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의 공공공(公共空)

현재진행형의 여성국극: 정은영의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 (2013)

- 이솔

며칠 전 밤을 하얗게 세면서 루쉰의 <차개정잡문>(1935)을 읽은 탓일까? 오늘은 솔직한 문체로 집필하고 싶다.[1] 2012년 여름부터 2013년 가을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공공성과 미술에 관한 고찰을 그때그때 정성껏 공유할 계획으로 시작한 <위클리 수유너머> 의 기고는 격주는커녕 한 달에 한 번꼴로 겨우 완성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와 문화계 전반에 녹아든 공공성의 개념이 내가 그동안 미국의 진보적인 교수들에게 배워왔고 가슴으로 느꼈던 공공성과는 어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게 되면서 나 자신의 학문 또는 비평의 깊이에 대한 회의가 든 것일까.[2] 혹은 한국의 지역적으로 특수한 공공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답답할 정도로 더딘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일까. 어쩌면 일 년의 기간을 두면서 집필을 강행한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포기하는 대신 다년간 지속할 공공성과 미술에 대해 고민하는 길을 택했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고민을 두고 비평가의 사치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숨쉬기조차 힘겨운 빠른 순환을 강조하며, 프로덕션의 완성도, 오프닝의 성공 여부, 전시참여의 빈번도를 작가의 비평적 태도나 끈질김보다 더 중요시하는 한국 동시대 미술계에서, 어떤 한 가지 성찰을 수년에 걸쳐서 지속하는 것은 요즘 미술계의 페이스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든든한 아군을 만났다. 작가 정은영이다. 올해 4월 6일 페스티벌 봄에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라는 연극을 연출한 정은영. 그는 한 가지 개념과 주제를 두고 다년간 공들이면서 여러 가지 접근 방식을 시도하는 작가이다.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왠지 나 또한 나만의 방법론을 서서히 구출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얻었다.

여성국극은 국악의 창(唱)과 무(舞)에 대중성을 가미한 창극(일종의 뮤지컬)으로써 특히 6.25 전쟁과 그 직후 영화 산업이 잠시 주춤했을때 제일 주목받았던 근대대중문화이다.[3] 그 시초는 1948년 봄 당시 최고 국악인 중 박록주, 박귀희, 김소희 등의 주도 아래 약 30여 명의 여성 국악인들이 남성 위주의 국악판에 대한 봉기를 들면서 창설한 단체가 여성 국악 동호회였고, 창립기념 공연으로 그해 가을 모든 역할을 여성이 맡은 <옥중화>를 선보인 것이 여성국극의 첫 공연이다.[4] 그 후 50년대 번영기에는 십수개의 여성국극단체들이 활동했고, 주로 한반도의 역사, 설화나 번안극에서 영감을 받은 신파적 시대극으로 레파토리를 구축했다. 그러나 한때는 넓은 관객층과 패물이나 혈서를 보내올 정도의 열성팬들을 거느리던 여성국극이1960년대에 들어서는 여러가지 복합적 이유로 그 맥을 잇지 못한다. 후세양성 없이 회생 불가능한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주인공이었고 지금은 이미 예순, 칠순을 넘긴 제 1, 2세대 여성국극인과 그들의 예술이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 (2008-현재)에 담겨있다.[5]

 

