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니체, 사형을 묻다

- 안중영

시작하며

지난 달 19일, 두 명의 헌법재판관이 새로이 취임하며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퇴임 87일만에 5기 헌법재판소 구성이 완료됐다. 기존 법도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결정들을 내리는 곳이 헌재다. 그 구성원들의 면면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고, 언론은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들의 대부분은 주로 주요 현안에 대한 견해였는데, 그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사형제에 대한 견해였다. 재판관 9명중 8명이 사형제도 폐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위헌 결정에 필요한 정족수는 6명이다. 헌재는 1996년, 2010년 두 차례 사형제를 합헌으로 결정했는데 1996년에 7명이었던 합헌 의견이 2010년에는 5명으로 줄었다. 더구나 ‘헌재가 합헌 결정을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사형제의 개선 내지 폐지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게 당시 법조계의 분석이었다. 적어도 법조계의 판단은 폐지쪽으로 모아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한 남편의 호소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는 이른바 ‘중곡동 주부 살해 사건’ 으로 알려진 성폭행․살인 사건 피해자의 남편으로, ‘저 자가 살아있는 세상에 아이와 제가 살아야 한다는 고통이 너무 크다’ 며 범인에게 사형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눈물로 호소했다. 그 호소를 재판부가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민은 거기에 공감하는 듯 하다. 한 여론조사에서의 사형제도 찬성 비율은 79%였다. 인터넷 댓글은 말해 무엇하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유엔은 오랜 기간의 연구와 여러 나라(111개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형집행유예 결의를 채택했다. 우리나라 법조계의 판단도 사형 폐지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런데 국민 여론은 정 반대다. 왜 하루라도 빨리 죽이지 못하느냐고 아우성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도층 혹은 지식인들과 국민의 정서 내지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야 흔한 일이지만, 이것은 그 경우가 좀 심하다. 어느 한 쪽이 심각하게 틀린 것일까?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주했을 때 우리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회피다. 에이, 다음에 생각하지 뭐 하고 넘겨버리거나 별 생각 없이 ‘당연히 죽여버려야지’ 하면 편하고 좋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특히 이 문제는 그렇다. 사람이 모여 사는 한 흉악범죄는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에 앞서 지금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작년 대선에서 한 명은 사형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다른 한 명은 사형 집행을 약속했다. 결국 사형 집행을 약속한 이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도 실질적 사형 폐지국인 현재의 상태를 깨기는 어려운 듯 하다. 결국 두 번째 길, 사유의 길이다.

예방과 응보
형벌의 의미에 대해 말하면, ‘형벌’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하나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전체 종합을 제시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제 2 논문 중
형벌의 의미는 다양하다. 감방, 교도소, 형무소 등 죄인을 가두는 곳을 이르는 말이 얼마나 다양한지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래도 크게 보자면 현대사회에서 형벌의 의미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범죄의 예방과 죄인에 대한 응보. 사형이 이 두 가지 의미에 부합하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계속해서 형벌로 남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방 :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

먼저, 범죄의 예방 측면에서 살펴보자. 법학은 범죄의 예방에 대해 ‘일반예방주의’와 ‘특별예방주의’ 두 가지 관점을 취하고 있다. 형법은 일정한 행위를 한 자를 벌하는 것을 예고하거나 현재에 처벌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경고를 발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예방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일반예방의 사상이고, 이에 대하여 형법은 현재 죄를 범한 특정인에 대하여 그를 개선하는 작용을 영위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 특별예방주의이다. 형법은 그리고 형벌은 이 둘 모두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병태, 『법률용어사전』중 ‘일반예방과 특별예방’

흔히 사형은 일반예방효과가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형이 언도될 만한 범죄들을 생각해보자. 살인, 강도살인 등이 떠오른다. 이같은 범죄를 저지를 때의 정신상태는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 일반적인 상태와도 다를 뿐더러, 절도 등 다른 범죄를 저지를 때의 심리와도 다르다. 가해자는,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건 장기적인 것이건, 이같은 범죄를 저지를 당시 냉정한 판단이 불가능한 비정상적 상태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다른 사람 배에 칼을 꽂아넣기 직전에 ‘아, 이러면 나 잡혀서 죽을 수도 있지’ 하고 그 행위를 멈추겠는가. 이는 완전한 허구임이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L. Territo / J. Halsted / M. Bromley, Crime and Justice in America, 2004, P.431
H. Badau / C. Pierce, eds., Capital Punishment in the United States. 1976
조준현,『사형제도 존폐논쟁의 현황과 전망-이념논쟁과 국민정서』, 2006에서 재인용

또한 그렇게 금기시되는 살인이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잠재적 범죄자들의 범죄 개념이나 죄의식을 흔들 가능성도 있다. 니체는 일찍이 『도덕의 계보』에서 이를 지적했다.

