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철교 2-1기 에세이] 전복하는 민주주의-민주주의 혐오자 니체와 함께 민주주의 해체하기

- 최영철

1.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두려움

민주주의는 대체로 지지와 옹호의 대상이었다. 신념에 의거해서 민주주의를 당당하게 비난하고 혐오한 소수의 사람들[1]을 제외한다면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한 예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보통선거제도의 실시 이후 민주주의는 표를 구하는 엘리트 정치집단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가 되었고, (정치체제와 지배자의 성격이 그토록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들은 자신의 국호에서 democracy와people을 빼놓지 않는다. 경쟁적 정치 집단들 사이에서도 민주주의는 공통분모가 되었으며, 어떻게 이를 더 잘 실현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동의하는 전제이자 모두가 지향하는 목표가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만인의 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주의의 내용과 의미는 모두 명료해져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닌 것인가? 그것을 달성하였는가 아직 못하였는가 만이 문제인가? 그러나 알다시피 민주주의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그것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이 처한 조건이 무엇인가에 따라 매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시장을 기반으로 한 경제와 잘 합치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반면 사회주의적 경제개혁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 자유주의자들로부터 환호를 받는가 하면 전체주의를 향해 날린 포화의 유탄을 함께 맞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만인의 지지는 이렇듯 동일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그 기호가 주는 (정의로운) 상징을 점유하기 위해 모여드는 정치지단들의 공통의 우산에 불과하며, 동시에 우산 속의 불편한 동거이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라는 우산 속에는 전략적 이득뿐 만 아니라 정치적 지배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힘도 함께 있다. 그 힘은 우선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기표에서 유래하는데 소수의 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선택과 지지에서 합법성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개별 정치가들에게 퇴출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모스(demos)의 지배(cracy)라는 급진적인 사상은 그것이 대중의 각성과 분출을 통해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현실화될 때 보다 근본적인 공포를 야기한다. 그러한 상황은 대의제에 의해 합법적 지배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적 엘리트 집단 전체에게 악몽이다.이들은 정치전략에 의해 민주주의에 기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것을 봉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잘 다룰 수 있는 손쉬운 민주주의로 테두리를 치고 팽창과 폭발을 적극적으로 방지해야만 한다.

이러한 정치적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봉인한 민주주의를 대중들이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 정치적, 법적, 이념적 전략을 구사한다. 봉인의 전략은 민주주의를 자기동일적, 고정불변인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위에서 민주주의를 ①법과 제도, ②척도와 대립항, ③합일과 동일성, ④고정된 목표지점으로서 못박아 둔다.

2. 민주주의를 봉인하는 전략들

민주주의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이러저러한 속성, 역사, 이상을 끌어 들여 설명해도 명쾌한 정의는 쉽지 않다. 설사 정의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반대자를 낳을 것이며, 그 정의는 매 순간 변화할 것이다. 또한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성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앙상한 것,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묻기에 앞서 그것이 왜 정의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정의하려는 욕망을 갖게 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흔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바와 달리, 민주주의가 먼저 나타나고 그 후 이것에 대한 지향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민주주의에 앞서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이 먼저 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내용과 방식에 따라 각자의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정의하려는 욕망은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정체불명의 요동치는 무엇으로 남겨 둘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가시적이고 이해 가능한 영역 내부로 끌고 들어와야만 정치적 지배자들은 그것을 제어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다. 규정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불확실함이고 공포이다. 민주주의를 확실하게 못박아 두는 것은 이 커다란 정치적 담론을 자신들이 장악하지 못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기에 대한 예방책이다. 민주주의를 가시적이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그것의 고정불변성에 대한 승인으로, 다른 한편으론 그것의 역동성에 대한 부인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불변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봉인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법, 제도, 절차

민주주의를 가시적인 것으로, 고정불변한 것으로, 예측 가능한 것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우선 그것을 하나의 이상적인 정치체제 및 정치적 운영원리와 동일시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왔다. 즉 보편적 선거, 선출된 대표들에 대한 권력양도, 다수의견의 관철과 이에 대한 복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 권위로 민주주의는 환원되어 왔다. 이것이 법과 제도 속으로 융해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법과 제도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고 이들에 의거한 일련의 절차로서만 나타나게 되는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여기에 남겨진 것은 기계적 규칙들 뿐이며 이 규칙들에 의해 생산된 매 번의 정치적 결과들(가령 대표자 선출, 법의 제정과 개정 등)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가 실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여기에서 소멸된 것은 대중들의 의지, 역동적인 의지이며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흐름과 운동이다. 우리는 선거라는 제도에서 이를 매번 경험한다. 수만 가지 힘들 간의 관계는 투표용지 위의 선택으로 집약되고, 대중들의 의지는 주권행사를 위한 투표참여의 의지로 한정되며, 대중들의 상승된 힘은 특정 정치집단의 승리로 융해, 소멸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선거과정을 통해 데모스의 지배는 권력의 양도로 끝을 맺고, 정치적 지배자들은 이것을 두고 민주주의가 다시 한번 실행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생명력이 소진되어버리고 규칙과 절차로 대체된 민주주의를, 대중들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념적 전략은 이제까지 효과를 본 듯 하다. 법을, 제도를, 절차들을 숭배하게 되고 그 대신 자신의 힘을 반납하고 정치적 결과물에 대한 복종을 민주주의의 미덕으로 동일시하게 된 대중들이 오늘날 민주주의가 구사한 봉인효과의 증인들이다. 법과 제도와 절차들은 마치 자신이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태로서,그 정의로움을 독점하고 있는 양 추앙되며 수호해야 할 무엇이 되었다. 그러나 법과 제도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해당 사회에 새겨 넣은 결과물이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다.

