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철교 2-1기 에세이] 호형 호제를 넘어서

- 조소희

부를 수 없는 이름

가령 제가 이진경 선생님을 향하여 “진경아!”라고 불렀을 때 돌아올 파장을 생각해봅시다. 아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황당함에 웃거나, 선생님께서 오늘따라 마음에 여유가 없으시다면 웃어넘기지 못하고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라는 반응이 올 수도 있겠지요. 반말이라서 기분이 나쁜 걸까요? 그럼 “진경씨”나 “진경님”이라고 부르는 건 어떤가요? 아까보다야 낫지만 불편한건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부르는 올바른 문법은 “(이진경)선생님” 혹은 “(진경)쌤”정도로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관계/지위를 생략하고 이름만으로 저보다 연상인 사람을 부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름을 생략하고 관계/지위만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은 가능하며 오히려 일상어법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외국어랑 비교하는 게 조심스럽긴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접한 바로는 외국에서 관계/지위만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경우는 가족끼리거나, 군대, 왕족, 회장 등 상하구분이 엄격한 곳에서도 한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동갑 및 연하에게만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며, 고작 한두 살 차이가 나는 또래집단에서도 깍듯이 언니, 오빠, 형, 누나, 선배를 챙겨 불러야합니다. 오히려 어색한 관계에서는 누구씨, 누구님처럼 나이를 초월한 호칭으로 부를 수 있지만, 친해진 다음에도 저런다면 ‘난 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이렇게 호칭을 고민함과 동시에 존대/반말까지 구분해야하니, 우리가 익숙해져서 의식 못 할 뿐이지 하나의 발화상황에 화자와 청자의 나이가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입니다.

잊혀져가는 이름

별 헤는 밤,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하지만 이네들의 이름은 아스라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제 친구 미정이는 몇 년 전부터 “동준엄마”로 불리고 있고, 배우 김희선은 출산 후 “이제는 연아맘으로 불러 달라”는 인터뷰를 했더군요. 대부분의 애기가 엄마라는 단어로 말을 떼니 평생을 들을 텐데, 그것도 부족해 사회적으로도 이름을 잃어버린 체 누구엄마로 불립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엄마”라는 기표가 떠올리게 하는 한없는 애정, 헌신적인 보살핌, 숭고한 희생 등의 기의를 상기시킬 겁니다. 누구엄마라는 호칭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양육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의 반영임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여성에게 누구엄마임을 상기시키며 기존의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언니, 오빠, 형, 누나, 선배, 선생님 등의 ‘연상(자를 부르는)기표’도 어느 정도 이런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엄마”라는 단어의 무게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형만 한 아우 없다”라는 속담과 “나잇값도 못한다.” 라는 욕이 있는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연상자의 미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지요. 관계를 규정지어야 한다면 친구사이임이 분명한데도 연상인 사람이 밥 먹고 조금씩이라도 계산을 더한다거나, 당연하게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1/n로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책임의 나머지를 자연스럽게 부담하는 상황을 저만 겪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다수의 연상자가 있거나, 3인칭으로 지칭될 때가 아니라면 저는 소희언니, 소희누나보다 연상기표인 언니, 누나로만 불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다른 연상자들을 대부분 이름을 생략하고 언니, 오빠,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저로서는 이런 호칭체계의 덕을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오랜만에 만난 연상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도 “어머, 언니!!” 하면서 친한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득 제가 상대방에 대해 가장 잊을 수 없는 부분이 이름도 목소리도 그 무엇도 아닌 그이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에 씁쓸해집니다. 연상기표가 나에게서 많은 이름들을 망각시키듯이 누군가에게 저의 이름도 아스라이 멀어져가고 있겠지요.

생략된 주체를 찾아서

이렇게 기표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그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기표들의 질서에 포섭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 주겠지요. 문제는 내가 부른 그의 이름인 “꽃”(기표)과 하나의 몸짓이었던 그 대상(기의)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합니다. 하나의 몸짓이란 설명조차 ‘하나’ ‘의’ ‘몸짓’이라는 개개 기표의 연속일 뿐이며 기의와 온전히 일치할 수 없습니다. 기표는 어떻게든 기의에로 접근해보지만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것이지요. 결코 기의가 나타내는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는 기표는 주체가 아닌 타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름으로 불릴 때 “나는 타자인 기표를 통해 존재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나는 소실”되고 맙니다. 라캉 식으로 말해보자면 담론 속에서 주체는 소외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국의 호칭문법은 가장 개인적인 이름조차 생략하고 관계/지위로 상대방을 부르라고 합니다. 소외된 주체를 생략까지 해버리라니 이건 주체를 두 번 죽이는 건 아닐까요?

“문제는 이러한 소외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체로 살아가 위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질서요, 그것으로 인해 사회 문화가 가능해 지는 기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체의 소외를 목격하고도 방치할 수밖에 없으며, 아니 방치를 넘어서 기표를 사용하는 매순간 소외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립니다. 주체의 소외를 한탄하는 이 글이 수많은 주체의 소외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역설은, 벗어날 수 없는 언어의 물질성을 다시금 각인시켜줍니다.

우리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그 언어의 망 속으로 들어갈 뿐이며, 거기 이미 존재하는 기호를 존재하는 규칙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생략된 주체를 찾아주겠다며 새로운 문법을 시도해보아도 문법적으로 틀린 것일 뿐이며, 언어의 망의 터럭조차 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해두자면 저는 지금 목소리 높여 열린 공간 “수유너머N”에서 만이라도 서로 말 놓고 이름을 부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발표가 끝나고 저에게 들어올 야자신청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거절해두겠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낯을 오래 가립니다. 그렇다고 동갑내기가 아니면 친구가 되기도 어려운 이 더러운 세상을 한탄만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망은 분명 크고 견고하지만 그 경계에는 사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자유를 느끼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익명성에 숨기 때문이고, 그 익명성이 우리의 나이마저 가려준다는 영향도 클 것입니다. 온라인에서 우리는 나이를 묻지 않아도 대화를 시작하고 친해질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런 관계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면 대부분 기존의 질서에 흡수되지만, 외부에서 큰소리로 부르기엔 다소 민망하더라도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관계로 남기도 합니다. 그러한 관계가 주는 특별함을 수유너머에서도 많이 경험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임에서 사회질서와 상반되는 규칙을 “우리는 서로 이름 부르기로 정했으니까 너도 그렇게 해” 강제하는 것은 또 다른 망에 서로를 가두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맥락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시도해보는 건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포인트는 풍부한 파롤의 변주를 통해,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결코 너와 맞먹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표현해내는 것 입니다.

저는 몇몇 사건을 통해 호칭과 존대가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목격하고, 수많은 문법이탈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대게는 저 혼자 싸가지 없는 년이 되거나, 마음을 잘 안 여는 선배가 되어 장렬한 실패로 끝났지만, 인간관계가 극적으로 바뀌는 경험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역시 인간관계에는 마음이 우선이라는 통속적인 진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로서 만나고 싶다는 진심을 담아 다가설 때 뚫리지 않을 것 같던 언어망의 경계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어를 사용하는 동안 저는 호칭과 존대가 미치는 강력한 자기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소소한 시도를 해나갈 것입니다. 차마 이름 불리기를 거부하는 상대방에게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얻어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 장난처럼 반말을 섞어 쓰는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진심을 담아 너의 이름을 생략하지 않고 부를 때, 어쩔 수 없이 너의 주체성을 소외시키더라도 너는 내게로 와 친구라는 의미는 되어 주리라 기대해봅니다. 우선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려합니다.

<참고문헌>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철학의 외부, 이진경

일반언어학 강의, 소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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