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죽음에서 창조로, 1957 산딸기

- 지안

살면서 어떤 관계가, 완전히 부셔져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잉마르 베리만의 대표작 <산딸기>에서는 영화 안의 거의 모든 관계가 단절의 직전에 있다. 영화의 주인공 이삭 보리는 의사이자 그가 자신을 표현하듯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 소통이 안 되는 상황들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인 만큼 주인공 이삭을 중심으로 하여 관계망이 조직된다. 영화 속 관계들은 계열을 가지고 있고 그 계열엔 반복이 있다. 먼저 어머니-아들(이삭)-손자(에발트)의 계열을 보면, 그들은 이삭의 꿈속에서 이삭이 고발당하는 죄목처럼 “무정함” “이기주의” “냉혹함”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로 얼룩져있다. 이들이 타인에게 냉소로 드러내는 상처는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되고 대물림 된다. 그리고 이들 각각과 수평적으로 관계를 맺는 다른 한 계열이 있는데, 카린(이삭의 부인)-마리안(에발트의 부인)으로 이어지는 계열이다. 이들은 극도로 차가운 냉소와 그런 식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지 못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카린과 마리안은 전자의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것이 거절당하는 상처를 갖게 된다. 즉 이 두 계열의 관계들은 수직적으로는 냉소성 혹은 그 대물림으로 인한 상처, 가족적인 상처를 입게 되고 수평적으로는 전자의 상처로 인한 또 다른 상처를 낳게 된다. 에발트와 마리안의 대화가 이 두 계열의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겁쟁이!” “맞아. 난, 사는 게 구역질 나”…“당신의 욕망은 살아서 사랑하고 생명을 창조하는 거지” “당신은요?” “난 죽는 것. 완전히 죽어버리는 것”

이 영화는 주인공 이삭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도시로 가는 와중에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로드무비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회상, 꿈이 뒤섞여진 형태로 이삭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 초반부에서 이삭은 꿈을 꾸는데 이 꿈은 극을 끌고 가는 가장 핵심적인 동인이 된다. 원래 비행기를 통해 가기로 예정되어있던 일정은 이삭이 꿈을 꾸고 나서 갑작스레 자동차 여행으로 변경된다. 꿈속에서 이삭은 길을 걷다 시계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거기엔 바늘이 없다. 그리고 장의마차가 도로를 가로질러 오는데 가로등에 부딪혀 마차에 실려 있던 관이 도로로 떨어진다. 이삭이 그 관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이삭 본인이 누워있다. 관 속의 본인을 보면서 소름끼치게 놀라는 이삭의 표정을 보여주며 배경음악처럼 시계소리가 계속 들린다.(시계소리는 영화에서 자주 배경음으로 사용된다) 이 장면은 후에 카린이, 장손에게 남편의 바늘 없는 시계를 물려주려고 하는 장면과 포개진다. 시간이라는 변화가 이삭에게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나는 영원히 나의 어린 시절 속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 감독 베리만 본인의 상처와도 동일하다.
영화 도입부는 “사람들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비판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왔다”라는 이삭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감독 베리만은 그의 저서 <잉마르 베리만의 창작노트>에서 그 자신이 “모든 인간관계와 단절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삭은 베리만 자신이었던 것이다. 즉 <산딸기>는 베리만의 이야기다. 베리만은 <산딸기>의 “추진력” 또한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애썼”던 사실과 “어머니와 통렬히 다투는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던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에서 나왔다고 회고한다. 이삭이라는 캐릭터 또한 자신이 보았던 냉소적인 아버지 이미지의 회상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베리만은 <산딸기>를 다 만들고 나서야 “이삭 보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며 이삭 캐릭터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인공의 이름 이삭 보리Isak Borg의 약자 IB는 스웨덴 어로 요새를 뜻한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첫 번째 계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마리안이 이삭을 보며 에발트와 정말 닮았다고 할 때, 우리는 상처-냉소가 이미 반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에발트가 이삭을 미워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상처의 원인을 자기가 닮아버리게 된 에발트의 고뇌-결국 베리만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영화 안에서 이삭이라는 캐릭터는 무작정 냉소적이라기보다 차라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간간히 그의 노인적인 여유와 따뜻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로 가고 있다는 히치하이커들을 차에 동승하게 해준다거나, 이삭이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갔을 때 주유소직원이 기름을 넣으며 “마을 곳곳에서 교수님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조차 사실은 “위선”이었다. 이 위선은 이삭의 꿈속에서 옛 연인 사라가 이삭의 얼굴에 거울을 대는 장면이나 이삭의 아내 카린이 “얼음처럼 차갑다”고 이삭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숨겨진 냉혹함을 포장하는 성공한 의사로서의 삶은 이삭이 꾸는 또 하나의 꿈에서 모두 벗겨진다. 꿈속에서 그가 알던 과학적 지식이나 그가 가진 명예는 모두 사라지고, 너무도 냉정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마치 재판소같이 보이는 졸업시험장에서 그의 과거와 그가 소멸시켜버린 관계들, 꿈들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는 이어지는 죽은 아내가 간음하는 장면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관계 속에서 자기가 비판당하는 것이 두려워 사회적인 관계를 끊고 살아왔다는 이삭은, 이제 관계로 인한 고통을 겪는다. 자기가 모든 것을 제거해버리고 단 하나 남은 침묵의 공간, 그 불모지에서 “출혈”과 “진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는 겪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이때의 고통은 그를 죽음으로 더 다가가게 하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다. 이 고통은 그가 상처를 회복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욕망하게 만드는 종류의 고통이고 그런 점에서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삭이 꾸는 꿈속의 졸업시험장, 이제껏 그가 관계 맺어온 사람들이 시험관처럼 뒤에 앉아있다. 맨 앞이 이삭.

