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경험 체계의 꼭지점과 종교적인 본성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3. 경험 체계의 꼭지점과 종교적인 본성

오늘날 상대적이고 제거적이고 환원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지. 그러나 만약에 우주 만물의 진화나 인류 역사의 발달이나 생물 개체의 성숙에 방향과 목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게 무얼까. 아마 생물 개체가 성숙하는 방향이나 목적은 항상성 유지를 넘어서 스스로가 가진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더 만족하게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겠니. 인간의 역사의 발달의 방향이나 목적도 소속 공동체의 안녕을 넘어서 인간의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보다 나은 삶을 살려는 것, 행복해지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우주 만물의 진화의 방향이나 목적이 있다면 모든 단위존재(홀론)들이 그들의 경험 가능성을 확대하여 차상위 단위존재로 진화됨으로써 더 많은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더욱 큰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화나 발달이나 성숙의 방향과 목적은 한결같이 그 단위존재가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확대하고 실현하여 ‘더 잘 사는 것’ 즉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해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지. 햇빛으로 모든 생명을 길러내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신도 모든 단위존재들에게 진선미성을 계시하고 그들의 경험을 확대시켜서 진화나 발달이나 성숙을 주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진화나 발달이나 성숙은 경험의 확대 과정지.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진선미성의 관계 도식에 따라 생성되고 또 작동되거나 생동하는 거잖아. 여기서 생성이니 작동이니 생동은 모두 진선미에 대한 경험 활동이야. 그렇다면 만물의 생성과 성숙과 발달과 진화의 추진력은 진선미성을 반사하여 경험을 확대시키는 신의 능력이 아닐까.

진선미성은 이 우주가 진화되기 이전의 근원이었던 빅뱅 속에 들어있던 게 아니었어. 물론 빅뱅시의 에너지는 그 자체로 창조력이지만 그러나 거기에 진선미에 대한 정보가 빅뱅의 밖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우주가 어떤 상태일까. 아마도 우주는 언제까지든지 진화나 발달, 성숙을 따질 수 없는 끝없는 엔트로피 상태일 거야. 그래서 하버지는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혼돈의 에너지에 진선미성의 근원, 우주에 존재하는 정보의 근원을 신이라고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어.

아마도 신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계기에게 그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하나의 실재가 되도록 계기에 알맞는 가능성을 진선미성으로 계시했을 거야. 그렇다면 그 진선미성을 경험하여 진화하고 발달하고 성숙하려는, 그래서 좀 더 잘 살려는 피조물들의 삶의 의지는 어디서 온 걸까.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하면 그 다음은 거기서 파생된 더 나은 선택지들을 받게 되지. 그리고 거기서 다시 최선을 선택하면 거기서 파생된 더 나은 선택지를 받게 되고. 최악의 경우라도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언제나 신의 부름이지. 우리는 현실에서 차선을 선택하지만 그래도 한 걸음씩 신의 이상에 다가갈 수 있어.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지, 진화와 발달과 성숙의 의지는 신이 제시한 이상을 그렇게 실현하라는 신의 격려가 아닐까. 이 격려 중에 최고 수준의 격려는 인간도 신을 닮아 거룩하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적인 초월 본성 아닐까.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건너뛰어 신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자기 초월 의지를 누가 주었겠니. 그렇게 이끄는 이가 그것도 주지 않았겠니.

근대 후기의 과학적인 세계관인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제외한다면 아직도 세계인구의 약 80%가 종교를 가지고 있어. 하버지가 보기에 이 광범위한 현상이 결코 인간에게 우연한 일이 아니야. 명백한 현재 상황이 아닌데도 인간은 불안과 고독과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어. 이는 인간이 과거나 미래의 고통스럽거나 불안한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자의식을 가졌기 때문이야.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죽음의 공포와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삶의 의지를 가지려고 궁극적인 대상을 의지하게 되지.

