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철교 2-1기 에세이] 니체를 통과하는 혁명

- 지안

0. 혁명이 필요하다

우리의 일생을 과연 누구에게 바치는가, 라는 노랫말을 가진 가요가 있다. 1996년 나온 이 노래는 “‘정복’ 당해버린 지구에서 쓰러져 가버리는 우리의 마음”을 말한다. 가사는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그에게 팔과 다리와 심장을 잡힌 채” 있고 우리가 많은 걸 ‘잃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넋이 나간” 영혼들은 자본의 노예로 살아간다. 우리의 심장을 잡고 있는 ‘그’는 누구이며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특히, 이 노래가 나온 지 17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일까?

푸코는 권력에 대해 “권력은 도처에 있는데(…) 권력이 도처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권력은 상부구조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위치하고 있고 거기에서 생산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팔과 다리와 심장을 잡고 있는 ‘그’, 권력을 행사하는 특정 주체란 없는 것이고 각자가 넋이 나간 채 자기 자신을 옭아매고 있다. 스스로에게 가한 “돈과 권력의 노예”라는 올가미는 삶 자체를 노예적인 것으로 이끌고 있다.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쉽게 말해 이렇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삶, “복종”하는 삶, 노예적인 가치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삶의 모습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에 휩쓸리거나 복종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정립하는 자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혁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니체가 필요하다.

1. 두 가지 혁명

그렇지만 니체는 혁명에 대해 “구역질”하며 혁명이 주장하는 평등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니체의 시선에서 혁명이 가지고 있는 정의란 오히려 불평등한 것이다. 결코 “동등하지 않은 자”들을 평균치로 만드는 혁명의 진리란 고귀한 자들을 노예들 곁으로 끌어내려버린다는 점에서 원한 감정에 가깝다. 만인이 평등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혁명의 가치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기독교이다. 니체는 기독교의 정치적 변형을 혁명이라고 본 것이다. 유태인의 노예 반란이 ‘고귀한 덕’들을,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가난한 자에 대해 동정하는 기독교의 가치로 전복시키고 서구를 2000년간 노예화시켰다면, 이제 혁명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즉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를 그대로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은 가치를 창조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니체가 ‘혁명’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기독교적 가치를 지니는 혁명을 비판했던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만약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더라도 이 혁명은 “함께 살자”는 슬로건을 가진 혁명은 아니다. 니체는 왜소화되어 노예의 의지를 갈망하는 근대인과 19세기 사회를 비판한다. 근대 이후 온갖 노예화된 의지만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강한 자들을 약한 자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라고 니체가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해결책으로써 곧 당도할 것은 “미래의 철학자들”이다. 니체가 제시하는 초인의 이미지인 알키비아데스 또는 나폴레옹처럼 이들 “미래의 철학자들”이 주류적인 노예의 가치를 전복시킬 것이다.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세 저작에서 니체가 구체적인 사회의 상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확실히 우리는 그가 나폴레옹, 알키비아데스라는 초인의 유형을 내세운 것을 바탕으로 니체의 사회를 짐작할 수 있다. 그건 귀족들이 선두에서 이끌고 가는 사회이자 노예에 대한 착취와 그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사회다. 그가 소위 ‘작은 정치’를 비판한 맥락은 민주주의 또는 대의제라는 정치형태가 ‘거리의 파토스’를 모두의 ‘평등성’으로 바꾸어버린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작은 정치로 인해,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점차 더 높은 곳으로 가야할 인간 종 전체가 균등하게 마모되어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결론적으로 니체가 비판한 혁명,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답습한 혁명이 있고 니체가 말하는 ‘귀족 정치’로의 ‘혁명’이 있다.