법과 제도와 절차들이 도전 받을 수 없이 명료하고 고정된 민주주의의 현실태가 되는 한, 민주주의는 그것들 앞에서 지지를 선언하고 순종하는 것만으로 왜소화 되어 버린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그것들에 의해서 실현되거나 보장되는 것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질식 당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법률상태란 힘을 목적으로 하는 본래의 삶의 의지를 부분적으로 제약하는 것으로 …….. 언제나 예외적인 상태일 뿐…” “하나의 법 질서를 권력의 복합체의 투쟁에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모든 투쟁 일반을 방지하는 수단으로서 절대 지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 삶에 적대적인 원리이자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자 해체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려는 기도이며, 피로의 징후, 허무에 이르는 사잇길이 될 것이다.”[2]

민주주의=척도에 의한 대립항

민주주의를 하나의 고정적 실체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 민주주의가 아닌 것 또한 고정한다. 민주주의를 안심할 수 있는 비무장 지대로 만들기 위해서 그것은 우선 자기동일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는 경계선이 설치되고 이것에 따라 민주주의인 것과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나뉘어지게 된다. 이렇게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항이 완성된다. 이 대립항 속에서 민주주의를 승인하는 척도가 발명되며, 척도는 민주주의가 아닌 것들에 대한 적대, 배제, 경멸, 단속, 처벌의 근거가 된다. 예컨대 혼란, 무질서, 폭력, 불복종, 저항 등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으로 분류되어, 조화, 합의, 이성적 토론을 그 속성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들이 된다. 척도는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무엇을 민주주의로 승인할 것인가,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를 결정하는 심판자가 된다. 민주주의가 펼쳐질 수 있는 수많은 길들과 수많은 잠재성들은 이 심판대 앞에서 거절되고 추방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3] 승인이나 거절은 그 대상을 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승인이나 거절은 이 사회라는 ‘집합적 신체’의 일부만을 취하는 것이고 분할해서 취해진 것은 더 이상 생명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러한 발명된 대립항은 말 그대로 가상적인 척도에 의한 가상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립항과 척도는 그 허구성 때문에 조롱 받아야 할 대상이지 신봉의 대상이 아니다. 이 대립항과 척도에 근거해서 민주주의를 구분하고 지지하는 것은 자신이 살해한 대상을 숭배하는 도착에 다름 아니다.

민주주의=합일과 수렴

민주주의를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 혹은 그 시도로 이해하는 태도는 공동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에 서있다. 동일성이야말로 조화와 합일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그 반대자인 불일치와 무질서, 적대와 충돌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일성은 근거가 매우 희박한 것이어서 사상가들이 공동선, 합리적 이성, 무지의 베일 등의 개념을 발명해내지 않고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가령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시각에서는 개인들이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에 합의, 타협, 조정을 위한 공동의 지반이 부재하게 된다. 개인들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합일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때 이러한 유보가 가능한 지점이 바로 공동선이나 합리적 이성이다.[4] 공동의 지반과 보편성으로 환원된 인간이라는 설정의 허구성은 여기에서 부차적인 문제이다.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원의 시도가 사회의 퇴락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동질성으로 수렴된 사회와 대중들이란 생명력의 소진을 의미한다. 하나의 공통된 지향을 찾기 위해 개별자들의 차이와 그에서 비롯되는 관계성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가 얼마나 동질화되었는가와 상관 없이, 합일을 지향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대중들이 자신을 하나의 틀 안에 구겨 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름을 부정하는 삶이 추구되는 사회에서 역동성이란 존재하는가?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역겨워했던 평등과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닐까? 합의와 수렴의 과정을 통한 민주주의는, 개별자들이 순식간에 ‘우리’라는 ‘무리 존재’로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성한 합의의 결과라는 형태로 복종해야 할 대상을 산출하고 앞으로 각자가 이것에 비추어 자신을 검열해야 하는 법을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창조자이자 입법자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고정된 목표점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는가? 우리는 민주화된 국가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단계 혹은 목표지점으로 설정하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또한 민주주의를 성취 가능한 무언가로 가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혹은 발전해왔다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태도 위에서 소위 ‘민주화’라는 표현은, 때로는 그것을 성취한 주역이라고 자임하는 자들이 업적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거나, 때로는 더 이상의 급진적 주장과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실천활동과 동떨어진 곳, 도달하고 성취해야 할 높은 곳에 민주주의를 올려놓는 태도이다. 즉 대중들의 실천에 의해 오늘도 내일도 계속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제시된 필연적이고 규범적인 종착점에 민주주의를 놓는 것이다. 비난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당신은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관점이 잘 감지된다.