궁극적인 대상을 의지하게 된 것은 거꾸로 인간이 종교적인 본성을 가지고 죽음의 공포와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여 신을 닮도록 신이 인간의 진화를 이끌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초자아로 모신 신을 닮아서 거룩해지라는 신의 격려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삶의 의지와 종교적 초월 본성은 신이 계시하는 진선미, 곧 새로운 가능성, 곧 신의 이상을 직관적으로 깨달아서 신과 소통으로 인간의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신의 부름이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종교를 무지의 소치로 여기는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계관조차도 종교적인 본성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야.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현대인은 아무 것도 의지하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궁극적인 근원인 에너지 즉 힘을 믿고 있어. 죽음의 공포는 어쩔 수 없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현실을 자기 입맛대로 움직여서 죽음을 미뤄두고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힘을 믿지. 무엇이 됐던 현실을 움직일 수 있는 힘, 그걸 믿어. 그들에게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금력(金力)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어.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성적 매력일 수 도 있고.

물론 서양의 중세 기독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기독교나 여타 많은 종교의 타락으로 종교적인 초월 본성에서 벗어난 경우가 아주 많아. 신의 뜻을 해석하는 사제들이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신의 이름을 악용하지. 그들이 인간을 지배하려고 인간에게 종교라는 너울을 씌워 종교적인 무지 즉 눈 먼 믿음 속에 밀어 넣고 신의 부름을 배신하게 만드는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어. 그러나 이는 종교적인 초월 의지를 꺾어버리고 엉뚱한 욕심 즉 금력이나 권력등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어떤 인간의 잘못이지 신의 실수는 아닐 거야.

신은 어떤 피조물에게도 무엇 하나 강제할 수가 없어. 오직 진선미로 설득할 뿐이지. 오히려 선택권은 원래부터 피조물에게 있어. 인간은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신의 뜻을 더 많이 어길 수도 있지.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나는 대로 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러나 생각조차, 의식조차 없다면 선택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러니까 주어진 상황을 자신에게 알맞게 바꿀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진선미에 대한 경험능력이 자유의 원천이야.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도 진선미에 대한 경험 능력 때문이야.

고등동물만이 의식을 의식할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단세포 시절의 경험까지 저장된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어. 인간도 수정한 단세포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과정을 반복하면서 태어나잖아. 자궁안에서 자라면서 태어날 때까지 겪는 그 모든 생리작용은 진화적인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반사하는 활동이야. 원자나 양자도 의식을 가졌다니까 모든 실재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의식이라는 정보에 따라 유통되도록 생성된 거야. 우주의 법칙 또는 질서도 신의 의식이고. 그리고 자유는 의식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지고, 거꾸로 자유로운 만큼 의식할 수 있어. 신조차도 피조물의 의식의 자유를 빼앗아 파괴시킬 수는 없어. 그런다면 자기모순이니까. 그 중에 종교적인 초월본성을 발휘하여 신의 진선미를 경험하면서 인간이 신을 닮아가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의식의 자유지.

그렇다면 홍아야, 그 종교적인 본성이 우리의 경험체계, 반사체계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겠니. 앞에서 하버지는 인간의 경험들이 체계에 따라 저장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 체계가 정합성이 있다면 어떠한 체계든지 맨 위에 꼭지점이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의 꼭지점에 신이 있듯이 말이야. 하버지도 예나 지금이나 모든 존재 이전에 신이라는 가장 궁극적인 꼭지점을 가정해야만 우주 만물이 보이고 체계적인 세계관이 가능해진단다. 그리고 또 그 세계관을 가져야 하버지의 인식과 가치와 의미의 체계를 세울 수가 있었단다. 그리고 또 하나, 예나 지금이나 ‘생명’이라는 중간의 꼭지점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단다. 생명체와 아닌 것을 대조하면서 생명체가 얼마나 신비하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평생 동안 음미하며 살았단다. 아마도 하버지의 종교적인 본성은 하버지의 세계관으로 발휘되었을 거야.