잠시 니체의 귀족정치를 살펴보면, 이 사회에서 인간 전체 종의 향상이라는 목표 아래 ‘노예’에 대한 착취와 희생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여기서 니체는 고대로 회귀하려고 한다. 그가 여성에 대해 위치 지우고, 비판하는 맥락 역시 초인인(이어야 할) ‘아테네 남자 시민들’의 가치 창출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회귀에 정당성이 있는지, 초인이 혈통에 근거한 것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가능한 문제일까? 아테네 사회에서 주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의에서 노예와 여성이 제외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면 현재 인간의 범위는 ‘만인’을 향해 확장되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일정 봉급과 특정 기준 없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난한다. 이미 혈통을 기준으로 초인과 초인 될 수 없는 자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니체가 시도하려는 가치 전복이 현실적인 것이 되려면, 노예에 대한 주인들의 전복이 가능하려면 “미래의 철학자들”을 기다리는 대신에, 하나의 지배자를 낳기 위해서 세상이 존재하는 대신에 가능한 모두가 초인이 되어야 한다. 권력이 누군가 한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발생”하는 권력이라면, 노예의 힘과 주인의 힘의 부딪힘에서 우리가 가치를 전복시키려면 가능한 많은 초인이 있어야 한다.

2. 누가 혁명을 할 수 있는 가

반동적인 힘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려는 이 혁명. 지배적인 흐름이 된 노예들의 가치를 전복시키려는 이 힘. 앞서 말한 “그들”이 니체가 말하는 “노예”와 동일하다면, 노예반란을 전복시킬 “미래의 철학자들”과 같은 힘이 우리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즉 어떤 대안적인 주체가 필요하다. 물론 자본주의 바깥의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생존문제, 삶의 양식이 자본주의 안에 속해 있기에 아마도 우리는 자본주의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자본주의에 대항할 대안주체가 가져야 할 태도만은 니체에서 끌어오고 싶다.

우선 니체가 말하는 “미래의 철학자들”은 초인이고 주인도덕을 가진 고귀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정해 뛰어넘는 자들이고, 한계에 반복해서 도전하는 ‘자기 극복’하는 인간들이다. 즉 반복해서 도전하는 자들이고, 부정을 긍정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 지배’하는 인간, 나아가서 ‘약속할 수 있는 자들’이다. 스스로 가치 정립할 수 있듯이 타인에 의한 강제가 이들에게는 필요치 않다. 이들은 자신이 세운 가치를 지키고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실천하고 뛰어넘으려고 반복해 도전하는 초인의 태도는 아마도 혁명을 하고자 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것 같다. 즉 노예적 가치가 지배적인 세상에서 초인이 주인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듯이, 우리는 살면서 노예 가치의 일부분을 재생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 이진경은 혁명가가 시인이 되기를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혁명가란 절망에서도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니체가 예술가가 되어야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혁명이 가치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혁명에 대해 비판하고 그것의 가치를 망치로 부순 자리에서 우리는 부수어진 가치를 재조립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켜야 한다. 즉 우리에게 혁명이 무엇인가? 혁명이 단순한 가치의 반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노예적 도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새로운 혁명의 새로운 진리로 삼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지금 가치를 정립하고 있나? 혹시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의 문제를 물어야 한다. “공급형 삶의 구조에서 벗어나서 내 삶을 새롭게 디자인 하고 삶을 둘러싼 수많은 생활생산과 생활창작을 직접 실행하는 과정이야말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출발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창작을 했는지의 여부라기보다 “삶의 질감”을 누구도 아닌 내가 느끼고 있는지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즉 끊임없이 자기가 세운 가치를 다듬고, 지키고, 다시 세우고,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3. 내 혁명

혁명을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치와 가치의 부딪힘으로 정의했을 때 노예적인 가치가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 정도의 커다란 힘이고 우리가 그것에 대항하는 혁명을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가 창조한 가치 역시 그만큼 커야 한다. 그것이 개인적인 단위로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기 지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혹은 자기가 세운 가치를 따라서 살고 싶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지배적인 가치에 쉽게 휩쓸려 버린다. 그 까닭도 “그들”이 가진 힘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거대하고 심지어는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겨운 답이지만 공동체가 답인 것 같다. 가령 국정원 게이트에 대항해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싸우겠다고 모여들었을 때,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장은 힘-국정원에 대항하는 다른 힘-공동체였다. 혼자서 국정원에 맞설 수 있었을까? 공동체가 있었기에 구체적인 정보가 늘어났고, 그들과 대결 가능할 정도의 힘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가치정립을 하며 살기 위해 나는 초인이 되어야 하고, 그 가치를 가지고 노예의 가치를 전복시키기 위해 초인들의 연합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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