사실 영화에서 두 계열의 관계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냉소 혹은 상처로 얼룩진 관계말고도, 그와 동시에 이들 관계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관계들이 있다. 여기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우선 극단적인 냉소와 신경증, 서로에 대한 비하만 남은 관계를 가진 알만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의 등장은 마리안에게는 상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이삭에게는 긴장을, 젊은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준다. 그리고 또 한 종류는 이삭의 가정부, 함께 동승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이삭의 어린 시절 연인 사라다. 이들은 앞의 두 계열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정상적’이거나 혹은 생기 넘치는 ‘건강함’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영화 내내 이삭의 주변부로 존재하면서 이삭이 가진 ‘침묵’에 균열을 낸다. 결국 도입부 시퀀스와 후반부 시퀀스가 갖게 된 연결성을 드러내주는 것도 이 주변부들이 만들어내는 관계 덕이다. 도입부에서 가정부는 몇 십 년을 함께 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냉소를 가진 이삭에게 불만을 표출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변화된 이삭을 보며 가장 기뻐해준다.
여행 중 이삭이 어머니 카린을 보러 본가로 가게 되는데, 마리안이 함께 따라간다. 그러나 카린은 시종일관 그녀가 가진 냉소성만을 드러낸다. 마리안은 저분이 이 모든 것의 시작 “어머니”군요, 라고 말한다. 아마 앞으로도 카린은 그렇게 “고독”하게 죽음으로 침잠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삭은 꿈과 회상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이제 에발트와 마리안, 가정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가 관계를 밀어내고 고통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이제 그는 자기가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것들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고(겪을 수 있게 되고) 비로소 다시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적 비약일 수도 있지만 마리안에게 낙태를 강요하던 에발트 역시 오랜만에 다시 아내와 재회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에발트가 과거에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혐오감”을 표출했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둘은 조금씩 “죽음”에서 빠져나왔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둘은 약간 달라진 온도로 다시 ‘만난다.’ 이삭이 먼저 에발트가 빌려간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이야기를 꺼낸 목적은 그것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만 에발트는 처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꼭 갚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둘만 있는 깜깜한 손님방에 “…돈을 갚지 않아도 돼”라는 이삭의 작은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맴돈다. 또한 이삭은 낙태, 혹은 둘의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만..”…“하지만…”이라고 말하며 아주 소박한 방식으로 자기가 밀어낸 관계속 에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이는 에발트가 분명히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돈을 갚지 않아도 돼” 혹은 “(…)하지만”이라고 웅얼거리는 모습의 변화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관계의 창조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이런 웅얼거림의 방식으로 이삭과 에발트의 관계, 혹은 이삭과 과거의 이삭은 달라진다. 여기서 더 적극적인 화해의 결말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가 이 단계에서 끝맺더라도 그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멈춰있거나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관계의 “죽음을 앞둔” 노인이었던 이삭이 내민 손과 그것을 보고 다시 부인에게 손을 내미는 에발트. 상처의 반복과 대물림은 결코 똑같은 방식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죽음”의 차가운 이미지도 대중적인 영화들의 뜨거운 이미지도 아니지만 미적지근한 엔딩의 온도만큼이나 우리는 새롭게 달라질 그들의 관계나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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