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별이 사라진 시대에서의 희망

- 성현

–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

별이 존재하던 시대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별이 존재하던 시대,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암울해도 밤하늘의 저 별은 항상 우리를 비춰주던 시대, 마치 북극성처럼 우리가 따라가야 할 방향은 그 어느 상황이더라도 확고하게 보였던 시대, 주인공인 보안관 에드 톰 벨이 젊은 시절에 살았던 시대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벨의 독백은 이를 방증한다. 벨에게 보안관이라는 직업은 따라야 할 숙명이었다. 조부와 부친도 모두 다 보안관이었고, 벨은 무엇보다 그들의 보안관으로서의 삶을 존경했다. 벨은 과거를 존중했다. 왕년 보안관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들었다는 벨의 독백에서처럼,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경험들은 그가 미래를 살아가는 데 참조점이 되어주는 근거들이었고, 특히나 조부와 부친의 보안관으로서의 경험은 자신의 삶의 자부심이었다. 벨은 과거를 반추함으로써 미래의 길을 밝혔다. 벨에게 왕년의 이야기들은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비춰주는 별빛이었다. 벨은 그런 시대를 살았었다.

영화 처음의 독백에서 벨은 자신이 한 살인범을 사형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근데 벨이 설명한 그 살인범의 범죄 동기가 사뭇 신기하다.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동기나 그 어떤 의미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그냥’ 살인을 저질렀다는 살인자. 근거없음을 근거로 한 살인자의 행위를 벨은 굉장히 낯설게 느낀다. 물론 벨은 그러한 낯섦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알 것이다. 근거없음을 근거로 하는, 그 어떤 초험적 의미에도 의존하지 않는, 그 어떤 응고된 필연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벨의 노년에 도래했음을. 벨은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그를 휘말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새롭게 도래한 시대의 표상이 바로 살인마 안톤 슈거와 카우보이 를르윈 모스이다. 이제 우리 모두를 이끄는 그 어떤 시대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에드 톰 벨의 청년시절처럼,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미래는 어느 정도는 가시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더 나아가 보안관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표상되었듯이 세상을 조금씩 발전시키고(혹은 구원해내고) 있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믿음은 이제 철저하게 무력해졌다. 청년시절의 에드 톰 벨은 보안관이라는 직업을 통해 당대의 불의한 세상과 투쟁하였다. 그에게 대의는 바로 자신이 행하는 범죄에 대한 척결이 세계와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세계 속에서 투쟁의 주체였다. 하지만 슈거와 모스로 대표되는 시대는 투쟁해야 할 뚜렷한 대상도, 발전이라는 역사적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생존만이 중요시 되고, 세계를 위한다거나 역사를 위한다는 목적이 아닌, 자신의 삶의 지속에 방해되는 이들과의 전투만을 중요시 여긴다.

니체의 말마따나 인간은 무(無)라도 의지한다. 인간은 무언가에 의지해야지만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지속시킬 수 있다. ‘시대’나 ‘역사’, ‘세계’와 같은 별이 사라진 시대에서도 인간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의지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타자와 싸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거대서사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은 바로 ‘나’와 ‘주사위로서의 동전’ 그리고 ‘돈’이다.

역사의 종언과 스노비즘의 도래

슈거나 모스나 둘 다 스노비즘적 인간형이다. 이러한 인간형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코제브의 언어를 빌려야 한다. 코제브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로 30년대에 헤겔 철학에 대한 독특한 강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나중에『헤겔 독해 입문』으로 출판되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겔이 아니라 그 역사철학에 코제브가 가한 해석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가 강의하고 20년 후에『헤겔 독해 입문』의 2판에 덧붙인 각주이다. 코제브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중 하나가 스노비즘인데, 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물론 스놉들은 이러한 형식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기에 그 형식을 ‘형식적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놉은 ‘환경’과 조화하지 않는다. 비록 거기에 부정(否定)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否定)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고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보기에 이러한 의례적인 활동은 절대 ‘역사’나 ‘환경’을 움직일 수 없고 혁명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

슈거는 ‘자신’과 ‘주사위로서의 동전’에만 철저하게 의지한 채로 행동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게만 의지한 채로 움직이기에 절대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판단하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일들을 슈거는 대개 살해함으로써 빼앗아오고,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진 못하는 시기에는 돈으로 관계를 매개함으로써, 감정적 교류를 차단한다. 슈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 그 자체에만 집중하여 삶을 지속해 나간다. 자신에게 어떤 임무가 주어졌다면 그 임무를 어떻게든 달성하고,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었다면 어떻게든 그 말을 실천하며, 이렇게 주어진 사실들을 실천하는 데에 방해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가차 없이 살해한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에게 임무를 주어진 사람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러한 사실판단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판단 너머의 가치판단의 영역이 슈거의 면전에 나타나게 되면, 슈거는 바로 동전으로 그 판단을 대신한다. 모스의 아내와의 대화에서 말하듯이 그가 동전이며 동전이 바로 그이다. 언뜻 보면 동전은 엄청난 우연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상징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동전을 던져봤자 나오는 결론은 결국 두 가지의 사실에 불과하다.