그러나 앞에서 사람마다 궁극적인 실재이며 궁극적인 관심사인 꼭지점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극명한 예로써 군자의 의리와 소인의 돈이나 이익이라는 꼭지점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 살펴봤어. 인간이 궁극적인 원인이면서도 실재라고 믿어지는 그 꼭지점에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됨을 살펴보았어. 그래서 그 꼭지점의 가치와 의미를 절대화하면서, 스스로를 종교적인 삶으로 이끄는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았었어. 그러나 만약에 군자가 의리에 대한 또는 소인이 돈이나 이익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꺼져버린다면 그의 신념체계를 떠바치던 근원적인 힘도 사라져서 그의 신념체계 즉 정체성은 극심하게 흔들릴 거야. 그러니 누구에게나 종교적인 본성에 따른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하니.

宗敎에서 ‘宗’은 ‘最高, 最上, 最大, 最初’ 등에 나타나는 ‘最’와 같이 ‘가장’이란 뜻이야. 그래서 종교라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첫째는 가르침의 질적인 수준으로 볼 때 종교는 세계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최상의,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뜻이야. 둘째로는 종교는 가르침의 형이상학적 범주로 볼 때 궁극적 대상의 가르침이면서 궁극적 대상에 대한 가르침이란 뜻이고. 셋째로는 종교가 가르침의 범위로 볼 때 여러 미시 담론을 거느린 가장 넓은 수준의 거대한 가르침이란 뜻도 있어.

그런데 홍아야, 지금 하버지가 세계관 얘길 하자고 해놓고 왜 종교관 얘기를 계속하니. 아, 그건 종교적 본성이 실현된 것이 세계관이기 때문이랬어. 근대 이전에는 어떤 공동체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곧 종교였어. 세계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려면 먼저 궁극적인 대상을 찾아 거기서부터 존재론과 우주론이라는 세계관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세계관이라는 신념체계에 확신이 생길수록 그 세계관의 궁극적인 대상과 조화된 일관된 삶을 추구했지. 그래서 궁극적인 실재의 바람대로 개인의 삶의 규칙이나 사회의 질서를 규정했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 즉 신념체계를 절대화하여 남들에게도 자신의 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 했어. 때로는 힘을 앞세워 강제하기도 하고. 그리고 대개 근대 이전의 세계관은 윤리관이나 가치관이나 사회관이나 정치관이나 역사관이나 인생관 등 모든 다른 관점들이 분화되지 않고 한데 녹아있는 거대한 담론 체계라서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어.

곤충이 일단 거미줄에 걸려들면 빠져나오기 힘들지. 마찬가지로 이 거대한 종교 담론 체계에 한번 접속된 개인은 그 신념체계에 승복하여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돼. 거기에 하버지도 예외가 아니야. 하버지는 궁극적인 원인이자 실재라고 믿는 신에 승복하여 그의 바람과 기쁨을 나의 것으로 믿고, 거꾸로 나의 바람과 기쁨을 그의 것이라 믿고 살게 되었어. 하버지의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엉터리 신념체계에 걸려든 꼴일 거야. 그러나 하버지는 진선미의 근원이신 그 분 뜻대로 사는 것이 곧 나를 위해서 가장 잘 사는 것이라 믿게 되었단다.

마찬가지로 돈이나 이익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이고 원인이자 실재이기 때문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댔어. 그들은 돈벌이에 충실한 것이 당연히 그의 정체성에 충실한 종교적인 삶이야. 그들이 만약에 한 번이라도 돈보다도 진선미를 더 사랑했다면 그는 돈이라는 신 즉, 그 자신의 초자아를 배신하는 거지.

이제까지 진선미의 근원인 신을 믿든 물질적인 힘의 근원인 돈을 믿든 아니면 다른 무엇을 믿든지 인간은 신념체계의 꼭지점에 대한 종교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살펴보았어. 그렇다면 무얼 믿고 그 믿음의 대상의 바람과 기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논의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해. 그래서 이 글을 쓴단다. 우리의 신념체계 안에서 우리가 믿고 따를 꼭지점을 찾아내자는 거야. 그건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와 원인을 따지는 것이며. 신념체계를 다듬는 길이며, 성숙의 길이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따지는 길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며 전체적이며 영속적이며 고차적인 행복을 줄 것인지를 따지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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