<여성국극 프로젝트>을 얘기하기 전에 여성국극을 둘러싼 “대항적 공중 counterpublic”의 성격을 작품의 배경으로 펼쳐보고 싶다. 여성국극의 문화사적 혹은 여성사적 의의를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공공사사公公私私’라는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우리는 종종 나라, 마을, 종가라는 이미 구축되어 개인주체를 구속하는 제도를 ‘공’이라는 영역에 놓는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감성, 열정, 사랑, 정념 등의 감정적 매개체나 이런 표현방식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사’적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는다. 공公을 미덕으로 여기고 사私를 죄악시여기는 태도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신체적, 사회적 젠더를 언제나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내고자 하는 기이한 전통 또한 낳은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전복하려면—특히 한국이라는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의 폐단을 뼈저리게 겪어온 민족국가에서—공공성이나 공공공간에 대한 인식을 재정비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나는 한국 미술/예술사에서 공공성에 관한 담론은 막연히 공공장소public space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천을 가리키거나 사적인 것의 반대말로서의 공공이 아니라 한 공간이나 집단이 형성하는 공공성publicness과 사회성sociality으로 초점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주민, 시민, 민중, 대중 등 마치 공공성이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 같은 광범위한 주체와 관련된 모든 행위와 공간이 공공성을 띤다고 쉽사리 가정하는 대신에,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의 형성과정과 그 형성을 격려하는 상황과 공간을 (재)발견하고 인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국극이나 정은영의 작품이 예술과 공공성에 대한 담론에 일조한다고 믿는다. 여성국극은 남존여비 유교문화에서 근현대의 이성애 중심의 규범 모델로 변동한 한국사회에서, 젠더적 역할분담이 지극히 정돈된 상태를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를 전도/도착pervert하면서 문화 사회적 젠더 (다시)만들기에 참여한 예술공동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성국극의 연극적 언어나 국극인들의 사생활과 무대 생활 간의 유연성—혹은 삶과 무대의 상호작용이나 혼재성—을 살펴보면 대항적 공공성의 순간들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관건은 바로 ‘이런 복잡하고 시시때때로 변화하거나 사라지기도 하는 상호주체적 공간에 관한 작가적 실천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성국극이라는 이미 실존하는 문화예술 대항공중적 커뮤니티에 관해 정은영 작가는 어떤 미술실천을 생산하고 있는가? 작가는 한편으로는 여성국극의 젠더 생산의 표현방식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여성국극 역사와 여성국극인의 개인사에 (사회학적, 인류학적, 개인적) 관심을 표현한다. 2009년부터 여성국극의 리허설 광경을 기록 편집해서 비디오로 보여주거나 여성국극 전성기 기록 사진에 이들의 구술을 텍스트로 달아 평면작업을 만드는 데 주력을 기울였다. 2009년과 2010년에 완성한 <분장의 시간 The Masquerading Moments>, <뜻밖의 응답 The Unexpected Response>, <무영탑 Directing for Gender>등은 무대 전에 분장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는 영상이나 2세대 배우 이등우를 섭외해서 남자역할을 시범하고 1세대 배우 겸 연출자 김혜리를 초청해서 무영탑의 남자주인공 아사달의 ‘남자다움’에 대한 설명해보이는 영상이다.

어찌 보면 소극적인 방법을 취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듯하다. 사실 여성국극인들은 ‘(미술)작가적 개입artist intervention’이 전혀 불가능한 공동체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말하는 작가적 개입은 가깝게는 믹스라이스가 마석 이주노동자들과 협업을 지속한 예나 멀게는 스페인 작가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가 2001년 베니스의 비엔날레를 위해서 130명의 이주노동자 노점상인들의 머리를 염색한 작업 등의 포함하는 넓은 범주의 미술실천방법이다. 하지만 대부분 작업이 지식인/노동자나 작가/일반인의 이분법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여성국극이라는 커뮤니티와 정은영 작가의 관계는 작가적 개입이란 말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불가능 속에서 작가는 여성국극인의 삶으로 다가가 그들이 들려주는 연기 방식에 대한 구술을 비디오로 기록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의 비디오와 사진 작업은 작가 노트에서 묻어나오는 감정적 호소와는 거리가 먼 것이 눈에 띤다. 작가 노트의 시작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약 일년 전, 마침 여성국극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한 친구의 도움으로 여성국극계의 역사적 인물들을 가까이에 서 마주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일상적 공간에서 만나게 된 이 전설적인 배우들은 영락없는 ‘할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상과 무대의 구분이 그리 명료하지 않은채로 종종 ‘멋있는 젊은 남역’에 그들을 동일시하곤 했다. 더우기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로서의 강력한 정체화와 향수는 흐르는 세월에 대한 원망이 짙게 뭍어나기도 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연기자로서의 자부심과 무대를 향한 뜨거움, 차마 7-80대 고령의 노인들의 이야기라 믿을 수 없는 탈규범적이고 비전형적인 유쾌한 언어들의 유희는 내 상상력의 한계치를 한참이나 뛰어넘는 것이어서 나는 그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마다 마치 조증환자처럼 달뜬 기분에 허우적댔다.