‘범죄자가 바로 재판 절차나 형 집행 절차 자체를 목격함으로써 얼마나 자신의 행위나 행동 방식을 그 자체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 방해받게 되는지를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범죄자는 정확히 같은 종류의 행동이 정의를 위해 행해지고, 그리고 나서 선이라 불리고 선한 양심으로 행해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제 2 논문 14절 중

범죄자의 존재를 세상에서 아예 지워버리기에, 사형의 특별 예방 효과는 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종신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용문제-그런 자를 내 세금 써가며 살려둬야 하느냐?-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상존하는 오판 가능성과 그에 의한 사법 살인의 가능성까지 생각한다면, 이는 충분히 치를 만한 비용이라고 생각된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다.
이처럼 형벌의 범죄 예방 면에서 사형은 그 형벌으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없거나 기능할 수 있더라도 너무 큰 비용을 치러야 하기에, 그 의미가 없다는 것. 이것이 현재 사형제 폐지의 가장 주요한 논거 중 하나다. 어쨌건 오늘 형벌의 존재 의의는 응보 보단 예방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과거 형무소라 불리던 곳이 지금 교도소라 불리는 것을 생각해보자.
응보 : 그래도 죽이고 싶다

안다. 형법의 목적도 알고 인권의 소중함도 알고 다 아는데, 그래도 죽이고 싶다. 이것은 어떤 판단의 결과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한 중곡동 주부 살인 사건을 다룬 기사를 보자. ‘찢어죽여야 한다’ 이상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죽여야할 이유를 찾고 그것이 ‘응보’다. 사형제 존치론자와 폐지론자가 주로 부딪히는 지점이 이곳이며, 존치론자들이 수세에 몰리는 것도 이 지점이다. ‘형벌의 목적은 교화지 보복이 아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가 ‘네 자식이 당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같은 말로 번번히 얻어터진다. 최근 법원도 이른바 ‘오원춘 살인사건’ 의 재판에서 범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형벌의 본질은 교화 못지않게 범죄에 대한 응보 내지 죄형의 균형에도 있다” 말로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응보는 옳은가 그른가. 이것은 한 쪽이 ‘오원춘’을 들이밀면 다른 한 쪽은 ‘우행시’를 들이미는 지루한 줄다리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나는 질문을 바꿔볼 것을 제안한다. 니체가 ‘순수이성은 가능한가’ 라는 칸트의 질문을 ‘왜 순수이성을 추구하는가’ 로 받아쳤듯, ‘범죄에 대한 응보는 옳은가 그른가’ 라는 질문을 ‘왜 범죄는 응보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보자.
니체는 이 생각의 근원을 ‘갚는다’ 즉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에게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모든 인간 관계의 근본이자 원초적 관계다. 따라서 죄 개념의 근본도 경제적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실제로 니체는 ‘죄’라는 도덕개념이 부채(Schulden)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경제적 개념이 형식상의 변형을 일으킨 것이라고 추측한다. 등가적 교환은 계약 당사자들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데, 이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손해를 본 측은 어떤 식으로든 그 손해분을 메우고 변제하도록 손해를 입힌 측을 강요한다는 가설이다. 이 때 변제의 수단, 즉 ‘등가물’ 이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 혹은 고통을 줄 권리이다. 니체는 이것을 형벌의 기원으로 보았다. 이로써, 응보는 그다지 정의로운 일도 의미있는일도 아니게 된다.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지만, 글머리에서 언급했던 남편의 호소 중 일부를 보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 같지는 않다. ‘저 사람이 힘들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선처를 받는다면, 힘들게 사는 우리 가족과 힘들게 살다 처참하게 죽은 우리 아내는 어디서 보상받습니까.’,‘저도 사람인지라 너무 분하고 억울해 저 자의 생명이 여러개라면 그 생명 모두 빼앗고 싶습니다.’

형벌은 오늘날 부모가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피해에 대해 가해자에게 표출하는 분노로 가해진 것. 그러나 이 분노는, 모든 손해에는 그 어딘가에 등가물이 있으며, 심지어 가해자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실제로 배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념에 의해 억제되고 변용되었다. 이 원시적으로 뿌리 깊은, 아마 이제는 더 이상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인 관념, 즉 손해와 고통은 등가라는 관념은 어디서 힘을 얻었던 것일까? 나는 이것이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제 2 논문 4절 중

등가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 즉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채권자에게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 형벌 집행권이 이미 ‘당국’에 넘어갔을 때는, 그 사람이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을 한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이란 즉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제 2 논문 5절 중

마치며, 혹은 다시 시작하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도 잘 모르겠다. 앞서 사형제 폐지의 근거를 신나게 늘어놓았지만, 그것들을 찾기 위해 검색창에 ‘사형’ 만 쳐도 쏟아지는 수많은 강력범죄들 기사를 보니 분노에 손부터 떨려온다. 굳이 대답한다면, 나는 그 손떨림의 계보를 찾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다고 말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그리고 우리가 ‘당장 찢어 죽여야한다’ 와 ‘그래도 생명은 소중하다’ 사이의 무한 반복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니체는 기존의 정의 개념을 비판하며, 공동체가 강화된 자의식으로 인해 개인의 공격을 더 이상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기에, 여러 행위들이 허용 되는 이상적인 공동체와 정의 개념을 꿈꾸고 이 새로운 정의를 ‘자비’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주권적, 능동적 개인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복수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하며 해탈하기도, ‘그래도 죽여야 한다’ 며 다시 아무 것도 몰랐을 때 혹은 아무 생각도 없었을 때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위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 행위는 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어야 함은 확실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하는 질문에 내가 ‘이렇게 합시다’ 한다고 해서 그대로 할 것인가? 그런 것처럼 ‘사형제도는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도 세상의 ‘당연히 죽여야한다’ 같은 목소리에 휩쓸려가지 말고, 그런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하지 말고, 한 번 쯤 ‘꼭 죽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봤으면 좋겠다. 답 찾으면 나도 좀 알려주시고.

참고문헌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백승영, 니체 『도덕의 계보』(해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이병태, 『법률용어사전』, 법문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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