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지금 글 쓰는 나 – 트윅스트 (2012)

- 이상욱

자문자답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나입니까?
: 아닙니다.
-지금 글을 쓰는 것은 맞습니까?
: 아닙니다.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나입니까?
: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 무엇입니까?
: 대답하기 복잡한 문제입니다.

대답들

시계탑, V
일곱 개의 시계를 가진 종탑. 시계들은 제각각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허나 그것은 시계들 뿐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그렇다. ‘지금’이라 명명된, 양쪽으로 쭉 뻗친 직선 위의 한 점이라 생각 된 그 시간은 무수한 직선들의 교차점인 것이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선이나 점 따위로 얘기될 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그것은 ‘사악해’ 뵌다.

낮에 있던 사인회를 마치고 하릴 없이 마을을 산책하던 작가 홀 발티모어는 우연히 소녀 V를 만난다. V, 일곱 개의 시계를 가진 종탑이 있는 마을에서 만난 소녀. V라는 알파벳 문자의 모양처럼 그녀 또한 고정된 한 점으로 머무는 법 없이 여러 개의 갈라진 선을 그린다.

V가 그린 첫 번째 선. 뻐드렁니 탓에 교정을 한 소녀는 뱀파이어Vampire라 놀림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고르지 못한 치열 탓 만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없는 혹은 시간이 너무 많은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째 선은 그녀의 원래 이름이다. 버지니아Virginia. 시간 없는 혹은 시간이 너무 많은 종탑의 시계들은 간혹 어떤 ‘시각’을 떠나지 못하기도 한다. 시계탑의 시계들은 자정을 알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종을 울려대며 자정에 머문다. 버지니아, 그녀는 12살의 처녀성에서 결코 떠나지 못한다. 고르지 못한 치아를 교정한 버지니아는 끝없이 그렇게만 출몰한다.
세 번째 선, 비키Vicky. 발티모어는 V를 만났다. 그가 만난 V는 또 다른 V, 비키를 소환한다. 뻐드렁니 한 소녀의 나이 쯤 보트 사고로 죽은 그의 딸. 그녀는 죽었지만 발티모어의 기억 속에서 시간 없이 혹은 너무나 많은 시간들 안에서 살고 있다. 아니 발티모어의 시간에 구획을 짓는 선을 그리는 것은 그녀의 몫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일곱 개의 시계를 가진 종탑이 보이는 이 마을에 다시 또 나타난다.

저자 홀 발티모어
공포 소설 작가 홀 발티모어는 사인회를 하러 마을을 방문한다.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마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위하여. 사인회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의 팬임을 자처하는 보안관 바비 라그레인지를 만난다. 그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는 데,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 소설을 같이 쓰자는 것이다. 그는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길 원했다. 발티모어 또한 제안이 썩 나쁘진 않았던 모양인지 그 소설을 쓰기로 한다. 그러나 그에겐 결코 수락 못할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바비 라그레인지를 공저자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소설이 두 개의 이름에 의해 쓰이는 것을 참을 수 없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저자 : 홀 발티모어, 아이디어 제공 : 바비 라그레인지라는 ‘절충안’을 선택한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것은 그의 바람대로 홀 발티모어 오로지 자신 뿐 일까? 그렇지 않다. 홀 발티모어는 일곱 개의 시계들을 가진 종탑이다. 글을 쓰는 것은 여러 이질적인 시간들을 살아 온 ‘그것들’이다. <뱀파이어 처형>이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그는 애써 그 시간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 몰라도, 절충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결코 양보하는 법이 없다. 바비 라그레인지의 아이디어가, 아내의 돈 달라는 독촉이, 술이, 술이 데려간 꿈 속에서 만난 에드거 앨런 포가, 그리고 그의 딸 비키가 글을 쓴다. <뱀파이어 처형>은, 각자 다른 시간을 살던 것들이 자신들의 시간을 버리고 혹은 너무 많은 이질적인 시간들과 공조하여, 즉 뱀파이어가 되어 쓴 것이다. 홀 발티모어라는 하나의 이름은 뱀파이어들의 여러 개의 이름을 처형하고자 한다. 발티모어는 서명하고 싶은 욕망에, 단독 저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홀 발티모어라는 이름은 그것들에 의해서만 씌어질 수 있다.

엔딩, 교정기, <뱀파이어 처형>
소설의 엔딩을 앞둔 발티모어는 공저자 문제로 바비 라그레인지와 다툰다. 다투던 중 라그레인지는 발티모어의 머리를 가격하고 발티모어는 정신을 잃는다. 정신을 잃은 발티모어는 꿈에서 존경해마지 않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를 다시 만난다.(영화에서 발티모어는 꿈에서 포를 여러번 만난다.) 발티모어는 포에게 소설의 엔딩을 어떻게 내야할지 묻는다. 포는 말한다.

“앞으로 더 나아 가려는가?(…) 지금 멈추지 않으면 자네가 쓴 모든 말들은 자네 자신의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가 바로 자네가 찾는 엔딩이야.(…)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면 다른 방법은 없어. 우린 같은 아픔을 공유했네. 친구여. 우리의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준비하는 무덤이 돼야 하네”

포의 안내로 V, 뱀파이어Vampire 버지니아Virginia의 사연을 알게 된 발티모어에게 포는 이제 또 다른 V, 비키Vicky를 보여준다.

발티모어는 계속 미뤘던 보안관 사무실 말뚝 박힌 소녀의 시신을 보기로 결심하고 안치소로 향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시신의 ‘주인’은 V, 세 가지 선을 그리는 그 V이다. 죽었음에도 결코 변한 데 없는 뱀파이어Vampire, 버지니아Virginia는 비키Vicky의 목소리를 낸다. “아빠, 살려 줘요.” 발티모어는 그녀를 살리고자 말뚝을 뽑는다. 뱀파이어를 처형시킨 말뚝, 그것이 뽑히자 ‘처형’되었던, 멈추어져 있던 V의 세 가지 시간은 되살아난다. 버지니아Virginia의 봉인되었던 처녀성은 해방의 핏줄기를 뿜으며 뱀파이어Vampire로 부활한다.

교정기에 의해 억압되었던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다시 돋아난다. 그것들은 단일한 이름의 처형자 발티모어를 공격한다. 교정기를 튕겨낸 들쑥날쑥하게 된 치열과 함께. 그것이 튕겨낸 것은 또한 억압돼 있던 어떤 시간들이었다. 멈춰져 있던 시간들. 비키Vicky라는 뱀파이어Vampire. 발티모어의 시간을 이루던 그것이 처형되고 소설 <뱀파이어 처형>이라는 무덤에 매장된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을 위한 무덤. V의 성대한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홀 발티모어가 준비한 무대장치로서의 무덤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