 나도 작가처럼 여성국극의 “탈규범적이고 비전형적인 유쾌한 언어들”이 주는 “유희”와 “조증환자처럼 달뜬 기분”을 느끼고 싶어졌지만, 이러한 감정은 <여성국극 프로젝트> 비디오에서 얻기가 어려웠다. 개념적으로 다듬어진 사유가 배우들과의 거리를 느끼게끔 유도하기 때문인 듯싶다. 그런데 여성국극의 혹은 국극배우들의 정념적affective 언어를 “달뜬”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모두—작가 혹은 나같은 관객들—의 몫이 아닐까? 그리고 작가가 이런 ‘할머니’ 배우들의 감정적, 신체적, 운율적 언어를, 그리고 퍼포먼스를, 미술적 언어로 재생산해서 보여주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미술작가가 미술 외 분야의 다른 이들과 협업을 추진하는 작업실천은 협업 그 자체의 결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협업의 형식과 과정, 그리고 관객의 수용에서 작품의 성격을 엿볼 수있다.      

활발한 활동 당시 여성국극은 크게 두 종류의 관계—국극단 배우들 간의 자매, 모녀, 때로는 동성애적인 관계, 그리고 배우들과 여성열성팬들 사이의 관계—와 사회성sociability에서 새로운 소통의 언어를 창출하며 여성국극 공동체를 둘러싼 대항적 공공성을 형성했다. 아마도 오늘날의 관객을 팬으로 만들면 정념적 소통을 감흥 할 수 있는 기회가 관객에게도 오지 않을까? 그런데 바로 그 기회를 2013년 4월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 공연에서 맛볼 수 있었다.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2012년을 계기로 한 차례의 방법론의 전환을 겪는데, 이는 작가가 연극이란 매체를 통해 관객과 여성국극인의 만남을 주선하면서부터이다. 2012년 겨울 문화역서울 284에서 한차례의 시도를 거친 후, 조금 더 다듬은 형태로  2013년 4월 <마스터 클래스>를 연출했다. 연극이란 매체는 정은영 작가에게는 낯설었지만, 조영숙 이등우 등의 배우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영토였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그들은 진정으로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였고, 서강대 매리홀 소극장을 빼곡 채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소리, 몸짓 하나 하나에 집중하다가도 관중으로서 ‘추임새’를 넣어야 할 대목에서는 목청이 떠나갈 정도의 환호로 반응을 하며 그들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1시간이 넘는 연극이 그렇게 짧게 느껴졌을 때가 없었다.

1부에는 칠순이 넘은 제1세대 배우 조영숙이 자신의 삶, 여성국극의 역사, 그리고 여성국극의 몇 대목을 직접 선보였다. 국극무대에서 삼마이(해학의 미를 발산하는 조연배우)를 주로 맡았었고 몇 년 전 중요 무형 문화재 79호 발탈 보유자로 인정된 조영숙은 특유의 재담으로 일인 연극을 이끌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예전 사진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춤사위를 보일 때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관객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배우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데, 이때 그의 뒷편에 걸린 화면에는 슬라이드 프로젝션으로 이야기에 해당하는 사진—예를 들어 사범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녀 때 사진, 임춘앵 극단에서의 생활을 묘사할 때는 극단 단체사진—을 결합하며 배우의 (춤과 연기를 통한) ‘지금’과 (이야기와 시각적 보조를 통한) ‘그때’를 관객에게 동시에 전시한다.

