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 성현

저는 개인적으로 tv를 자주 보지는 않지만, 최근에 굉장히 재밌게 본 두 개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하나는 직장의 신 10화이고 또 하나는 이 주 전에 했던 무한도전 무한상사편입니다. 직장의 신 10화에서는 회사에 20년을 넘게 근무한 고과장이 권고사직으로 인해 회사를 떠나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습니다. 이 10화에서의 백미는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황갑득 과장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무정한의 노력과, 이러한 무정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고과장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의 가슴을 아리는 연기가 무엇보다 명품이었지만,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항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권고사직이나 정리해고 등으로 인해 상처받고 절망하는 실업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드라마의 모습은 사뭇 제게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모순을 고발하려고 하는 모습은 무한도전의 무한상사 편에서도 나왔습니다. 팀 내에서 누군가 한 명은 정리해고를 당해야만 하기에, 팀 전부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 너무나 절박해 보이고 애처로워 보여서 정말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이 특집에서의 백미는 결국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정준하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사를 떠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팀에서는 단 한 명도 정리해고 당할 수 없다면서 의기투합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결국 정준하가 정리해고 대상자로 낙인찍히자 팀원들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무엇보다 슬픈 건 그 외면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정든 회사를 떠나는 정준하의 뒷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팀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정리해고에 대한 무기력함은 칠칠치 못하게 어느새 제 눈가에 눈물을 고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편의 영상들이 내게 준 감동을 곱씹어보니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영상이 송출되는 매체는 TV라는 것을요. 이 두 영상은 분명히 정리해고된 대상자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을 실직자로 만들어버리는 이 체제의 근본적인 토대에 대해서는 건들지 않습니다. 직장의 신 10화나 무한상사편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정리해고 된 실직자들을 연민하고 동정하는 장치들이 잘 배치되어 있지만, 또 그들이 해고자가 되는 것이 일종의 필연적인 결과이게끔 그려져 있습니다. 이 영상 내에서 그들은 ‘잘릴 만 했던 자’들일 뿐 ‘잘릴 수밖에 없는 자’들은 아닙니다. 정리해고는 그들의 무능력이 초래한 결과로 그려질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이 해고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지 않습니다. 처음에야 그 사실을 부인하지만 고과장이나 정준하나 결국 묵묵히 자신이 무능력자임을 인정하고 회사를 제 발로 떠나고 말지요.

해고되는 자신들이나 그 해고를 지켜보는 이들이나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해고당하는 이들은 기껏해야 자신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팀원들에 대한 원망만을 할 뿐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저 해고당하는 자에게 연민어린 눈빛만을 전해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연민어린 눈빛 아래에는 자신은 그 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생존했다 라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강한 자존감과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또한 정리해고 되는 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분명히 할 것이지만, 결국 그들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눈빛 또한 영상 내에서 정리해고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빛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연민에서만 멈추었을 때, 오직 연민이 주는 수동적 카타르시스에만 도취되어 있을 때, 영상 내의 정리해고를 관조만 하는 이들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기력하게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겠지요. 영상 내의 사람들처럼 체제에 대해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 내의 친구들과 적대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능력은 오직 경쟁력으로서만 구축될 것이며, 반성의 회로는 더 노동에 포섭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만 머물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오직 ‘나’에만 빠져들게 되고 우리의 의식 안에서 ‘사회’라는 윤곽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사회는 재생산됩니다. 우리 눈앞에서 사회가 사라질 때 사회는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저항은 지워져가는 ‘사회’라는 윤곽을 끊임없이 다시 그려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무엇이 산출되고 있는지, 무엇이 재생산되고 있는지, 이 사회를 위해서 생산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이 사회를 위해서 진정으로 지워야할 것은 무엇인지! 이것들을 끊임없이 다시 그려내는 과정이야말로 이 ‘사회’를 보호하는 일이자 코뮤니즘의 시작일 것입니다. tv가 전해주는 수동적 카타르시스와 싸구려 우월감과 단절하는 것! 변화의 시작은 바로 여기부터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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