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철교 2-1 에세이] 안경으로 죽여라!

- 이상욱

창조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파괴되었다. (…)

나는 살아 있는 무대이며, 다양한 배우들이 다른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 위를 지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영화를 위한 제안

몸수색에 통과한 남자. 그는 방으로 들어가길 허락받는다. 방에는 의심스런 눈을 한 안경 쓴 남자가 앉아 있다. (…) “마이클 꼴레오네의 전갈이라는 게 뭔가?” “아주 중요한 얘기라 귓속말로 해야 됩니다.” 몸수색에 통과한 남자는 귓속말을 허락받는다. 이윽고 남자는 안경 쓴 이의 귓가로 다가가 마이클 꼴레오네의 말을 전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안경 쓴 이의 안경을 벗겨 그의 목덜미를 찌른다. 안경 쓰고 있던 이는 목덜미에 안경이 박힌 채 죽음을 맞이한다. -《대부3》中

나는 영화가 안경으로 죽이길 바란다.

안경이란 무엇인가

안경 쓴 남자가 죽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분명 자신의 방에 들어올 남자가 위협적일 것을 예감하고 미리 몸수색까지 감행하였다. 또한 귓속말을 요청받았을 때도 그는 경호원으로 하여금 재차 그가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예방에도 불구하고 죽게 되었다. 결코 자기가 쓰고 있던 안경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안경이란 그저 자신의 시력을 보조해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안경은 그런 남자를 죽였다. 자신을 안경이란 이름만으로, 시력을 보조해준다는 그저 한 가지 의미만으로 생각하던 그 ‘누군가’를 한때 ‘안경’이라 불렸던 사물은 죽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탄생도 있었다. 남자가 죽은 그 자리는 또한 탄생의 자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때 ‘안경’이라 불렸던 사물은 대부 마이클 꼴레오네의 ‘부탁’을 수행한 무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한 가지 의미로만 제약하던 ‘안경’이란 이름과 그 이름으로만 자신을 바라보던 이를 죽임으로써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무기’라는 다른 이름으로서의, 이름에 부과되는 새로운 제약 아래서의 부활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물은 ‘무기’로서만 그의 ‘온 생애’를 지속할 것인가? 이 또한 불가능할 일일 것이다. 대부와 그의 ‘친구들’의 세계에서 ‘몸수색 리스트’는 빠르게 업데이트된다. 안경이 무기가 됐다는 정보는 이미 ‘리스트’에 올랐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 다시 안경을 무기로 삼으려 한다면 그의 목숨은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닐 것이다. 무기로서의 안경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의 무기로서의 삶은 안경을 손에 든 행동대원의 삶과 함께 끝장날 것이다.

그렇다면 한때 ‘안경’이라 불렸던 사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전히 ‘안경’이며 ‘무기’, 그리고 ‘무기로서의 안경’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하나의 이름, 하나의 의미로 가두려는 ‘누군가’를, ‘무기’가 되어 죽임으로써, 그의 시각을 변경시킨다. 그러나 이 시각을 변경시킨다는 말은 차라리 다른 시각을 가진 ‘누군가’를 탄생시킨다고 하는게 더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시력을 보조하던 안경은 시각을 탄생시키는 ‘안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무기이며 산모이기도 한 안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안경이 시각을 탄생시키는 안경으로 다시 태어나고 또 안경에 의해 새로운 시각이 탄생함과 동시에 그것들은 다시 죽게 될 운명에 처한다. ‘몸수색 리스트’가 업데이트 되는 속도는 탄생의 기쁨을 누릴 시간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비평가 바쟁에 따르면 조형예술의 역사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연의 물적 지속성을 방어하는 과정의 역사였다. 조형예술은 자연 현상을 “미이라화”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이라화를 향한 욕망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있었으니, 바로 인간의 눈이었다. 인간의 눈으로 인해 자연 현상은 ‘순수한 그 자체’로 미이라화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조형예술의 미이라화의 꿈은 인간의 눈이 있던 자리를 “비정한 기계장치”, 즉 카메라의 눈이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로써 “외부 세계의 상(象)이 인간의 창조적 간섭 없이 자동적으로 형성 되”게 된 것이다. 조형예술에게 마침내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인간의 간섭이나 개성의 배제가 완벽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그것은 “피사체의 선택, (…) 어떤 각도에서 잡는가, (…) 또 그 사상(事象)의 교시 능력이 어느만큼 있는가” 정도에만 한정된, 미이라 콤플렉스를 충족시키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일 뿐이었다.

카메라의 눈은 이렇게 “한 송이 꽃이나 눈의 결정체”를 ‘미이라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기호나 상징 같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독특성, 그것만이 갖는 유니크한 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보존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제 우리는 “사물들을 낯설고 이질적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사물들의 시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감추어진 “의미의 여러 레벨”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정한 기계의 눈이 안경으로 죽이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시네아스트는 누구인가

익숙하던 풍경, 익숙하던 사람들이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소 익숙하던 그들이 영상 속에선 어딘지 낯설어 뵌다. 더 좋은 예는 바로 자기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영상 속에 담겨진 내 모습은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내가 내 얼굴이라고 알고 있던 그것과의 간극이란 쉽사리 극복하기 어렵다. 나라는 걸 도저히 인정하기 힘든 것이다. 기계의 눈을 통해 내가 나라고 생각하던 그 사람은 죽게 된 것이다.

영화와 시네아스트가 해야 할 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의 눈 대신 기계의 눈을 사물 앞에 놓음으로써 자신의 눈으로 결코 볼 수 없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 대부3의 ‘안경 살인’ 씬은 시네아스트의 개인에게 들이닥친 사건이기도 하다. 목덜미에 꽂힌 안경은 비정한 기계의 눈에 비친 사물이다. 그것은 자신을 안경으로만 보던 이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안경은 시각을 변경하는, 새로운 시각을 낳는 ‘산모로서의 안경’이기도 하다. 안경을 무기로 발견한 이가 태어난 것이다. 시네아스트가 해야 할 일이란 이 죽음과 탄생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계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것이 발견한 ‘안경’을 통해 죽은 누군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 누군가. 시네아스트는 영화를 통해 변화하는 자이다. 또한 이로써 그의 변화의 과정을 담은 영화와 시네아스트는 다시 안경으로 관객의 목덜미를 겨눈 이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또 다른 죽음과 탄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살해와 출산의 과정은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경이 무기이게 된 그 순간 그것의 무기로서의 삶은 다시 살해당해야 한다. 안경을 들고 대부의 ‘부탁’을 수행하러 갔던 이가 죽을 차례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복수전이다. 안경을 무기로 사용할 이들은 끊임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은 이들의 복수를 위해 수많은 ‘다른’ 안경들이 탄생할 것이다. 솜사탕, 종이컵, 망고, 텔레비전, 형광등 같은 것들이 그 이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의. 영화는 이 죽음과 탄생이 발생하는 장소이며 또 다른 안경들일 것이다. 또 다른 안경들, 그것들은 영원히 살해와 출산을 반복할 것이다. 시네아스트는 이 장소에 자신을 열고 내맡겨야 한다. 그리고 끝없이 목덜미에 안경이 박히고 다시 태어나는 자일 것이다. 이 죽음과 탄생의 기록이 바로 영화이며 안경일 것이다. 영화여. 시네아스트여. 그리고 영화를 경험할 모든 이들이여. 안경으로 죽여라. 아니 죽어라. 다시 태어나라.

※참고문헌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박상규,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 영화이론 연구』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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