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소통에 관하여

- 유일환(수유너머N 회원)

소통이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두 사람의 대화와 같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사람이 대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버리고 상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서로 자기 말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요. 따라서 소통이란 자신의 지반을 떠나 상대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통의 기본 조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이건,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건,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건,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함께하는 관계이건 간에 서로 소통하고자 한다면, 두 사람 중 하나는 자신의 지반을 버리고 상대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자신의 지반을 떠나는 것에 주저합니다. 자신의 지반을 떠난다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굳게 믿어온 가치의 포기를 감수하는 것이며, 안락하고 편안한 지금의 조건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사회적 통념 때문에, 수많은 불확실성 때문에 상대에게 다가가기보다 상대가 내 영역으로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만일 두 사람 모두가 자신의 지반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언어만을 고집한다면 소통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상대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상대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사람의 고민을 내 일처럼 걱정하고, 그 사람의 관심사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가치관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를 평가하거나 재단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상대를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이것이 내 언어를 버리고 상대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상대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소통의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가장 적극적으로 상대의 언어를 배우고 소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에게 소통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러나 심한 권태에 빠진 연인에게 소통은 물에 젖은 솜덩이를 등에 짊어지는 일처럼 무거운 의무이자 노동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대부분의 소통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소통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래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위클리 수유너머> 156호에서 다루고 있는 <성공회대 노숙모임 -“꿈꾸는 슬리퍼”>라는 글에서도 소통의 고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학교 안에서 3년간 텐트를 치고, 노숙생활을 하면서 빈곤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긴 시간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서로 간의 갈등과 상처라고 합니다. 본래 어느 관계든, 어느 집단이든 고상한 이념의 문제보다 소통의 문제로 싸우고 갈등하다가 해체의 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 즉 상대와 내가 다르다는 점에서 시작한 문제들 때문에 서로 갈라서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지요.

소통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통해야 합니다. 그것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맑스의 말처럼, 본성적으로 인간은 혼자 외롭게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는 유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소통의 고됨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보다는 ‘나와 다른 역사를 살아온, 나와 전혀 다른 타자와 마주해서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훨씬 현실적으로 필요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아마 우리는 꽤 여러 번 실패할 것이고, 숱한 갈등과 상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힘들면 중간에 잠깐 쉴 수도 있겠고, 숙고한 끝에 정 아니다 싶으면 관계를 해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관계와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때도 소통의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다음의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서 기꺼이 내 언어를 버릴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소통을 위해서 매번 내 언어를 버릴 수 있음을, 매번 내 지반을 떠날 수 있음을 긍정할 수 있을까요.

응답 1개

  1. 방광근말하길

    소통~~ 상대의 속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이해할 때
    소통이 이루어짐을 깨닫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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