그런데 현재와 과거의 대비는 뒤에 걸린 스크린에서 무너지기도 한다. 조영숙의 회상 대목에서 라이브 카메라를 든 스태프 한 명이 무대 위로 나타나 배우를 찍는데, 사진을 보는 배우의 모습이 스크린에 곧바로 투영되었다. 이때 실제 vs. 이미지 혹은 연극 vs. 기록이라는 두 가지의 구분이 서로 얽히게 되면서 ‘현재의 기록화’, 더 나아가 ‘과거 기록의 현재화’가 시도된다. 다시 말해서, 특수 기록—즉, 라이브 카메라의 흑백 영상—이 투사되면서 스크린이라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이미지들—5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기록 사진들—또한 ‘지금, 바로 여기’의 현장성을 얻는 것이다. 조영숙의 삼마이 역할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고귀한 왕자 같은 남자주연 (주로 임춘앵이 연기한 남자 영웅 캐릭터)에 대조되는 감초 같은 재담꾼 역할을 맡아온 조영숙은 그 끼를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 내내 뿜으며 공연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나는 무대에서는 언제나 망가질 준비가 되어있어”라고 말할 때, 조영숙은 어느새 1953년이 아닌 2013년의 삼마이로 다시 태어나있고 관객은 잠시나마 60년 전의 여성국극의 무대의 진면목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1부와 2부를 연결하는 것은 역시 라이브 카메라인데,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 뒤 대기실로 사라진 조영숙이 한 젊은 후배 배우에게 격려의 제스처를 하는 장면이 소리 없이 영상으로만 보여진다. 곧 이어 화면 속의 배우는 무대로 나타나고, 여성국극의 남자주연을 수련하는 연습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2부에서는 이등우라는 예순이 넘은 제 2세대 여성국극 주연배우가 춘향전의 한 대목을 연습생에게 전수하는, 이름 그대로의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를 연기한다. 이등우라는 남자역할의 마스터와 이몽룡, 춘향을 연기하는 두 여배우 등 총 세명의 배우가 무대에 서는데, 연습-반복-연기의 여정이 말 그래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이몽룡이라는 조선 시대 백마 탄 왕자의 걸음걸이, 때로는 ‘징그럽고’ 때로는 ‘정겨운’ 말투, 그리고 눈빛이 ‘남자답게’라는 형용사 아래에서 파편화되고 해석되고 재편성되어 마침내 여배우의 몸에 입혀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자라는 젠더가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로 재현될 때, 이를 언어화 하는 이등우의 대사 자체가 일종의 해학을 선사했다. “좀 더 징그럽게 해봐” 혹은 “여자가 삐졌잖아. 그럼 달래줘야지!” “그래야 남자 같지” 라고 지시할 때 여기서 강조되는 (한국)남자다움의 허상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 허상을 과장되게 표현해야 하는 연습생이 고전하는 장면 또한 연극의 묘미를 더했다. 남자다움의 문법은 학습할 수 하지만 하루아침에 답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답한 선생님은 잠시 생각한 후에 “그래, 남자를 한번 시켜보자” 하고는 남자관객을 한 명 무대 위로 초대한다. 물론 이 관객은 조금 전까지 해석된 ‘남자다운’ 걸음걸이를 연기하는데 비참하게 실패하고 다시 객석으로 돌아가 더 많은 웃음을 이끌어낸다. (관객 역할은 너무나 적절하게도 다큐멘터리 영화 <종로의 기적>을 연출한 이혁상 감독이 맡았다.)

젠더의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메세지는 정은영 작가의 이 전 영상작업에서도 보여주려 시도했지만, 이번 연극을 통해 더 즉물적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반복의 과정, 시간을 무대라는 시공간에서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6] 이 연극에서 여성국극인은 여성국극인 자신을 연기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연기performance는 허구의 성격을 띠기보다 그들의 생활을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생활방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국극이라는 장르이며 역사이고 살아있는 대항공중에 새로운 각본과 미장센이라는 미학적, 담론적 프레임을 씌운 것이 바로 정은영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프레임은 60년 전 생성된 공공적 발화 행위 public speech act가 다시 이해될 수 있는—즉 오늘날의 새로운 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장site을 생산했다.   

비록 연극은 기립박수로 끝났지만, 작가가 제공한 프레임의 힘은 그 뒤에도 지속되었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어느새 여성국극 배우들의 ‘빠순이’들이 되어있었고 무대 밖에서 서로 배우들과 인증샷을 찍으려고 다투었다. (만약 같은날 정식으로 여성국극 공연을 관람했다면 이렇게 열광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같은 관객들이 4월27일에 남산한옥마을에서 열린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의 <흥보가>공연을 봤다면 사정이 달랐을 것 같다.) 오늘날 관객들에게 이들은 전설의 삼마이인 동시에 조영숙이란 한국여성이며, 이몽룡인 동시에 이몽룡보다 더 멋있는 이등우라는 국극배우였다. 관객들은 국극배우들과 함께 만든 공공의 공간에서 대항공중의 정념적 언어와 퍼포먼스로 소통을 한 것이다. 물론 <(오프)스테이지 / 마스터클래스>의 팬들이 형성한 관객의 공동체는 수십 년 전의 여성국극팬들과는 다른데, 오늘날의 우리는 사라진 역사를 (조영숙의 말처럼) ‘평범한 늙은이’가 되어버린 국극인들의 삶을 향한 어떤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또 이 역사의 한 장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으로 뭉친 것 같다. 함께한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 또한 헤어졌지만 반짝했던 순간의 기억은 언젠가 다시 발화할 가능성을 내재한다.