하나의 목표점과 방향을 갖고 발전해나간다는 민주주의 관념은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지만 사실은 이 목표점이 매번 갱신되고, 방향은 수정되고, 발전보다는 국면의 교체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목표와 방향이 고정불변의 형이상학의 영역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은 힘들간의 충돌과 ‘지배와 제압’에 의해 늘 새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목적, 모든 효용성이란 하나의 힘에의 의지가 좀더 힘이 약한 것을 지배하게 되고, 그 약한 것에 그 스스로 어떤 기능의 의미를 새겼다는 표시에 불과하다… ‘발전’이란 하나의 목적을 향한 진보 과정이 아니고… 제압과정의 연속이며…”[5] 따라서 민주주의는 성취 가능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발전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사회 외부에서 도도히 나아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반대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그 활동에 의해서 매번 문제가 던져지고, 목표가 제시되고, 이를 관철시키려는 힘과 의지의 작동 안에서만 그 변화가 포착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성취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시도는 매번 실패한다. “민주주의는 영원하다. 모든 시대는 민주주의로부터 잴 수 없는 거리를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가 납득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것과의 거리라는 점에서 한없이 멀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 시대에 고유하다는 점에서 한없이 가깝다”[6]

3. 민주주의의 해체와 그 귀결

얼마 전 한 연예인이 ‘민주화’라는 단어의 용법을 변형해서 사용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 연예인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근거로 삼는 바는 그 용법이 한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용법과 같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새로운 뉘앙스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졌고 많은 이들이 이런 용법에 분개했다. 부인, 비난, 사과, 개탄 등의 익숙한 수순을 밟으면서 잊혀져 가는 이 사건에서, 그러나 정작 잊혀져서는 안될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다수일지 소수일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변형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감각에서 아주 동떨어진 것으로 변형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있다’는 말로 비난해 버리고 돌아서는 순간 앞서 서술한 봉인 안에 우리도 갇혀버리게 된다. 용법의 변형, 감각의 변형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들이 경험한 민주주의와 그것이 유발한 감각의 기원을 찾아본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 지점을 파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붕괴되었다고 느끼는 때가 민주주의를 세우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봉인을 해제하고 나면 민주주의는 실로 포착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법이나 제도가 아니며,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의 경계는 흐려지고, 목표지점과 방향도 사라지며,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체가 된다. 그러나 이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대결과 충돌, 우애와 연대를 만들어 내는 큰 흐름을 비로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제도는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육화된 결과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 세우는 동력이다. 민주주의에 씌워진 제도적 형식의 틀을 철거하면 불법과 혼란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틀 안에서 질식하던 생성과 창조의 에너지가 표출된다. 민주주의는 척도에 의해 구분되는 경계선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이런 구분 이전에 존재하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나쁜 척도뿐만 아니라 모든 척도에 반대한다. 민주주의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대립항 사이(中)를 가로지르는 길(道)위에서 매번 자신을 재발견한다. 민주주의는 성취불가능 하다. 그것은 하나의 지점이라기보다 과정이기 때문에 일회적인 획득으로 표현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영원히 돌아와서 매번 자신을 실패한 민주주의로 만듦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본질에 속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며 매 번의 계기 속에서 서로 다른 육신으로 탄생하는 흐름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그래서 매 번의 계기를 증폭하여 그 육신의 외연을 넓히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와 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생성의 과정이기에 만 갈래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동일성과 수렴을 거부하는 이질성의 용광로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말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실천 속에서일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우리 앞에서 관철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실태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봉인을 해제하고, 그것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더 나아가 영원히 전복을 반복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니체편집위원회, 니체전집, 책세상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Held, D., 박찬표 역 [민주주의의 모델들], 후마니타스 2010

장동진, [심의민주주의], 박영사 2012

이진경, [코뮨주의], 그린비, 2010

이진경∙고병권 등, [코뮨주의 선언], 그린비 2007


[1] 플라톤과 슘페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의 논지는 David Held 박찬표역, 「민주주의의 모델들」, 후마니타스 2010, 54-60쪽, 274-304쪽 참조

[2] Friedrich Nietzsche 니체전집편집위원회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420쪽

[3] Friedrich Nietzsche 니체전집편집위원회 역,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92쪽

[4] 존 롤스(John Rawls)로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자유주의적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개념들에 의존해 있다. 롤스의 공적 이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은 장동진, 「심의민주주의」, 박영사, 2012, 23-67쪽 참고

[5] Friedrich Nietzsche 니체전집편집위원회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422쪽

[6]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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