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사토리세대의 미래 – 부자유한 자유를 획득할 것인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할 것인가?

- 말자 1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최초의 메커니즘에는 인간이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개인적 자아에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합시켜 가고자하는 성향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상실한 일차적 관계 대신 새로운 ‘이차적’ 관계를 추구하는 성향이다. 이러한 마조히즘적인 노력으로써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양상은 열등감, 무력감, 개인의 하찮음에 대한 감정이다. -중략- 그들은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대신, 현실적이거나 또는 외부의 힘에 의해 주장된 질서에 복종하고자한다. ‘나는 원한다.’거나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그들에게 삶이란 그들 자신이 지배도 통제도 할 수 없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존재일 뿐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홍신문화사, p120, 5장 도피의 매커니즘-권위주의 中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던 나는 간만에 외박을 하고싶어졌고, 아직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나는 부모님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고 a와 함께 있을 것이라며 전화를 걸고 외박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a는 급작스러운 일로 오지 못하게 되었고 내 곁에는 b만 있었던 것이다. 뭐.. 세칙은 달라졌지만 이왕 허락도 받았는 겸 밤새놀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좀 처럼 없는 일이기에 내 마음은 초조함과 불안감이 이 따금 엄습한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뜬금없이 카톡을 보냈다. a를 만나면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왠지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황당한 마음이지만 애써 밝게 그간의 사정을 말한다. 집에는 애써 밝게 동영상도 찍어가며 사실은 b랑 있다는 것을 ‘인증’한다.

내 나이 서른에 육박하는 삶, 그 모든 인증을 끝낸 뒤 억울함과 황망함이 몰려온다. 어이가 없다. 내가 방금 뭘 한 것인가. 오늘 같은 날은 가족의 구속에 넌더리가 난다. 나를 그토록 믿지 못하는 것인가? 나보고 집에만 있으라는 것인가? 들어가있어도 어두운 얼굴로 나를 보는게 다인데. 이러한 생각을 꾹 눌러담고 가족의 권위에 한 껏 부응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이 권위적인 그들의 구속은 언제 끝날 것인가? 자립은 언제 가능할 것인가. 사실 자립은 언제든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안전한 자립을 위해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 나는 자립이라는 자유 대신, 아직도 가족의 권위에 대해 순종하며 보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과로 오는 것은 열등감, 무력감, 개인의 하찮음에 대한 감정이다. 이 감정 어딘지 굉장히 익숙하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당장의 월급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느꼈던 일하던 중에 느꼈던 권위에 순종하며 느꼈던 그 무력감,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순종. 스스로를 중요하게 느끼지 못한 그 순간들과 매우 유사하다. 나에게 있어서 가족의 구속은 권위적인 조직의 구속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의 구속도 일부분 사랑과 만족을 주고 나에게 희생, 무력감, 개인의 하찮음을 준다. 물론 권위적인 조직은 사랑과 만족이 아닌 성취와 보상을 준다. 그리고 희생, 무력감, 개인의 하찮음을 몹시 심하게 느끼게 하는 점이 조금 더 다를지도 모르겠다.

여튼 이 모든 상황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내가 취하는 행동은 합리화 이거나 지나치게 바쁜 것,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이 맞는 것이라고 합리화 하고 그 사실들을 잊기 위해 지나지게 바쁘게 사는 것이다. 현상유지, Status Quo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노력한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믿으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라는 근대화적인 발상으로 스스로를 몰아치고 몰아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나’들이 다소 초탈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바로 사토리세대, 득도한 집단이 아닐까 싶다. 사실상 그렇게 혹사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 그냥 지금 있는 자리에서 만족하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엄청난 격차사회(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인 초인이거나, 로또 정도가 가능하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도 좋다. 어찌보면 초탈, 어찌보면 엄청난 하류사회 의식이며, 격차사회에 대한 도피인 것 같기도하다.

사토리세대가 추구하는 삶은 초탈이기도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갈망인 것 같다. 나는 내 삶에서 중요하고 싶다.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나쁜 일을 하고싶지 않다. 적당히 벌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친구가 필요하다. 괴롭지히지도 괴롭지도 않고싶다. 이러한 선택이 기존의 현상유지파와 다르기에 너무나 두렵고,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모르겠다 . 그렇지만 알고있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두렵고, 남들이 선택하는 것과 다른 것인 불안하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살고싶고 택하고싶으면 이제 조금씩 무언가 저질러 보아야한다.

사토리 세대의 미래,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삶. 이런 삶을 위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소소로운 일들을 저지르는 세대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들의 형태가 재미있는 부동산을 만들거나, 감자를 팔거나, NPO를 만들거나 신발장인이 되거나, 보편적이지만 의미있는 여행을 즐기거나,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거나, 자동차를 공유하거나 햇빛발전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하는 것이건 무엇이건 사실 상관은 없다. 아니면 이러한 형태 조차도 벗어난 다양한 형태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여튼 바라는 것은 두렵지만 함께 이러한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가 더 커졌으면 하는 것이다. 뭔가 저질러보고싶지만 아직은 용기가 부족한 득도세대, 사토리세대가 여기 하나 앉아있다.

응답 1개

  1. 그림말하길

    와우. 자유로부터의 도피 읽어봐야겠어요!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