[1] “문필가의 임무는 해로운 사물에 대하여 당장 반향을 일으키거나 항쟁을 하는것이며 감응의 신경으로 공격 또는 수비를 위한 수족으로 되는데 있다. 자기의 거편대작에 뜻을 두고 미래의 문화를 위하여 머리를 쓰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현재를 위하여 항쟁하는것도 역시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싸우는 문필가인것이다. 그것은 현재를 잃는다면 미래도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노신선집 4 (여강출판사,1991),1.

[2] 내가 처음으로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의 Publics and Counterpublics (2005)를 접한 것은 더글라스 크림프의 앤디 워홀 실험영화 수업이었다. 크림프는 워너의 글을 워홀의 작품 및 사무엘 드레니Samuel Delany의 뉴욕의 공중 목욕탕에 관한 글과 함께 토론했다. 

[3] 백현미, <한국창극사연구> (태학사, 1997), 333-356; 반재식, 김은신 <임춘앵전기> (도서출판 백중당, 2002), 79-99.

[4] 때로는 유행소설을 각색 연출하게도 했는데 1955년 임춘액과 그 일행이 현진건의 <무영탑> (1938)을 선보였다. 반재식, 김은신, 362-3.

[5] 내가 정은영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9년 12월 부터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시선의 반격>전 (김현진 기획)이었다. 세로로 설치한 42인치 평면TV 두대에 <분장의 시간> (2009, 8 min 16 sec)과 <뜻밖의 응답> (2009, 4 min 35 sec)이 나란히 틀어져 있었고, 전시장 뒤 편의 블랙박스에는 세 번째 비디오 <리허설> (2009, 93 min 13 sec)을 상영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초상들이 내가 남긴 인상이 강해서 나중에 작가와 따로 만나기를 청해서 2011년 추운 겨울에 홍대 근처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받은 느낌은 작가가 어떠한 공간적 사유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2011년 여름에는 부산의 영도 조선소를 방문하고 85호 크레인 부근에서 찍은 영상과 그해 여름 유독히 지독했던 장마에 대한 기록 영상을 편집해서 3-channel 비디오 작품 <장마 The Season of Occupation> 을 제작다고 했다. 시위의 장소와 장마에 대한 개인적 사유를 정치적인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정은영 작가의 이런 시도는 그 중심부의 언저리에 존재하는 목소리 크지 않은 자의 힘 있는 발언이다. 작가는 이런 태도를 품고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계속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것 같았고, 나는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6] 연극이 끝나고 조영숙, 이등우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정은영은 토론자의 역할을 자청했는데, 남성관객 중 한 명이 이등우에게 전형적인 질문을 했다. 남자다운 모습의 영감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여러 (생물학적) 남자에서 얻느냐, 아니면 이상적인 남성상을 창작하는가 물었다. 이등우는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더 남자같을까 연구해서 인물을 구상한다고 대답했다. (필자 강조)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한 듯 한 관객의 말투를 직격으로 민망하게 하는 굉장한 대답이었다.

응답 2개

  1. damaged..?말하길

    (제가 눈이 안 좋은 탓에 그만 본의 아니게 이등우 선생님 존함을 계속 잘못 적는 큰 실수를 저질렀네요… 아래의 댓글을 수정하려고 해도 안 되구요)

  2. damaged..?말하길

    비록 잘 알진 못하지만 여성 국극에 대해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다큐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과 위의 ‘마스터클래스’ 공연에 대해 알게 돼 둘 다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공연 이후 시간이 좀 흘렀습니다만, 혹시 차후에 본격적인 여성 국극 공연이나 행사가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님의 공연평을 읽게 됐습니다. 공연과 영화 모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네요.