모스라고 뭐 다를 것이 있을까. 슈거는 주사위로서의 동전에 자신의 삶을 의지했지만, 모스는 그게 돈으로 바뀐 것이 뿐이다. 슈거의 말마따나 모스는 돈 때문에 자신의 가족조차도 위험에 빠트린다. 물론 슈거에 비해서 모스는 ‘나’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가족의 안녕 때문에 고민하는 흔적도 영화 곳곳에서 보이고, 더 나아가 물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범죄 현장에 다시 돌아가서 목숨의 위협 또한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스놉이라는 것을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결국 슈거나 모스나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놉이 진정으로 위험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형식을 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반성을 하치않은 채, 그들은 진정으로 자기확신을 갖고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지키고 실천한다. 그 확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환경’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주침과 횃불

이러한 전도된 ‘목숨을 건 도약’, ‘생사를 건 투쟁’이 벨은 너무나 당황스럽다. 그는 현장조차 제대로 들어가 보지 않는다. 아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후배 보안관이 현장에 대해서 계속 설명을 해주고, 그가 제시한 증거를 바탕으로 나름의 합리적인 분석 또한 도출해내지만, 그는 그러한 합리성보다는 낯섦을 훨씬 더 많이 느낀다. 탄환이 없는 총의 존재나, 무차별적인 슈거의 살해행각 앞에서 그의 관록은 너무나 허약하다. 결국 그는 모스를 지키지도 못하고, 용기 있게 현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슈거를 다시금 놓치고 만다.

그럼 이런 무력한 노인으로서의 보안관 또한 이런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에 무력하다면, 이러한 스놉들의 부정(不正)적 행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의 의미와 경험들이 이들 앞에서 무력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부정(否定)해야 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이는 파국을 통해 우리는 부정(否定)의 방법을 징후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마주침이다. 신기하게도 슈거나 모스나 각자의 몰락은 서로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우발성, 즉 마주침(contingency)에 의해서 일어난다. 서로의 지속을 방해한 것은 서로도 아니고, 벨도 아닌 완전하게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이었다. 모스가 여자한테 유혹을 받다가 죽음을 당한 것도, 슈거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그들 각자의 통제권역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들의 실존은 그 마주침 앞에서 철저하게 무력했다. 그들은 자신이 설정해놓은 형식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고자 했지만, 결국 우발성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우발성 앞에서 주체는 속수무책이다. 모스나 슈거나 자신들의 스놉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이 우발성 앞에서 주체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주체의 몰락은 양날의 검이다. 기존의 무능력한 주체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주체로 도약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주체적으로 할 수 없기에 우리를 무력감에 젖게 만드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주체의 몰락이 전자의 경우로 서술되지는 않았다. 영화는 철저하게 후자의 경우에 천착하여 주체의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만약 이 영화가 그저 무력함만을 어필하는 영화로 끝났다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무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영화 마지막에 벨의 꿈을 통해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마지막에 벨이 묘사한 꿈 중 두 번째 꿈에서 벨의 아버지는 벨보다 더 빨리 말을 타고 달렸다고 한다. 굉장히 추운 날씨에 땅까지 꽁꽁 얼었고, 게다가 매우 좁은 오솔길이어서 달리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벨의 아버지는 횃불을 뿔 안에 넣어둔 채 벨보다 앞서서 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뿔 안에서의 횃불이 마치 달빛 같았다고 한다.

횃불은 벨을 비춰주었다. 횃불을 통해 벨은 달릴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별은 없다. 하늘에서 정해진 위치에 고정되어 항상 우리를 밝혀주는 북극성은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별은 우리에게 목적이었다. 별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별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별이 거기서 목적의 존재를 환하게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별은 우리에게 진리였다. 허나 이제 우리에게 진리는 없다. 하지만 횃불은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비춰주는 횃불은 우리에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 횃불은 결국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존재의 소멸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저 별에 비해 너무나 불완전하다. 별은 파괴하려고 해도 파괴할 수 없었지만, 횃불은 다르다. 횃불은 꺼질 수도 있고, 빼앗길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이가 의도적으로 이상한 길을 비추어, 우리의 삶을 더욱 막다른 길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 이 횃불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투쟁의 영역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별이 비춰주는 길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횃불을 올바른 자에게 인도하는 것일 테다. 올바른 자가 누구냐고? 그건 올바른 자라고 자청하는 자가 증명해야 하는 일일테다.

또 횃불은 바람과의 마주침을 통해 갑자기 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반면에 바람을 통해 불이 더 커질 수도 있다. 또 비록 꺼지더라도 바람에 의해 불씨가 날아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불을 키울 수도 있다. 별이라는 목적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횃불을 통해 그리고 횃불이 마주할 수많은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더 많은 길을 비출 수도, 더 큰 불빛을 얻을 수도, 반대로 횃불이 악용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하나의 목적은 사라졌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의 폭은 더욱 넓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건 이미 결정된 사실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응고될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니까.

과거와 경험은 우리에게 무의미하지 않다. 결국 벨을 비춰준 건 벨의 아버지였다. 우리는 과거라는 횃불을 통해 현재를 비출 수 있다. 이 횃불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비출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세계를 가시화함으로써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 속의 나’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제목은 분명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지만, 적어도 영화의 마지막은 노인에 의한 희망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노인을 통해서 과거를 들춰내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다. 비록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해도 말이다. 여전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1.) 루카치(2007), 김경식 역,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p.26
2.) 고로 근거없음 그 자체, 혹은 순수한 근거없음은 존재할 수 없다. 세계 안의 우리는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3.) 국내에서는 『헤겔 독해 입문』이 『역사와 현실변증법』으로 출판됨.
4.) 헤겔 철학은 19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거기에서는 ‘인간’은 우선 자시의식을 갖는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자기의식을 갖는 ‘타자’와의 투쟁에 통해, 절대지나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헤겔은 이 투쟁의 과정을 역사라고 불렀으며, 주체는 이 투쟁을 통해 세계의 모든 것을 포섭해 나간다.
5.) 알렉상드르 꼬제브(1981), 설헌영 역, 『역사와 현실변증법』,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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