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판에서 벌어진 여러 사태를 보면서 힘이 빠지기만 했던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안 모씨 같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그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안 모씨 같은 사람은 인기가 아주 있으며, 더럽기만 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믿음직하게 보인다는 것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아주 나쁜 사람들이고 웃는 얼굴을 하면서 마음속에서는 끔찍한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인으로서의 더러움이 없게 보이는 사람이 정치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기대를 가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알기 쉬운 구도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쓴다는 것의 이유는 위에 구도에 전혀 동의할 수 없으며, 그러한 구도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기가 있으며 표를 획득할 수 있는 인물이 정치판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속마음이 있는 사람이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사용해서 정치적인 힘을 얻으려 하는 것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를 정치판에 끌려오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여러 당연한 일들을 적어놓은 것에 의미는 몇 가지 있다. (1)대중을 끌려오기 위해는 인기가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는 관념, (2)그러하기 위해는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며,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관념, 등등이, 여기까지 써온 논의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안 모씨를 중심으로 세우면서 단결하면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나 하는 생각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방법을 택하는 게 우리에 힘을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를 약하게 그리고 얌전하게 재생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여기에서 쓰는 내용은 특히 새로운 것은 없다. 대중화할 것인가, 혹은 볼루세비키화할것인가, 라든가 하는 역사적인 논쟁에서 이미 많이 논의된 일들이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논의가 아님에도 불고하고, 좀 이런 고전적인 논의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저런 논읠 해본다는 것이다. 물론 정당정치 틀에서 정치나 사회를 바꾸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내가 하려는 논의에 동의할 수 없겠지만.
2
괜찮게 보이면서 인기가 있는 사람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면 (1)그것이 누군가에 기대한다는 점에서, (2)인기가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의미에서, (3)괜찮게 보인다는 점에서 타협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
(1)기대한다는 것은 자기의 목소리의 대신에 말해준다는 것에 대한 기대이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누군가에 대변시키면 안된다. 어떤 깔끔한 논의를 가지고 자기를 대변해주는 존재에 기대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을 빼 버리는 일이다. 더욱 이는 자기와 누군가가 같이 논의하면서 언어를 짜낸다는 운동과정이 없다.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대해보리면 자기스스로의 힘이 없어지며, 대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약해지며 긴장감도 없어진다.
(2)인기가 있다는 것은 정치판에서 표를 얻는다는 점에서만 중요한 일이며, 우리의 생활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불고하다. 인기 혹은 표를 얻어야한다는 시고는 우리가 정치판에서의 사고에 말려들어가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쓸모없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표를 얻기 위해는 웃어야 하며, 욕도 하면 안되며, 마치 부처님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는 정치적인 인기를 위해 자기를 억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얌전한 선택 끝에 자기의 비판력까지 없어지며 권력에 회유당할 것이 인기자의 결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인기를 얻을 것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의 표현을 해방시키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인기를 얻기 위해, 자기의 표현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이다. 표 계산을 하기 전에 생각해야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표 계산을 한다는 사고는 얼마나 비참한 사고일까.
(3) 괜찮게 보이는 일에 타협하는 일 역시 비참한 결가를 낼 것이다. 정치판에서는 정당들이 합동하거나 협력하거나 할 일이 많지만, 우리는 그런 타협의 논리에 따라갈 필요는 깨 한 알 정도도 없다. 괜찮다는 것 자체가 타협의 논의인 것이다. 타협한다는 것은 자기의 표현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표현을 억압해버린다는 의미이다.
3
안 모씨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대의 분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기대감은 완전히 타협의 논리에 휩싸이게 되어버린 결과가 아닐까. 왜 그렇게 사회가 착하게 타협을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한국 사회를 구성할 사람들이 아주 착하다는 점이다.
약한 개인적인 얘길 한다면, 나는 한국에 살면서 새누리당 지지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아주 한정된 사람들과 같이 지낸다는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협소한 한국사회만을 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친척관계가 있거나 어렸을 무렵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정치든 종교든 다얀한 사람들을 알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적으로도 아주 협소한 한국을 아는 나에게도(그러니까 좌익적인 한국 사람밖에 모르는 나에게도), 한국사람들의 착함에 대해서는 신기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내가 우려하고 있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우익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글의 문제밖에 있다). 그것이 단적으로 말하면 박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안 모씨를 기대한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안 모씨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는 아주 비참하다. 완전히 표 계산 정치의 논리가 신체에 스며들며 다른 자기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착한 모습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대통령 선거 같은 커다랗게 보이는 선택의 시기에 높혀진다. 일본에서의 요새 사례로 본다면 반원전 데모 속에서의 얌전함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왈<민폐를 끼치면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왈<경찰과 싸우면 데모의 이미지가 나빠지며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왈<찻길로 빠져나오면 교통이 혼잡하게 되니까 인도에서 항의행동을 해야한다>, 왈<…>,, 등등의 귀찮으면서, 스스로의 표현을 스스로 억압하는 소리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민폐>라는 것과 운동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일본에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을 한국에서 할 수 있다는 식의 틀로 지금까지 한국 운동을 인식해왔지만, 안 모씨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는 분위기를 보면서, 정말 내가 설정한 틀 그대로 현재 한국사회를 볼 수 있을까는 의문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하면서, 현실을 중심으로 현실에 맞게 운동을 꾸미려고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운동은 축소재생산밖에 할 수 없을 것이며, 아류밖에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마츠모토 하지메다 벌이는 운동은 아주 재밌는데, 마츠모토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면 재미없는 아류 운동 밖에 만들어낼 수가 없다. 마츠모토 역시 자기가 종교의 중심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어떠한 과거 운동에서 배운다는 것은 아류를 만들어낼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성공한 운동의 선공한 부분만을 가지고 배운다면 그것은 비참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을 잃은 모습으로서의 아류밖에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의 과정으로서의 실패이며 패배들이다. 그것들을 이어받으면서, 스스로의 현장에서 생각해낸 것이 있어야 겨우 아류가 아닌 비판적인 과정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인기라든가 대중적인 지지를 앞세우는 산수의 더하기적인 계산 정치보다 훨씬 강하게 현실을 비판할 수 있다. 현실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을 현실로서 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4
같은 내용에 대해서 거듭거듭하면서 써버린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안 모씨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는 사회를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저런 썼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기대하는 게 스스로의 비판력을 상실시킨다는 것이다. 연대할 대상으로서의 누군가가 아니라 기대할 대상으로서의 누군가를 설정한다는 것 역시 <논의> 과정을 뺀 운동을 만들어버린다(과연 그것을 운동이라 할 수 있을까?).
안 모씨를 기대하는 얌전한 자에게 우리가 말해야할 것이 많다. 진보진영이 믿을 수 없으면 스스로 생각해라는 것이다. 원래 정치인을 믿고 투표한다는 것은 정치의 포기에 불과하다. 투표중심의 인기주의는 우리의 정치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분위기를 찢어낼 방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얌전하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는 것은 아주 힘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