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범인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 히치콕의 <싸이코>를 보고

- 조지훈

서스펜스 영화는 관객에게 늘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도대체 범인은 누군가? 관객은 영화가 흘러가는 대로 눈을 맡기지 않는다. 화면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단서가 될만한 증거물을 찾고, 인물들 한명 한명의 알리바이와 동기를 추정하면서 누가 범인일까를 짐작해본다. 그 와중에 너무 놀라지 않기 위해서 혹은 ‘감독 네 놈이 꾸민 반전에 속을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인물을 범인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결국 자기가 예상한 인물이 범인임이 드러나면 관객은 우쭐거린다. 혹여나 틀리더라도, 자기만큼 예상지 못한 인물을 범인으로 설정하지 못한 감독을 향해 약간의 우월감을 누리는 방식으로 심리적 보상을 하기도 한다. 조금은 도착적인 이런 관객의 반응은 범인 찾기가 서스펜스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서스펜스의 거장이라 불리는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는 좀 이상하다. 이 영화는 보통의 서스펜스 영화처럼 여러 명의 용의자를 배치하고, 누가 범인인지를 둘러싼 공방을 벌이지 않는다. 모텔 주인인 노먼 베이츠 외에는 그 어떤 용의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어머니라는 다른 용의자가 있지만, 화면 상 부재하기 때문에 노먼 베이츠와 경쟁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감독은 용의자를 한 명으로 압축함으로써 범인의 확인이 아니라 범인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으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범인에 대한 해석은 세 층위에서 일어난다. 먼저 실종된 메리언을 찾기 위한 등장인물들(탐정, 그녀의 애인, 그녀의 언니)에서의 층위. 메리언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노먼 베이츠가 돈 때문에 메리언을 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텔 확장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노먼 베이츠를 사건의 범인으로 몬다. 첫 번째 층위는 범행 동기에 대한 가장 상식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두 번째 층위의 해석은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신과의사에게서 이루어진다. 정신과의사는 노먼 베이츠의 살인행위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노먼 베이츠의 살인 행각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것에 따른 결과다.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는 노먼 베이츠가 모친의 애인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녀와 그녀의 애인을 살해하고 그에 따른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기 위해, 어머니의 인격을 자기 안에 두게 된 것이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다. 정신과의사가 보기에 살인은 바로 이 어머니의 인격을 한 노먼 베이츠가 저질렀다. 노먼 베이츠 안에 있는 어머니의 인격은 아들이 젊은 여자와 있는 함께 있는 걸 질투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들이 자기 애인을 질투하듯이. 이렇게 첫 번째 층위와 두 번째 층위를 가르는 것은 ‘정신의학’이라는 지식 담론이다.

그런데 마지막 층위인 관객의 시선에서 다시 한번 반전이 일어난다. 사실 노먼 베이츠 안에 있는 어머니의 인격은 살인을 저지를 만큼 잔인하지 못하다. 노먼 베이츠의 방백에서 드러나듯이 어머니는 그저 노먼 베이츠의 방패막이로 사용될 뿐이다. 노먼 베이츠는 자신의 살인 행각을 감추기 위해 어머니의 인격을 이용한 것이다. 진짜 범인은 노먼 베이츠 안에 있는 어머니의 인격이 아니라, 노먼 베이츠 자신의 인격이다.

세 층위 모두 노먼 베이츠라는 신체가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해석이다. 노먼 베이츠 신체 안에 있는 어떤 인격이 이 범죄행각을 저질렀는가. 이 사건의 책임은 누가 질 수 있는가. 동일한 신체의 행위지만, 그 신체를 움직이는 인격의 설정에 따라 책임의 결과는 판이하다. 첫 번째 층위, 즉 돈을 노린 살해는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두 번째 층위인 정신과의사의 해석대로 이중인격인 상태에서의 살해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세 번째 층위는 어찌되는가. 정신병원으로 보내자니 범인의 주체성이 보인다. 그렇다고 형사처벌을 하자니 범인의 정신 상태가 형사사건에서 다루기 곤란한 상태에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세 번째 층위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층위의 해석은 영화 속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관객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없다면 세 번째 층위의 해석은 있을 수 없다. 해석의 완성은 관객이 한다. 관객이 어머니의 인격을 방패막이로 사용한 노먼 베이츠의 인격을 범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궁극적인 것이 된다. 범인을 해석하는 최종 심급은 관객인 것이다. 히치콕은 관객을 초월자 위치로 올려놓음으로써 그들에게 극도의 쾌감을 주는 동시에, 관객이라는 그들의 위치를 폭로함으로써 영화에 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싸이코>의 교훈은 범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그것은 범인을 만드는 해석자의 위치(무지한 등장인물, 지식권력의 소유자, 초월자인 관객)가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히치콕이 <싸이코>를 통해서 보여주는 긴장감은 바로 범인의 주체가 만들어지는, 이 다양한 층위의 해석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범인이 밝혀지는 반전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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