현상의 본질도 개별적인 인간이 내면적인 초자아를 따라서 자기완성에 이르려는 동기에서 나온다고 믿어.

인간에게는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적 자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대상을 닮은 이상적인 자아에 이르려는 초월 욕망 즉 자기완성의 욕망이 있다고 믿어. 그래서 그 욕망이 힘과 이상과 양심을 갖춘 초자아, 즉 궁극적인 실재를 닮은 온전한 자기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고 믿어. 그리고 상상한 모습대로 살려고 애쓰는 데서 종교적인 본성이 싹튼 거라 믿고. 그러나 결코 이상적인 초자아에 도달하여 자신이 신이 될 수 없기에 포이에르바흐는 그 이상적인 초자아를 타자화해서 신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래. 그리고 신이 될 수 없는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인간들은 신의 아들로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신의 자손으로 만족하게 되고.

그런데 인간이 섬기는 신이 결국은 그 종교 집단의 초자아를 타자화한 또는 대상화한 것이라고 해서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야. 오히려 신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집단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집단적인 초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자신을 찾아 닮아가기를 원하는지도 몰라. 인간에게 초자아가 있다면 프로이드의 말대로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초자아 형성이 7세 이전에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경험에 따라 계속해서 초자아도 성숙한다는 거야.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역할 모델을 만나기도 하고 결국은 그 공동체의 문화가 그려낸 이상적인 인간상 즉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인 초자아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불완전한 초자아가 성숙을 계속하게 마련이랬어.

응답 1개

  1. 전현선말하길

    안녕하세요?
    항상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타국에 와서 외롭고 힘든데… 선생님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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