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역사를 향해 쏜 총탄 -‘5-18’과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

- 고병권(수유너머R)

1. 정신적 외상

지난 5월 17일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건강 현황을 발표한 바 있다. 직접적인 상해자나 고문 피해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인데 무려 43%가 “5-18을 생각하면 분노, 슬픔, 죄의식 등 매우 강한 정서를 느낀다”고 답했다. 5월만 되면 불안하고 답답하며 우울해지는 소위 ‘5월 증후군’이다. 그런데 따져보니 내가 그렇다. 5월 18일이 다가오면 관련 기사를 열심히 찾아읽고, 그 대부분에 새로운 내용이 없음에도, 눈에는 열이 오르고 가슴은 뛰며 손은 차가워진다.
80년 5월, 나는 광주 시내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다. 우리 동네에 계엄군이 밀어닥친 것도 아니고 당시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였기에 상황을 잘 알고 있지도 못했다. 다만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형, 당시 전남대학에 다니던 사촌형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군인이 사람들을 죽인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어린 내가 이상하게 꿰맞춘 버전은 그 군인이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문제가 되는 ‘북한 특수부대’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계엄군을 이 나라 군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나 광주 시내 학교로 전학왔는데 그때 5월 하순의 모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5월초 어린이날로 한껏 달아오른 아이들의 분위기는 18일을 기점으로 급격히 가라앉았다. 초등학교 5-6학년, 뭘 알 만한 나이가 아닌데도, 나는 그때 친구들의 얼굴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내 얼굴도 그랬을까). 간혹 무용담처럼 끔찍한 목격담을 들려주는 친구가 있었지만 대체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기이한’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그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두환, 노태우는 물론이고, 정호용, 박준병 등의 이름을 잊어본 적이 없다. 누가 말해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등학생이던 우리는 이미 그 이름들을 외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의 적’이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다른 강도와 양상이기는 했지만 그런 표정들을 광주에서 여러 번 보았다. 5월 하순이 되면 어떤 의도하지 않은 침묵과 분노가 도시를 감쌌다. 광주와 관련해서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여전히 앓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 경험에 관한한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2. 법의 찢어짐

‘외상’이란 어떤 사건에서 기인한 강력한 자극으로 정신적 방어막이 찢어져 자아가 어떤 중재 역할도 수행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외상’이 초래하는 고통과 그 치유방안에 대한 고민을 뒤로 하고, ‘외상’이라는 사태 자체만을 사유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평소 알 수 없던 어떤 ‘진실’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 사실 ‘진실’이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데, 대개의 ‘진실’은 우리의 인식과 판단이 근거하는 상징적 질서의 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상은 그 상징적 질서 자체가 충격에 의해 깨지는 일이다.
만약 사회체 수준에서 우리가 ‘외상’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법의 찢어짐’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5-18’이 그렇다. ‘5-18’은 법이 찢어진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다. ‘5-18’이 80년대 이후 한국 민주주의를 정초짓는 사건이라면, 내 생각에 그 의의는 민주화 이후에 생겨난 각종 법이나 제도 및 기구에 있지 않고, 그 예외적 시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있다.
최근 ‘5-18’과 관련된 역사왜곡 논란과 관련해서, 유족들의 상처를 헤집어서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일베’의 가학적 쾌락을 많은 이들이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공식적 해석이 끝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근거없이 시비를 거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국가의 공식적 해석’이라는 말에 불편을 느낀다. ‘5-18’ 에 대한 역사왜곡 논란을 지켜보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일베는 그렇다 치고 나는 왜 국가의 공식적 해석이 끝난 사건에 대해 가슴이 뛰고 손이 차가워지는가? ‘5-18’은 이미 30년도 넘었는데 왜 편히 잠들지 않는가? 왜 그것은 아직도 불편한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인정과 보상까지 이루어지고 국가기념식까지 매년 열리는데도 그것은 왜 아직도 안온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나는 아직도 우리가 ‘5-18’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18’은 우리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기릴 때조차 우리를 초월한 사건이다. 조금 의도를 더해 말하자면, 내게 ‘5-18의 국가기념식’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공식적 해석 아래 덮는 의례처럼 보인다. 따지고 보면 1980년 이후 한국 민주화의 역사는 ‘5-18’에 미달한다. 한국 민주화 운동은 5-18에 다가간 운동이라기보다, 5-18의 파장 아래서 만들어진 운동이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 기구들은 ‘5-18’을 완성시켰다기보다는 ‘5-18’의 의미를 그것으로 한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5-18’ 덕분에 ‘6월 항쟁’이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의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래서 ‘5-18’의 의미가 현재의 체제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하나의 정체(헌정체)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체 중단(헌정 중단)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미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특정한 정체로서의 민주주의는, 역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또다른 변화와 변혁을 요구받는다. 나는 ‘5-18’에 후자의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5-18’을 한국 민주주의와 관련시킨다면, 그것은 특정한 정체(헌정)으로서의 민주주의라기보다, 정체의 중단으로서, ‘비정체’로서의 민주주의와 관련된다고 본다.