    다만 각주 6번에 언급하신 질문을 던진 당사자로서, 님께서 제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셨길래 바로잡고자 결례를 무릅쓰고 댓글을 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공연 2부 마스터클래스 도중에 남성 관객 한 분이 잠깐 무대에 동원되셨죠. 참고로 ‘Legalize Gay(동성애자를 합법화하라)’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계시던 그 분은 게이 커밍아웃 다큐 영화 ‘종로의 기적’의 감독이고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 분이 생물학적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말투, 행동거지 모두 이동우 선생님보다 덜 ‘남성적’이어서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죠. 또한 마스터클래스에 줄곧 상대역으로 출연하신 여성 제자분은 여러모로 이동우 선생님만큼 ‘남성적’ 연기가 몸에 배지 않았다는 점을 확연히 드러내셨구요. 즉 생물학적 성별에 도 불구하고 그다지 ‘남성적’이지 않은 남성 관객, 아직 수련 중이라 ‘남성적’ 연기가 미흡한 여성 예술가, 그리고 ‘남성성’을 너무나 잘 구현하셔서 모르는 사람은 성별마저 혼동할 수 있는 여성 예술가 세 분이 무대에 서신 거죠.

    관객의 허를 찌를 수도 있는 이같은 3중의 대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소위 ‘남성성’/’여성성’이란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하게 훈련에 따라 습득하고 구현할 수 있다는 점, 즉 젠더란 시대와 공간에 따라 유동적이며 가변적인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은 저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성별은 여성 국극과 반대지만, 잘 아시듯이 중국 경극과 일본 가부키에는 남성 배우가 여성 배역을 맡는 전통이 있기도 하니까요.

    바로 이 때문에 저는 당시에 “이동우 선생님께서 오히려 남성 관객보다도 더 ‘남성적’으로 보이신다는 점에서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토록 믿을 수 있게 수행하시고 재현하신) ‘남성성’의 모범이나 기준은 어디에서 찾으시느냐”는 뜻으로 질문한 것이죠. 이 때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동우 선생님께서 실제로 살아 있는 주변의 남성들을 참고하시는지, 여성 국극 전통에 이미 양식화된 ‘남성’ 연기법이 있어서 습득하셨는지, 아니면 선생님께서 혼자 궁리하시고 만들어내시는지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하게 됐습니다만 저는 남성 동성애자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흔히 접할 수 있는 게이들의 ‘여성적’ 이미지에 대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야말로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점을 일상 생활에서 날마다 실감하는지도 모르죠. 기존의 사회와 문화가 가르치고 요구하는 성별 역할을 몸과 마음으로 ‘위반’하면서 살아가니까요. 실제로 위 공연을 함께 본 제 게이 친구들은–농담 반 진담 반으로–이동우 선생님이야말로 저희보다도 ‘남성적’이시고 ‘남성성’을 핍진성 있게 재현하신다며 감탄하고 재미있어했죠.

    특히 성소수자로서 저는 남성 우월주의자도 생물학적 결정론자도 아닙니다. 당시 질문을 던진 것도 이동우 선생님의 연기와 예술이 너무나 그럴 듯해서 그 영감 또는 근원이 어디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아무리 기존의 젠더 2분법을 무시하고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 일단은 말투, 행동거지, 옷차림새, 머리 모양 등에서 ‘남성성’/’여성성’에 대한 기준 또는 개념을 학습 받으니까요. 성적 지향이 어찌 됐든 간에 저같은 생물학적 남성들도 주변의 가족, 친구, 교사, 동료 등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텔레비전 연속극, 영화, 소설 등 허구적 산물을 통해서 소위 ‘남성성’의 근거와 모범을 끊임 없이 주입 받고 또한 그 기준에 의해 평가 받죠. 이성애자 남성분들도 ‘남성성’을 제대로 구현해야만 사회적, 문화적으로 인정 받는다는 압박감은 느끼실 테구요. 즉 저는 기존의 성별 역할에 대한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하는 동시에 배반하는 이동우 선생님의 연기 비법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용만 길고 불충분한 설명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저는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착각”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의 젠더 구분을 갖고 놀면서 전복하기까지 하는 이동우 선생님의 명연기에 대한 탄복과 쾌감에 궁금증이 생긴 거죠.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는 연기 예술 자체에 대한 제 무지에서 비롯된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연구 공간 ‘수유 너머’가 성실하고 유능한 학자들의 모임이라는 점은 예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님께서도 뛰어난 분이시니 이렇게 칼럼도 연재하시는 거겠죠. 그러신 만큼 더더욱 관객 개개인의 동기와 반응을 손쉽게 넘겨짚지 않으시도록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좋은 공연에 대한 추억과 그로 인해 생긴 관심이 무심코 던지신 돌로 반감된다면 저로서도 님으로서도 슬픈 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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