3. 총을 든 민주주의

물론 헌정의 중단 자체가 ‘5-18’에 의해 유발된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들을 남발하던 유신체제는 사실상 헌정이 중단되었거나 최소한 무력화된 체제였다. 유신은 긴급조치라는 예외상태가 상례가 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군부의 비상계엄의 선포는 유신의 중단이 아니라 그것의 극적인 완성에 가까웠다(박정희는 사라졌지만 ‘12-12’는 유신체제에 대한 친위 쿠데타의 성격을 가졌다). 발터 벤야민은 “예외상태가 상례가 된 상황에서 실질적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임무”라고 했다. 만약 그 ‘우리’가 ‘민주주의자’를 지칭한다면, ‘5-18’은 유신과 신군부라는 ‘상례가 된 예외상태’ 속에서 도래한 ‘실질적인 예외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실질적 예외상태’로서의 민주주의를 역사의 정상 상태, 소위 우리 시대의 법과 제도 속에 기입해 넣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총을 든 민주주의자를 투표용지를 든 민주주의자로 덮을 수 있을까(표가 탄환이라는 비유로 어물쩡 넘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그때 광주에는 범죄가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질서를 잘 지켰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총은 불가피한 자기방어였다고 말하는 걸로도 충분치 않다. 내게는 이 모든 말들이 어떻게든 우리 민주주의의 정상상태, 다시 말해 현재의 법과 제도 속에 ‘5-18’이라는 ‘실질적 예외상태’를 기입하기 위한 억지 노력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노력 속에서 시민군이 가진 ‘총’의 의미는 축소되어버렸다.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기방어라는 소극적 논리가 신군부의 학살에 대한 대중들의 원한과 복수, 더 나아가 총이 아니고는 역사에 좀처럼 새길 수 없었던 어떤 경고를 덮어버렸다.
나는 총을 든 시민군이 불법적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에서 자치 질서를 갖춘 공동체 역시 준법적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때 법은 일시적으로나마 이미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이 부재한 그 공간에서 우리는, 예외상태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두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민주주의의 ‘생얼’을 보았다. 당시 광주 시민들이 잘 알고 있었듯이 ‘총을 든 시민’과 ‘밥을 퍼 나르는 시민’, ‘거리를 청소하는 시민’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5-18’에 다가간다는 것이 ‘거리를 청소하는 시민’에만 다가간다는 뜻이어서는 곤란하다.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총을 들고 계엄군과 대치한 시민을 환대할 수 없는 한 ‘5-18’은 역사적 해석을 거부하며 계속해서 발작할 것이다.
1980년 5월 26일 밤, 총을 들고 전남 도청에 남기로 한 이들은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그들의 총은 무엇을 겨누었던 것일까. 총을 든 이상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말이다. 벤야민을 한 번 더 인용한다면, 그들은 1848년 7월의 혁명군들이 파리의 시계탑을 저격했듯이, 역사를 저격해서 거기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5월 26일 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외쳤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역사 자체에 흉터를 남겼기에 하나의 초역사적인 경고가 새겨질 수 있었다. 그래서 5월의 민주주의자들은 5월 27일 새벽, 진압군들에 의해 주검으로 질질 끌려나왔지만, 그들이 미래의 유신, 미래의 신군부를 겨냥해 쏘아둔 총탄 자국은, 모세의 돌판에 신이 새겨둔 초역사적 계명들처럼, 역사와 관계없이, 여, 전, 히, 남, 아, 있, 다.

응답 1개

  1. 시라소니말하길

    찢어짐과 찢어짐이 남긴 흉터로 새겨진 ‘도래할 민주주의’ 얘기이군요. 총을 든 시민군은 찢어짐이라는 超法적 공간을 창출한 것이고 거기서 벌어진 일들은 ‘근본 민주주의’의 생얼–근대국가의 폭력을 넘어선 ‘超폭력’의 현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군이 역사에 남긴 흉터는’근대 너머 어딘가를 가르키고 있지요.

    광주에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 아직도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한 찢어짐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그리고 먼저 간 이들이 남긴 흉터가 우리에게 오래오래 아픔으로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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